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도민 역차별 도구 우려되는 ‘제주인권헌장’

오피니언·칼럼
사설

제주도가 선포한 ‘제주평화인권헌장’을 놓고 갈등과 논란이 격화하고 있다. 제주도는 지난 10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세계인권선언 77주년 인권의 날 기념식’에서 ‘제주평화인권헌장’ 선포식을 가졌으나 반대하는 도민들과 제주거룩한방파제 회원들의 격렬한 항의가 이어지며 ‘평화와 인권 섬’ 제주도가 분열과 갈등의 깊은 격랑 속에 빠져든 모습이다.

선포식에서 오영훈 도지사를 비롯해 제주도교육감, 제주4·3유족회장, 청년·여성·이주민 대표 등이‘제주평화인권헌장’을 공동 낭독하며 도민 주권과 인권을 신장하는 헌장임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선포식장 안팎은 제주도가 헌장에서 표방한 ‘평화와 인권의 섬 제주’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제주 도민의 여론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인권 헌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고성 항의와 규탄 함성이 선포식장 안팎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선포식은 시작 전부터 거센 항의와 고성으로 뒤덮였다. 오 지사 등이 입장하는 순간 행사장 주변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던 도민들과 헌장 선포에 반대하는 단체 회원들이 “가짜 인권헌장 폐기하라”고 연호했으며, 이런 고성과 항의는 선포식 내내 이어졌다.

헌장에 반대하는 도민들과 단체 회원들은 헌장에 포함된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성적 지향’, 즉 동성애를 옹호하는 조항이 들어간 걸 특히 문제 삼았다. 국회에서 제정되지 않은 ‘차별금지법’ 핵심 조항을 도민 인권헌장에 넣은 의도가 무엇이냐는 거다. 이들은 이 조항이 “성 정체성 혼란을 부추기고 도민 갈등을 초래할 것”이라며 즉각 폐기를 요구했다.

이들이 행사장 까지 거센 항의를 이어간 배경은 제주도가 인권헌장 제정을 위해 발족한 제정위원회 구성에서부터 시작된 절차적 문제점과 요식행위로 끝난 공청회 등 하자 투성이의 진행 과정에 있다. 특히 문제로 지적된 ‘성적 지향’ 관련 권리 조항의 경우 제주도민의 정서와 종교계 우려를 철저히 무시한 채 좌파적 인권단체의 입맛에 따라 삽입했다는 주장이다.

‘제주평화인권헌장’을 둘러싼 갈등과 반목은 그동안 ‘평화의 섬’이란 이미지에 가려졌던 제주도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겉으론 평화와 인권으로 포장해 도민 모두가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내세우는 듯 했지만 도민 대다수의 여론을 무시하고 특정 이념에 사로잡힌 일방적인 헌장 선포로 시작된 역차별은 이제 돌이키기 어려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결국 ‘평화인권 헌장’이 도민 통합 대신 분열을 가져다준 셈이 된 거다.

제주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지난해 제주도가 ‘평화인권헌장’을 제정하려 할 때 이미 예고됐었다. 다만 도민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로 몸을 좀 더 낮추고 문제가 된 부분에 대해 도민의 우려를 반영했더라면 모두의 박수는 받지는 못했더라도 최소한 헌장 선포식이 극한의 고성과 욕설로 얼룩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화인권헌장’ 선포식은 제주도가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인 지난해 12월에 제정 선포하려 하려다 연기한 행사였다. 제주도민과 기독교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된 '제주거룩한방파제'가 헌장 내용 중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조항의 삭제를 요구하며 반대 시위를 이어가자 제주도청도 한때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했다.

하지만 제주도는 지난 9월에 공청회를 열었을 뿐 문제로 지적된 ‘성적 지향’ 관련 조항은 처음부터 건드릴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헌장 선포식에 그 내용이 그대로 들어간 걸 보면 공청회를 연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반대 측 도민들은 제주도가 선포식을 연기한 것도 절차적 시비를 덮으려는 요식 행위로 보고 있다.

사실 ‘제주 평화인권헌장’은 4·3 당시 이념적 편견과 언어·문화적 차별로 희생된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선언적 의미에 방점이 있다고 본다. 이 헌장 선포가 오 지사의 선거 공약이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재임 기간에 반드시 제정 선포하겠다는 의지가 남달랐던 것도 이해되는 점이 있다. 하지만 도민 누구도 차별로 인해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는 헌장에 도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성적 지향’을 끝까지 넣은 건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민의를 저버린 독주 행정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도민 대표단은 최근 발표된 제주도민 여론조사를 근거로 오 지사의 일방 독주를 비판했다. 해당 조사에 따르면 제주도민의 66.9%가 ‘헌장에 대해 잘 모른다’고 응답했으며, ‘반대’ 의견은 48.3%로 ‘찬성’ 18.8%를 크게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도민의 75.7%가 헌장이 “도민 몰래 조용히 추진된 것 같다”고 응답해 이 헌장이 도민도 모르는 ‘깜깜이’로 추진됐음을 드러냈다.

도민 10명 중 7명이 무슨 내용인지도,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권 헌장을 제정 선포한 건 절차적 정당성을 따지기 전에 도민을 위한 공공의 이익과 배치된다. 도민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보다 절차와 과정이 투명해야 하고 이걸 추진하는 사람들의 대표성 자격에도 하자가 없어야 한다. 일개 시민단체가 아닌 제주도가 도민을 위해 제정하는 헌장이라면서 더더욱 그렇다. 제주도가 특정 인권단체의 요구대로 움직인 결과라면 제 아무리 거창하게 선포식을 해도 도민의 가슴 깊은 곳까지 체감될 리 없다.

여론의 거센 반발 속에서 제주도청은 최근 헌장 제정 절차를 재검토할 가능성을 내비쳤으나 결국 선포식을 강행했다. 그러니 도민을 위한 인권 헌장이란 말 자체가 무색할 수밖에 없다. 제주도는 이 헌장에 담긴 정신을 기반으로 행정 전반의 인권 기준을 제도화하겠다는 입장이나 과연 도민들이 이를 실생활에 적용할지가 의문이다. 도민들이 모르는 헌장을 도민 생활 전반에 꿰맞추려 하는 데서 오는 갈등 또한 불 보듯 뻔하다.

도 행정은 도시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 주관, 특히 내 이념의 발현이 도민을 불행하게 만든다면 지자체장으로서 자격이 없다. 그럴듯한 수식어로 포장한 헌장을 재임 시의 업적으로 남기려는 과욕에서 비롯된 도민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그의 향후 정치 행로에 어떤 결과를 초라하게 될지 지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