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선교 현장 가는 선교사는 자신도 유익 얻어
교회나 세상의 칭찬·비난·평가에 관계없이 중대한 사역을 묵묵히 감당해
가톨릭 선교사들이 자기 부인하며 살았지만, 유능한 토착 교회 세우진 못해
개신교는 자기 힘으로 지탱하고, 안내하고, 확대하는 토착 교회 세워나가야
금욕 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선교사가 완수하는 공적 사명보다 개인 생활에서 드러나는 성품에 더 관심을 둡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의 부름을 받아 자신을 부인하며 살아가는 가톨릭 성직자를 크게 칭찬합니다. 가톨릭 성직자는 친지와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 고향 땅을 절대 다시 밟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국과 고향을 등집니다. 그는 우애 두터운 친구들도 버리고 조국과 관계된 것들도 버립니다. 그는 선교 현장 원주민 사이에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신과 시간과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런 가톨릭 선교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선교사가 사역 현장에서 아무리 고생해도 고향에 머물러 사는 것보다는 편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말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우리의 취지가 아닙니다. 다만 가톨릭 선교사의 최선의 행동을 대중의 시각으로 볼 때, 교회의 명령에 고국을 등지는 가톨릭 선교사가 온전한 헌신을 보여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이 이보다 더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가톨릭 선교사가 그런 방식으로 자기 부인이라는 삶의 목표를 추진해 나갈 때 우리는 살펴봐야 합니다. 그가 개인적인 이득을 최대로 얻기 위해 매우 영리하고 철저하게 계산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이러한 검토 과정은 적절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그 선교사의 인생 목표가 무엇일까요? 이제 설명할 두 가지 중 하나일 수도 있고,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첫째로, 그 선교사는 개인적인 목표를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길에서 보장된 지위를 얻는 것이 그 선교사의 인생 목표일 수도 있고, 본인 개인의 구원을 이뤄가는 것이 목표일 수도 있습니다. 공적을 쌓는 것이나 교회나 세상에서 이름과 명성을 얻는 것이 목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동기 하나하나에 영향을 받아 선교 현장으로 달려간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목표는 종류가 다양하지만 본질은 모두 똑같습니다. 모두 이기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를 지닌 선교사도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삶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을 얻는 데 꼭 필요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고 할 뿐입니다.
둘째로, 선교사의 인생 목표가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과 무관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선교사는 위의 경우와 정반대로, 지위를 얻거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거나 공적을 쌓거나 명성을 얻을 목적으로 선교 현장에 가지 않습니다. 이러한 선교사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선교 현장으로 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할 때 자신도 의심의 여지 없이 유익을 얻습니다.
이러한 선교사를 사역 현장으로 몰아가는 신념은 위에서 언급한 선교사의 경우와 정반대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선교사는 자신의 유익을 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하는 선교사는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선교 현장으로 가기 때문에 자신도 유익을 얻습니다.
이러한 선교사는 자신에 관하여 생각하거나, 자신을 위하여 생각하거나, 자신에게 생각을 집중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선교사는 사역 대상자들에게 생각을 집중합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헌신적으로 사역을 감당해 나갈 때, 큰 뜻을 세우고 펼쳐나가는 한, 자신의 행동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 그다지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나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상관하지 않고, 좋은 평가를 받든 나쁜 평가를 받든, 꿋꿋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갑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동료들의 판단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선교사도 다른 사람의 갈채에 기가 살기도 하고, 자신의 사역 실정에 대해 거의 모르거나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비난에 풀이 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선교사는 굳게 확신하는 길로 경쾌하게 걷기도 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도 하면서, 중대한 사역을 가장 신속하고 만족스럽게 이루기 위해 묵묵히 사역을 감당해 나갑니다.
이러한 선교사는 자신의 장점이나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이뤄야 하는 소명을 감당하는 도구가 되기 위해 힘쓸 뿐, 자신이나 안락함이나 명성이나 목숨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감히 자신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동기와 행동과 자기 자신을 맡깁니다. 이렇게 오직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그의 동기라면,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한 가지 목적, 그의 인생의 목표는 길잃은 양들을 모아 ‘선하신 목자’의 우리 안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는 어둠에 있는 이들에게는 빛으로, 속박된 이들에게는 해방자로, 죄인에게는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안내자로 다가갑니다.
그러한 선교사는 토착민 교회를 세우는 꿈을 꿉니다. 교인 숫자도 많고, 성경 말씀도 훤히 알고, 사도행전 20장 27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 뜻”을 따라 가르침을 받는 교회입니다. 그는 외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온전히 자력으로 활동하는 자립적인 교회, 세상을 개혁하는 일에 기쁘게 나서는 교회, 느리지만 꾸준하게 하나님 나라의 영역을 늘려나가는 교회를 세우기를 꿈꿉니다.
그러한 교회는 모든 계층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하게 살도록 깊이 감화하고, 그 나라 전체에 의를 이루어 갑니다. 그러한 선교사는 토착민 교회가 외국인과 외국 물자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해서 활동하는 것을 되도록 빨리 보기 소망합니다. 또한 토착민 교회가 합당하게 성장하여, 중국과 온 세상에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이 엄청난 일을 감당하는 모습을 되도록 빨리 보고 싶어 합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인생길을 가던 중에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수고와 기쁨, 의무와 성과를 뒤로하고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곧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한다는 뜻이요, 그것이 그에게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에게 훨씬 유익했던 그것을 한쪽으로 완전히 제쳐놓고, 계속 수고하며 고통받고자 했습니다. 수고하고, 기뻐하고, 의무를 감당하고 성과를 거두면서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더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인이며 본보기인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고, 자신을 위해 죽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목표, 바울이 육신과 영혼과 영을 다 쏟아 집중한 유일한 목표는 튼튼하고 활발한 믿음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3~2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어떤 선교사가 오로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 목적을 이루도록 도와주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중국에 존재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역사가 그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방법으로는 그러한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13세기에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파송한 성실하고 유능한 선교사들은 중국에 선교회를 창설하여 주목할 성과를 거두고 부흥하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초기의 중국인 회심자들은 ‘교회’를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회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정치 문제로 외국 성직자들이 갑자기 중국에 오지 못하자, 중국의 토착 교회는 와르르 무너져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16세기와 17세기에도 비슷한 규모의 성공과 붕괴가 되풀이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서양 성직자들이 추방된다면, 우리는 당시와 똑같이 이름뿐인 수많은 가톨릭 교회들이 대대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자립할 수 있게 꾸준히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외국 선교사가 본국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 와도 중국 토착민 교회가 굳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립이야말로 로마 교회에서 절대 용인하지 않는 크나큰 적입니다. 가톨릭에서 자립, 즉 독자적인 판단이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에 해당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유일한 죄인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리가 다른 이단도, 인생의 죄들도 다 눈감아주고 용인해 줍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믿거나 아무것도 믿지 않을 수도 있고, 도덕적이거나 부도덕하게 살 수도 있으며, 성자나 살인자가 될 수도 있지만, 항상 교황을 의지하기만 하면, 칭찬받는 충실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가톨릭에서는 생각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유일하게 배척하는 사람은 감히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은 토착민 회심자에게 지시하고 명령합니다. 그들은 토착민 회심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허락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럴 엄두도 못 낸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런 외국인 성직자들이 추방당하는 경우, 토착민 회심자들이 어떻게 바로 서겠습니까? 우리는 가톨릭 선교사들이 자기를 부인하며 산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를 부인하며 살지라도, 외국 선교사에게서 독립된 유능한 토착 교회를 세우는 기독교적 지혜가 그들의 삶에 빠져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안타깝게 여깁니다. 만약에 가톨릭 선교사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면서, 감히 자기를 부인한다고 말도 못 하는 겸손한 사람들보다 크고 좋은 결과를 냈다면, 벌써 전부터 가톨릭 선교사들을 본받으라는 권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세기가 지나고 보니,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간 가톨릭 선교사들이 낸 결과가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더욱 중대한 결과를 낳는 다른 문제를 주목했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안내하고, 확대하는 교회를 하루라도 더 빨리 중국에 세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로마 가톨릭의 방법이 그렇게 최선은 아니라는 사실이 수 세기의 경험으로 입증되었으니 말입니다.
발췌: 존 로스 선교사의『만주선교 방법론』
번역: 순교자의 소리(www.vomkorea.com), 감수: 리진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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