제목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낫도다”
본문
시편 118편 1-9절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길을 걷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본 적이 있으십니까? 처음에는 몇 방울 떨어지다가 순식간에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비를 피할 곳을 찾습니다. 가까운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가기도 하고, 버스정류장이나 건물 안으로 몸을 피하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를 맞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안전한 곳에 있어야 비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예고 없이 폭풍우가 찾아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질병이 찾아오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밀려오며,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녀의 문제와 가정의 갈등, 실패와 좌절이 한꺼번에 밀려와 숨조차 쉬기 어려운 순간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폭풍우 자체가 아니라 그 순간 우리가 어디로 피하느냐는 것입니다. 시편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평안할 때는 누구나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정작 위기가 찾아오면 우리의 신앙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까? 아니면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찾고, 가진 것을 계산하며, 눈에 보이는 도움을 의지하려 합니까?
어떤 신학자는 “인간은 자신이 가진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결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위기 앞에서는 사람의 힘과 권력, 물질과 경험을 더 신뢰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18편은 절망의 한복판을 지나온 한 사람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는 사방에서 밀려오는 대적들 앞에서 무력함을 경험했고,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지나면서 한 가지 분명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시 118:8-9) 시편 기자는 사람이 줄 수 없는 안전과 평안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사람은 잠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인생 전체를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폭풍우를 피하게 하실 뿐 아니라 폭풍 한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모든 헛된 신뢰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참된 피난처로 삼는 믿음을 회복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1. 감사의 근거 — 환경이 아닌 영원한 '헤세드' (1~4절)
본문 1절부터 4절까지 시인은 숨 가쁘게 외칩니다. 우리 함께 1절 말씀을 목소리를 합하여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18:1) 시인은 지금 슬픔과 고통이 다 지나간 뒤에 한가롭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온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 감사의 찬양에 동참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2절에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등장하고, 3절에는 아론의 집 곧 제사장들이 등장하며, 4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와 영적 지도자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에게까지 감사의 찬양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특정한 계층이나 일부 사람들만의 고백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선포해야 할 신앙고백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인자하심’은 히브리어 원어로 ‘헤세드(חֶסֶד)’라고 합니다. 이 헤세드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입니다. “인자하심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잘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친절이나 인간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조건이나 상태에 따라 변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여 넘어지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릴지라도, 하나님 쪽에서 먼저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나가시는 ‘포기하지 않는 신실한 사랑’, ‘언약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사랑과 조건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가 되기도 하고, 나를 평생 지켜줄 것 같았던 직장과 물질이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지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멸망하고 성전이 불타버린 절망의 현장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 3:22-23)
나라가 망하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순간에도 예레미야가 소망을 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헤세드’가 아침마다 새롭고 영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시편 136편을 보면, 시인은 무려 26번에 걸쳐 매 구절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를 반복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출애굽의 기적을 행하실 때도, 거친 광야를 지나가게 하실 때도, 마침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때도 하나님의 헤세드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감사는 환경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상황이 좋으면 감사하고 상황이 나빠지면 불평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감사는 조건에 따라 흔들리는 감정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일이 감사할 만하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난과 핍박, 고난과 부족함 속에서도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감사의 근거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성도의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뿌리를 내립니다. 내 삶이 광야와 같고, 사방이 막혀 있으며, 당장 눈앞에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약속은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헤세드를 바라보며 외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위기의 돌파구 — 좁은 고통의 방에서 부르짖으라 (5~7절)
그렇다면 영원한 헤세드를 신뢰하는 자는 고난이 찾아왔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합니까? 본문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시 118:5)
이 한 구절 안에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위대한 역설과 역전의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 보면 두 개의 공간이 선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는 ‘고통’의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넓은 곳’의 공간입니다. 여기서 ‘고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메차르(מֵצַר)’는 본래 ‘협착한 곳’, ‘사방이 꽉 막힌 좁은 방’, ‘사방에서 벽이 밀려와 나를 압착하는 듯한 장소’를 뜻합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보신 적이 없습니까? 경제적인 압박감이 내 목을 조여올 때, 사방을 둘러봐도 내 편은 하나도 없고 나를 공격하는 벽만 가득 차 있는 것 같을 때, 우리는 ‘메차르’, 즉 고통의 좁은 방에 갇히게 됩니다. 이 공간은 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극심한 폐쇄공포증을 유발하는 절망의 자리입니다.
폐쇄공포증(Claustrophobia)은 좁고 막힌 공간에 들어갔을 때 강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증상을 말합니다. 엘리베이터, 터널, 지하실, MRI 검사실, 창문이 없는 작은 방 등에 들어가면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고, 가슴이 답답해지며, 식은땀이 나고, 당장 그 공간을 벗어나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심한 경우에는,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 가슴 두근거림, 어지러움, 질식할 것 같은 공포 “이대로 죽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 등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좁고 답답한 방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마치 사방의 벽이 점점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숨조차 쉬기 어려운 상태를 말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사업이 무너졌는데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일 수 있습니다. 병원에서 예상치 못한 진단을 받았을 때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 문제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외로움 속에 갇혀 있을 때일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으며, 말씀을 읽어도 위로가 되지 않는 깊은 영적 침체의 상태를 말합니다. 심리적으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불안, 무엇을 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무력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압박감, 그리고 ‘나는 이제 끝났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바로 그곳이 시편 기자가 말하는 ‘메차르’, 곧 사방이 막힌 고통의 자리였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라고 고백합니다. 절망의 벽을 향해 한탄하거나 신세를 한탄한 것이 아니라, 그 벽을 뚫고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부르짖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조용히 읊조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은 처절한 부르짖음입니다. 내 힘으로는 이 좁은 방의 벽을 깨뜨릴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의 전능하신 손길만을 구하는 항복 선언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기서 ‘넓은 곳’은 히브리어로 ‘메르하브(מֶרְחָב)’라고 합니다. 이것은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지, 어떤 장애물도 없이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는 자유와 안전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를 옥죄고 있던 고통의 벽들을 단번에 무너뜨리시며, 우리를 자유롭고 안전한 ‘넓은 곳’으로 이끌어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시편 18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구원의 은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가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시 18:16, 19) 또한 시편 50편 15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5) 우리가 환난 날에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주님께 피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어 응답을 경험한 자의 심령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옵니까? 바로 '두려움의 소멸'입니다.
본문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 118:6-7) 얼마나 당당하고 위대한 선포입니까?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시는데, 세상의 썩어질 육체를 가진 인간이 감히 나를 어찌하겠느냐는 담대한 선언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이 외쳤던 승리의 찬가가 바로 이 시편의 성취가 아닙니까?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1, 38-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아무리 협착하고 좁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편이십니다. 그분이 내 곁에 서 계십니다. 눈앞의 원수들과 문제의 크기에 압도되지 말고, 그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르짖으십시오. 그리하여 좁은 ‘메차르’의 고통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활한 ‘메르하브’의 자유를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신뢰의 대상 전환 — 사람과 방백을 내려놓으라 (8~9절)
이제 시인은 본문 전체의 결론이자, 우리 인생을 향한 가장 강력한 영적 경고와 지혜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 8절과 9절 말씀을 우리 다 함께 한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시 118:8-9)
이 두 구절은 완벽한 대구법(Parallelism)을 이루며 동일한 진리를 중첩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삶’과 ‘사람을 신뢰하는 삶’, 그리고 ‘여호와께 피하는 삶’과 ‘고관(방백)들을 신뢰하는 삶’을 저울 위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낫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고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디빔(נְדִיבִים)’은 당시 사회에서 막강한 권력과 부, 명예를 가지고 있어서, 말 한마디로 사람의 생사를 가를 수 있고 거대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세상의 유력자들’, ‘정치적 방백들’을 의미합니다.
오늘날로 바꾸어 말하면 무엇일까요? 대기업의 회장, 고위 관직자, 내 인생의 줄을 대어줄 수 있는 유력한 인맥, 혹은 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자본과 시스템을 뜻합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저 힘 있는 사람이 내 사정을 알고 나를 한 번만 도와주면 내 인생의 꼬인 실타래가 단번에 풀릴 텐데...’, ‘저 권력자가 나를 지켜주면 내 미래는 안전할 텐데...’ 그러나 성경은 세상의 방백들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 일인지 끊임없이 경고합니다.
시편 146편 3절과 4절은 이렇게 명확하게 선포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 146:3-4)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가진 고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코에서 호흡을 한 번만 거두어 가시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애굽을 의지하려 할 때 강력하게 책망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자빠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사 31:1,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유력한 자들은 결코 우리의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한계를 지닌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우리가 온전히 신뢰하고 기댈 대상이 아니라, 오직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답입니다. 여기서 ‘피한다’는 것은 단순히 소극적으로 도망쳐 숨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의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내 모든 염려와 짐을 주님 발 앞에 내려놓고, 그분의 전능하신 날개 그늘 아래로 나의 삶을 완전히 던지는 ‘적극적인 믿음의 결단’을 의미합니다.
잠언 18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잠 18:10) 세상의 방백들은 위기가 찾아오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우리를 가장 먼저 버릴지 모르지만, 우리의 견고한 망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그분께 피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신뢰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인생의 무게중심은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세상의 썩어질 동아줄을 붙잡으려 하지 말고,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여호와의 도우심의 손길을 붙잡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신뢰의 대상 점검과 영적 재조정
이제 말씀을 우리의 실제 삶에 적용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선포된 시편 118편의 말씀은 우리에게 인생의 근본적인 ‘영적 재조정(Spiritual Re-alignment)’을 요구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누구나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순간을 만납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고, 내가 탄 배가 거친 풍랑에 휩쓸려 침몰할 것 같은 공포를 느낍니다. 마치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이 경로를 잃고 고장 난 것처럼, 내 인생의 방향 감각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린 것 같은 순간입니다.
그때 우리는 조급해지기 시작합니다. 속도를 더 내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 보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내 힘으로 인맥을 동원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세상의 고관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아무리 빨리 달려간들, 그 끝은 낭떠러지일 뿐입니다. 사방이 꽉 막힌 좁은 고통의 방에 갇혔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상의 문을 두드리며 속도를 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던 길을 멈추고 내 인생의 목적지와 신뢰의 대상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작가이자 목회자인 A.W. 토저(A.W. Toz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보배로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기자도 같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의지할 때는 늘 불안하지만,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은 잃어버릴 수 없는 가장 큰 보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가장 먼저 의지하고 있던 세상의 ‘방백들’을 과감히 내려놓으십시오.
돈에 대한 과도한 신뢰, 유력한 사람에 대한 기대, 내 경험과 능력을 믿었던 교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들이 내려놓아 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됩니다. 내 손에 쥐고 있는 인간적인 무기들을 다 내려놓고 빈손으로 주님께 피할 때, 여호와의 전능하신 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라는 깊은 고통의 방에 갇혔을 때, 그것을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내가 약해지고, 내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피난처로 삼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삶에 온전히 머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돌파하는 거룩한 비결입니다. ‘메차르’에서 ‘메르하브’로 인도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시인은 죽음의 위기와 사방의 우겨쌈 속에서 위대한 신앙의 승전가를 불렀습니다.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전히 원수들은 사방에 도사리고 있었고, 위협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눈을 들어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 신실하신 ‘헤세드’의 사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좁고 숨 막히는 고통의 방(메차르)에서 하나님을 향해 온 마음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세상의 유력한 자들, 도울 힘이 없는 인생들을 의지하려 했던 모든 헛된 신뢰를 끊어버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완전히 피해 들어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시인의 편이 되어 주셨고, 그를 옥죄던 모든 두려움의 사슬을 끊어버리셨으며, 마침내 광활하고 안전한 ‘넓은 곳(메르하브)’에 그를 세워 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성도 여러분 중에도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것 같은 답답함과 고통 속에 계신 분이 있습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영적인 폐쇄공포증 속에서 신음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인간적인 계산기를 내려놓으십시오. 사람을 신뢰하고 환경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기까지 그 인자하심을 확증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의 모든 헛된 신뢰를 내려놓고 오직 여호와께 피할 때,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고통의 벽들을 무너뜨리시고, 우리를 가장 안전하고 영광스러운 ‘넓은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 영원히 신실하신 주님만을 끝까지 신뢰하며, 어떤 위기 앞에서도 담대하게 승리하는 모든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고 좁은 고통의 방에 갇혀 신음할 때에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은 영원히 변하지 않음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고, 세상의 고관들과 유력한 자들의 도움만을 구했던 어리석음을 회개합니다. 사람의 호흡은 유한하며, 세상의 물질과 권력은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고 넓은 곳에 세우실 신실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