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호 목사의 영혼의 양식 54]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

오피니언·칼럼
느헤미야 8장 1절~12절

제목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

 

본문
느헤미야 8장 1절~12절

서론

외형의 완성을 넘어, 내면의 성전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갈까요? 돈이 많으면 힘이 생길까요? 권력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을까요? 환경이 좋아지면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질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지치고 흔들립니다. 몸이 피곤해서만이 아닙니다. 마음이 메마르고 영혼이 병들 때 사람은 쉽게 낙심합니다. 겉으로는 웃고 살아가지만, 속은 텅 빈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요즘 시대는 특별히 마음이 병든 시대입니다. 불안과 두려움, 염려와 우울, 분노와 상처가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열심히 붙잡고 살아가는데도 이상하게 버틸 힘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중심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진짜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람의 힘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환경이 좋아져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회복할 때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느헤미야 8장은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무너졌던 성벽도 다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완성되었다고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여전히 지쳐 있었고, 신앙은 무너져 있었습니다. 겉모습은 회복된 것 같았지만 영혼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 관원이었지만, 무너진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눈물로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돌아와 무너진 성벽과 공동체를 다시 세운 믿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가장 먼저 회복하려 했던 것은 성벽이 아니었습니다. 경제도 아니고 군사력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왜 울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들의 무너진 영적 상태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 8: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힘입니다. 세상은 경쟁의 힘, 돈의 힘, 인간관계의 힘을 말하지만, 성경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환경은 흔들려도 중심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눈물이 있어도 절망 속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상황을 초월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무너진 우리의 마음이 회복되고, 지친 영혼이 새 힘을 얻으며, 다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느헤미야의 탁월한 리더십과 백성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되었습니다. 대적들의 끊임없는 방해와 위협 속에서도 단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너진 성문이 다시 세워졌고, 대적들은 낙담했으며, 백성들은 비로소 안전한 울타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외형적인 조건으로 보면 완벽한 성공이며 마땅히 축제 분위기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완성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눈에 보이는 돌 성벽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거대한 영적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성벽이 무너져서 망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졌기에 망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외형의 재건이 곧 영혼의 재건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돌을 쌓아 올리는 작업이 끝났다면, 이제는 무너진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쌓아 올려야 할 때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눈에 보이는 성벽 완공에 안주하지 않고, 진정한 영적 대각성과 내면의 회복을 위해 말씀 앞으로 나아오는 백성들의 역동적인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슬픔이 변하여 찬송이 되며, 여호와를 기뻐하는 진정한 영적인 힘을 회복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말씀 앞에 바로 서는 신앙 — 수문 앞 광장에 불어온 말씀의 바람 (1~4절)

성벽 재건이 끝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제히 한 장소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느 8:1)

여기서 우리가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일제히’와 ‘청하매’입니다. 백성들이 모인 곳은 성전 내부가 아니었습니다. 평민들, 여인들, 아이들까지 누구나 제한 없이 나아올 수 있는 열린 공간인 ‘수문 앞 광장’이었습니다. 그 광장에 모든 백성이 일제히 모였습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느헤미야나 에스라 같은 지도자가 강제로 집회를 소집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백성들이 먼저 자발적으로 학사 에스라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와 우리에게 읽어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시작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어떤 화려한 프로그램이나 인위적인 연출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거룩한 영적 목마름이 있을 때 비로소 부흥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영적 침체를 겪는 이유는 말씀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스마트폰만 켜면 전 세계의 홍수 같은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서점에 가면 수많은 기독교 서적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짜 부족한 것은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백성들이 가졌던 ‘말씀을 향한 타오르는 갈급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한 지식이나 교양이 아니라, 내 영혼을 살릴 유일한 생명의 양식으로 대하는 태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갈급함이 사라졌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말씀 없이도 불안하지 않고, 예배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며, 하루 종일 세상의 소리는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에는 무감각해지는 모습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몸의 배고픔은 견디지 못하면서도 영혼의 굶주림에는 점점 둔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백성들의 태도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3절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전까지 뭇 백성의 남녀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느 8:3) ‘새벽부터 오전까지’는 대략 여섯 시간가량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광장에서 여섯 시간 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한 자리에 서서 말씀을 듣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의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에어컨이 나오는 쾌적한 환경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백성들이 초막절을 다시 지키게 되는 장면(느 8:14–18)을 보면, 에스라는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삶에 적용되는 율법 규례들을 읽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신명기나 레위기 계열의 율법 조항들이 중심이었을 가능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온 마음과 신경이 하나님의 말씀에 고정되어, 단 한 구절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경외함의 태도였습니다.

5절에 보면 에스라가 책을 펼 때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섰다고 기록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단순히 예의를 지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하나님 앞에 서는 사건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압도적인 경외심의 표현이었습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그들은 단순히 책 한 권 앞에 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 앞에 선 것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은 사람의 양심을 깨웁니다. 잠들어 있던 영혼을 흔듭니다. 죄를 드러내고, 마음을 찌르고,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은 단순히 설교를 듣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경외하는 사람은 태도가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고,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강단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는 영적인 귀와 마음과 삶을 열어 경청하고 있습니까? 강단이 열릴 때 광장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고, 그 말씀을 받는 회중이 두렵고 떨리는 경외함으로 귀를 기울일 때, 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영적 각성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심령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수문 앞 광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거룩한 울음, 위대한 회복 — 말씀이 비추고 은혜가 덮을 때 (5~9절)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선포되고 해석되기 시작하자, 수문 앞 광장에는 놀라운 영적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에스라를 도왔던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이 말씀의 뜻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8절과 9절 전반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 8:8-9) 백성들의 두 번째 반응은 다름 아닌 ‘눈물’이었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왜 그들은 말씀을 깨닫자마자 눈물을 흘렸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말씀의 거울이 그들의 심령을 적나라하게 비추기 시작했을 때, 그동안 가려져 있던 자신들의 비참한 실상과 죄악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나라를 잃고 유리방황해야 했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들이 고국에 돌아와서도 왜 여전히 이토록 비참하고 곤고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말씀 앞에서 비로소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보게 되었습니다. 왜 삶이 무너졌는지, 왜 나라가 무너졌는지, 왜 마음이 메말랐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살았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 눈물은 단순히 감정적인 동요나 후회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자신의 불의함을 깨달은 자들이 흘리는 ‘거룩한 통회’의 눈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말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습니다. 이 근심은 사람을 낙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후회할 것 없는 회개를 이루는 눈물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의 은혜를 이야기할 때, 무조건적인 위로나 즉각적인 평안만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참된 은혜는 언제나 아픈 말씀의 메스로 우리의 죄를 찢고 드러내는 과정에서 시작됩니다. 내 죄가 얼마나 깊고 무서운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은혜가 결코 깊게 다가올 수 없습니다. 말씀이 내 영혼의 어두운 구석을 사정없이 비출 때, 우리는 아파하며 울어야 합니다. “주여, 내가 바로 그 죄인입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떠나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흘리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의 눈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비추었다면, 그다음 차례는 하나님의 헤세드, 즉 끊이지 않는 자비와 은혜가 우리의 눈물을 덮는 단계입니다. 성벽을 재건한 방백 느헤미야와 학사 에스라, 그리고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은 울고 있는 온 백성을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9절 후반부입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라 울지 말라 하고” (느 8:9)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통곡을 제지합니다. 죄를 깨닫고 우는 것은 합당하지만, 하나님의 날에 절망과 슬픔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목적은 우리를 정죄하여 죽이는 데 있지 않고, 회개케 하여 살리는 데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10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슬픔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절망의 눈물이 아니라,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거룩한 애통입니다.

또 요엘 2:13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눈물만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3. 여호와를 기뻐하는 힘 — 근심의 자리에 피어난 하늘의 기쁨 (10~12절)

이제 본문은 이 위대한 영적 대각성의 절정에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영적 비밀을 선포합니다.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 8:10) 여기서 “살진 것”은 풍성한 잔칫상의 음식을 의미하고, “단 것”은 달콤한 포도즙과 같은 기쁨의 음료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백성을 절망 속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회복의 기쁨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특히 느헤미야는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고 말합니다.

은혜는 결코 자기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연약한 이웃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영적 회복은 혼자 기뻐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 사랑과 나눔이 흘러갈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러면서 그 기쁨의 근거를 명확하게 밝힙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도 기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기쁨은 대개 조건적이고 환경적인 기쁨입니다. 주머니에 돈이 넉넉할 때, 몸이 건강할 때,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했을 때, 사업이 잘 풀릴 때 기뻐합니다. 물론 이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조건이 사라지면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주머니가 비고, 건강을 잃고, 환경이 나빠지면 기쁨은 순식간에 두려움과 근심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선포하는 기쁨은 전혀 다른 차원의 기쁨입니다. 환경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존재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 때문이 아니라, 나의 구원자가 되시고 아버지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그분 자체’로 인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적인 조건은 여전히 척박했습니다. 비록 돌 성벽은 완공되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이방 대적들의 위협과 질시는 여전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포로 생활의 후유증으로 경제적인 기반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의 속국에 불과했습니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봐도 한숨 쉴 일뿐이고, 근심할 조건밖에 보이지 않는 척박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깨달은 말씀이 그들의 눈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은 초라하고 대적들의 위협은 거셀지라도,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언약에 신실하게 우리를 마침내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영적 확신이 말씀 안에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근심의 자리에 하늘의 기쁨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단순히 감정의 만족으로 끝나지 않고, 험한 세상을 이겨낼 영적인 ‘힘(Strength)’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짜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굳센 의지나 대단한 인맥, 혹은 든든한 물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험난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웃을 수 있는 영적인 기쁨, 그 하늘의 기쁨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그 기쁨이 있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물질이 없어도, 건강이 연약해져도,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내 안에 흐르는 여호와의 기쁨이 삶의 에너지가 되어 다시 일어서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12절은 이 집회의 최종적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앎이라” (느 8:12) 백성들이 어떻게 이토록 크게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까?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정한 기쁨과 삶의 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위에 기초합니다. 말씀이 깨달아질 때 우리 안에 참된 회개가 일어나고, 회개의 눈물이 지나간 자리에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이 임하며, 그 기쁨이 마침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위대한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삶의 광장에서 말씀으로 승리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느헤미야 8장의 말씀을 통해 수문 앞 광장에서 일어났던 위대한 영적 대각성의 현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수천 년 전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2026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영적 원리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버둥거리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오늘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게 질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심령에는 수문 앞 광장의 백성들이 가졌던 말씀에 대한 갈급함과 경외함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까? 내 영혼을 발가벗기듯 비추는 말씀 앞에, 죄를 애통해하며 흘리는 거룩한 눈물이 있습니까? 그리하여 내 삶을 움직이는 진짜 에너지는 세상의 조건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이겨내는 하늘의 기쁨입니까?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세상의 조건들을 채워야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돈이 있어야 힘이 생기고, 성공해야 기쁠 수 있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세상이 주는 힘과 기쁨은 일시적이며, 우리를 언제나 더 큰 갈증과 근심의 자리로 몰아넣을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진짜 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온전히 설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번 한 주간, 세상의 복잡한 소음에서 잠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홀로 서시기를 바랍니다. 그 신실하신 생명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을 비추고 영혼을 흔들 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온전한 순종과 통회함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처한 모든 근심의 자리가 변하여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는 찬송의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공급받아, 삶의 거친 광장 속에서도 날마다 넉넉히 승리하는 모든 성도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새벽부터 오전까지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경외함으로 섰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성벽을 쌓는 데만 급급하여 정작 내면의 영혼이 메말라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보게 하옵소서. 말씀의 거울 앞에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을 정직하게 대면하며 애통해하는 거룩한 울음이 우리 안에 회복되게 하시고, 그 눈물 뒤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비와 위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세상의 환경과 조건이 흔들릴지라도 나의 구원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하늘의 기쁨이 우리 영혼에 가득하게 하사, 험한 세상을 넉넉히 이겨내는 거룩한 힘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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