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뜻으로만 보자면 반사한다, 반응한다 혹은 반영한다는 것들의 명확한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매우 다른 의미이다. 반작용(re-action)은 어떤 자극(action)에 대해 거의 본능적이고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누가 나를 무시한다고 느꼈을 때,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도 전에 분노가 폭발하는 것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상대방이 나를 무시한다고 느끼는 느낌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유기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하는 생각과 판단, 감정과 느낌을 절대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내게 떠오른 생각, 감정이 타당하다고 해서 모두 객관적으로 옳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고할 수 있는 틈이 부족하거나 심지어 빈약할 때 우리는 순간적인 분노와 짜증을 쏟아내는 경우가 있고, 대부분 그 결과는 수치심과 미안함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거의 자동적이라고 할 만한 감정과 행동반응은 어떤 사건에 대한 인지적 숙고 과정을 생략한 다분히 미숙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우리는 반작용 혹은 반사 반응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보자. 누군가가 나를 무시한다고 ‘여겨지는’ 상황을 만날 때 그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하는 대신, ‘저 사람이 오늘 무슨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었나?’ 혹은 ‘나한테 섭섭한 일이 있나? 왜 저럴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화가 나고 섭섭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감정은 잘못이 없다. 그러나 나의 섭섭함에 압도되어 화를 버럭 내는 대신, 숨 고르기를 하고 나도 그 대상도 잠시 진정이 된 후 나의 섭섭함을 전달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아마도 전적으로 다른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관계가 나빠지거나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감정의 실체에 공감함으로써 더 깊은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선한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감정이 유발되는 상황과 사건을 만날 때 우리는 즉각적인 반사작용을 하기보다, 적절한 틈과 여유를 갖고 성숙하게 반응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이 반응은 우리의 책임지는 삶의 태도와 연결될 수 있다. 영어로 책임감을 ‘responsibility’라고 한다. 이것은 ‘response’ (반응)할 수 있는 ‘ability’(능력)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한 개인이 책임 있는 개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 필요, 감정, 판단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기애적 고집이나, 혹은 무관심, 무책임으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심하지 않은, 공존, 공감, 공유하려는 태도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사람들의 요구와 요청들, 생각과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에 반사 작용하지 않고 반응하며 서로 공감하고 책임지려는 성숙한 태도 말이다.
가족의 형태에 대해 핵가족을 지나 나노 가족(nano family)과 같은 용어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점점 관계가 단절되고 분절되며 흩어져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타인을 향한 관심보다 나 자신 하나 보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인관계에 날이 서 있고 예민하며 누가 해칠 것 같은 생각에, 자기방어에만 급급해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초기부터 마음을 같이 하는 공동체 지향성과(사도행전 2장 46절), 서로 함께 있는 것을 중시하였다 (히브리서 10장 25절).
심리적으로 그리고 관계적으로도 작용, 반작용의 관계가 예민하게 짜증과 분노로 오가는 요즘이다. 이러한 세상에 기독교인은 책임 있는 태도로 반응하며, 숙고하고, 여지와 여유를 갖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 건강하고 영적인 틈 안에 들려오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고 나누는 이들이다. 우리의 성급함과 조급함,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날선 마음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자. 그리고 그 틈에서 들리는 우리 주님의 조용한 음성을 들어보도록 하자. 사순절은 그러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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