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 ‘사과를 따고 나서’의 시인 프로스트, 기독시인이었을까?

오피니언·칼럼
칼럼
조덕영 박사의 기독교 시인을 만나다(46)

독일 작센 스위스 속 스웨덴 로셔Schwedenlöcher 가는 길에서 ©조덕영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로버트 프로스트 지음, 피천득 역(1997)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이어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독일 작센 스위스 속 스웨덴 로셔Schwedenlöcher 가는 길에서 ©조덕영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 3. 26-1963. 1.29)는 미국식 구어체에 익숙한 다작의 탁월한 미국 시인이었다.

미 매사추세츠주 입스위치의 초기 영국인 정착민 중 한 명인 조지 필립스 목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언론인,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출신이었다. 어머니가 스웨덴보르 계열 교회를 다녔기에 세례를 받았으나 성인이 되어 교회를 떠났다.

프로스트는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동부 다트머스대에 입학했으나 중퇴한다. 지금은 아이비리그의 경영학 명문으로 유명한 다트머스대는 본래 선교사 엘리자 휠록 목사가 원주민들에게 기독교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학교로 美 독립 이전 인가 받은 9개 식민지 대학 중 한 곳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기독교 교리와 영국식 생활방식을 가르치는 학교로 설립됐지만 회중교회 목사를 주로 교육했던 다트머스는 1970년대초까지 여성 입학을 허용치 않았던 보수적 대학이었다. 이 다트머스대가 프로스트에게 최초로 두 번이나 명예학위를 수여했으니 프로스트가 잠시라도 몸을 담았던 대학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 신앙 우선의 유별난 대학이었던 다트머스는 왜 프로스트를 그렇게 자랑스러워 했을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詩作 활동을 하던 프로스트는 1894년 유명 문학지 <뉴욕 인디펜던트>에 처음으로 시 <나의 나비>를 발표 한다. 프로스트는 다트머스를 떠나 1897년부터 1899년까지는 하버드 대학도 다녔으나 병으로 자진 중퇴했다.

프로스트의 할아버지는 뉴햄프셔 주 데리에서 로버트와 엘리너 부부를 위해 농장을 구입한다. 프로스트는 9년 동안 이곳 농장에서 일하면서 이른 아침부터 글을 쓰고 많은 시들을 쓴다. 그렇게 사회, 철학적이면서도 목가적인 독특한 프로스트 시의 배경이 된다.

이후 1913년 런던에서 첫 시집 A Boy's Will 출판 이후 12권의 시집 상재. 1923년과 1936년 등 4 차례 퓰리처 상 수상. 미 현대문학의 대표적 인물로 1916년 미 국립예술원 회원, 1930년에는 미 한림원 회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고 그의 75세 생일과 85세 생일에 미 상원은 그에게 축사를 보내기로 정식 가결하기도 했다.

다트머스와 하버드를 중도 포기할만큼 특이하면서도 수줍음 많고 극도로 감수성이 예민하여, 대중 앞에 서는 것에 고통을 느낄 정도의 소박한 인물이었던 그는 평생 농장 생활을 좋아하고 스스로 바라던 목가적 시를 쓴 시인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목가적 시인으로 미국적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살았던 프로스트를 기독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한국식 복음적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독특한 의도를 따라 우리 모두를 다르게 지으셨다". 게리 토마스는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Sacred passway)며 예수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 단 하나가 아님을 알려준다. 그 길에는 수도사 같은 '금욕'도 있고, 예술가 같은 '감각주의'도 있고, 에베소교회와 같은 '전통'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어떤 이들은 돌봄과 사랑으로 그 예수의 길을 따라간다. 아마도 로버트 프로스트는 묵상과 관조와 자연의 영성이라 해야할까?

시인 정현종 교수(연세대 명예교수)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 대해 '초월적 세계와 지혜'라 했다. 프로스트는 자신의 詩作 과정에 대해 "시는 기쁨에서 시작해서 지혜로 끝난다" 말했다. "生의 해명(clarification)"이라는 말도 했다.

하나님은 조화와 질서와 다양성 속에서 세상과 우리 각자를 창조하셨다. 각자의 길에는 아름다움과 위험의 요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 믿은 자들의 길이 산을 오르듯 한 길만이 아님은 분명한 것같다.

사과의 고장 중원 충주에서 과수원을 하던 고향 풍경 때문이었을까? '가지 않은 길'과 "사과를 따고 나서"의 시인 프로스트는 필자가 젊은 시절 유난히 좋아하던 시인이기도 했다.

사과를 따고 나서(After Apple-Picking)

조덕영 박사

두 갈래 끝이 뾰족한 나의 긴 사다리는 나무 사이에서
아직도 하늘을 향해 걸려있고,
그 옆엔 덜 채워진 통이 있다.
어떤 가지에는 따지 못한 사과가
두서너 개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이제 사과 따기는 끝났다.
겨울 잠의 유혹이 짙게 느껴지는 밤
사과 향기; 나는 졸고 있다.
오늘 아침 물통에서 걷은 얼음 조각으로
서리 내린 초원을 비춰봤을 때
그 유리 같은 얼음 조각을 통해서 시야에 들어왔던
기이한 광경이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 얼음은 녹고, 떨어져 깨어졌다.
그러나 얼음이 떨어지기 전에 나는 이미
잠이 들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어떤 꿈을 꿀지도
알 수 있었다.
확대된 사과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꼭지와 꽃 끝이
그리고 적갈색 반점 하나하나가 뚜렷이 보인다
나의 발바닥에 여전히 아픔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사다리 가로대의 압력까지 느껴진다.
가지가 구부러질 때 사다리가 흔들리는 것도 느껴진다.
그리고 광에서는
연달아 쏟아지는 사과 무더기의
요란스런 소리가 자꾸 들린다.
나는 사과 따기를
너무 많이 해서, 내 자신이 그토록 바랬던
큰 수확에 그만 지쳐 버렸다.
천만개의 열매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고 따서, 떨어지지 않도록 살며시 내려놨다.
땅에 떨어진 사과는
멍이 안 들었건 그루터기에 찔렸건 상관없이
모조리 전부
사과주용 사과 더미로 보내져
쓸모 없어지니까.
내 잠이 어떤 잠이든지 간에
왜 잠을 설치게 될지 뻔히 알 수 있다.
만일 땅다람쥐가 아직도 있다면
그 놈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쏟아지는 이 잠이
그 놈의 잠과 같은 오랜 잠인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자는 그런 잠인가를.

조덕영 박사(신학자, 작가, 시인)

#조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