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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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 목사(프린스턴미션, 인터넷 선교 사역자)
박현숙 목사

모세오경을 구약신학의 기초로 삼으면서도 역사비평에 의존해 모세오경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치 않는 아이히로트나, 다양한 사상들이 아히히로트의 일관된 계약중심 사상에 의해 소외된다는 맥락에서 포괄적차별금지를 주장하는 학자들이나 계시된 성경 말씀의 권위와는 거리가 먼 자들이다.

성경의 구원사는 역사의 주관자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구속적 행위의 계시적 기록이다. 그러므로 구원사는, 이념이나 사상이나 지성을 역사의 원동력으로 보는 소위 관념론적 정신사와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서, 정신사의 범주에 포함될 수가 없다.

일상적인 신앙의 진술과 신학적 개념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구원은 결코 ‘개념’이 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구원을 성서(?)의 다양한 개념중 하나로 전제하거나, 혹은 선심을 쓰듯 구원에 중요성을 부여하면서도 구원이 성경의 유일한 핵심 개념은 아닌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고, 끝내 구원사가 여러 사관중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하나의 차원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일축한다면, 그야말로 전 인류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이덴티티를 전면 부인하는 신성모독적인 발언이 될 것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이는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치 않으므로, 성경 전체를 초지일관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음성이 계시된 말씀 안에서 심령을 울리지 못하는 고로, 양식사적 비평을 통한 구전 과정이나 가설에 의존해 구원사적 의미를 인위적으로 도출코자 하는, 자유주의적 신학이 가져온 무모하고 위태한 넌센스이다.

예수님의 ‘구원’은 ‘구원’ 그 자체로서 온전하고 충족된 것이다. 그런데도 죄의 억압과 질병과 죽음을 각각 구별하면서 또 다른 ‘포괄적 구원’을 명명한다면, ‘죄’의 속성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미흡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성경이 밝히 말씀하는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란, 죄와 사망의 불가분의 관계, 즉 등가(等價)적 가치를 명시한 것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독침)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15:55-56)

또 생각해 보자. 왜 예수님께선 중풍병자를 치유하실 때 죄사함을 선포하시고 서기관들에게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2:9)”라는 질문을 하셨겠는가를…

십자가를 통한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부재할 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죄의 속성과 그 파급효과’를 심도있게 포괄적으로 깨달을 수 없기에, 단지 ‘죄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제반 인간사회의 불의한 현상이나 추상적인 우주적 사색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렇게 주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보다 세상의 정의구현을 위한 수평적인 관계를 우선순위에 둘때, 본말이 전도된 좌파적 해방신학류가 나타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2:4)고 말씀하는 동시에, “모든 피조물도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구원받길 원한다”(롬8:20-21)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괄적인 구원’이니 ‘우주적인 차원’이니 하며, 중심궤도를 벗어난 원근적인 구원관으로 성급하게 진입하기 전에, 먼저 피조세계에서 구원의 직접적인 제1의 대상은 인간이며, 인간의 타락때문에 인간에게 종속된 온 피조세계가(창1:28) 함께 탄식하며 고통받게 되었다는 사실을(롬8:22)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오죽하면 온 피조물이 신음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출현을 간절히 고대하겠는가?(롬8:18) 성도 개개인으로서의 회복과 구원이 곧 피조물과 우주질서의 회복과 구원으로 이어짐을 깨달아서 우리는 피조세계에 대한 책임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더욱 자신과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주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한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만남의 교제를 등한히 한채,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주로 ‘하나님’만을 주로 거명하면서 ‘포괄적 구원’에만 전념한다면, 우리는 부지중에 ‘포괄적인 신성관’에 문을 열게 되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유니테리언주의나 만물구원론인 유니버설리즘에 경도될지도 모른다. 이는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노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앙관이 견고하치 않은 신학은 위태한 것이고 불행한 것이고 누룩처럼 교계에 부정적 영향력을 끼치는 잠재력을 안고 있음을 늘 명심하자.

인과율과 기계적 세계관을 거부하는 것은 신학의 자유일지언정, 여기에 ‘하나님의 자유’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어딘지 어색하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주권(Absolute sovereignty)’에 의한 것이기에, 의지적 ‘용인’이나 ‘거부’란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도 선행과 공로에 따라 상벌을 정하는 것에 대해 도덕적 개념이 부재한 ‘기계적’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백성과 맺으신 “언약의 사랑”과 “무조건적인 은총”은 아이히로트의 계약신학 이전에, 성경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에 의해 계시된 것이다.

즉 ‘언약’은 ‘믿음과 순종’을 전제로 한 것이며, 믿음과 순종은 ‘구원의 언약’을 전제한 것이다. ‘무조건적인 은총’이란, 믿음과 순종없이도 거저 주어지는 구웜을 전제한 것이 아니라, 본래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성을 가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다함없는 사랑에 의해 확증된(롬5:8),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은혜’를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언약의 사랑과 무조건적인 은총”이 단순히 구원의 자동 공식처럼 거론되고 이론화 될까 사뭇 염려스럽다. 시편을 읽어보라. 다윗이 얼마나 많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과 회개의 눈물과 풍성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과 무조건적인 은총”을 체득했는가를…

오늘날 우리 모두에겐,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과 무조건적인 은총”을 우리에게 베푸시기 위해, 주님께서 치르셔야 했던 십자가의 고난에 깊이 동참하는(빌3:10)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리라.

개념적으로는, 믿음과 순종을 전제하는 구원이 무조건적인것이 아닌 것이 되겠지만, 영적으로 볼때, 믿음과 순종은 구원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반응이자 응답이다.

‘믿음과 열매맺는 회개와 기도’는 신자의 성화 과정 동안 지속됨으로써 구원의 조건과 이유를 이뤄나가는 ‘구원의 현재적 경험’에 해당되는 것이며, 이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누린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의무이다.

신자는 자신 안에서 자신의 죄를 대신해 친히 탄원하시는 성령에 의해 자신의 심령이 통촉되므로 회개와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롬8:26-27). ‘믿음과 회개’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시작에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시기 위한 첫 메시지였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그러므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누린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현실에 불과하다고 누가 표현을 한다면, 이는 내용상 앞뒤 문맥이 전혀 연결이 안되는 부조리한 문장으로 들릴 것이다. ‘수동적’이란 표현 만큼 ‘불과하다’란 표현도 ‘단지’와 같이 불안하고 근심스런 암시를 풍긴다고 느껴지는건 필자만의 기우일까…?.

일례로,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의 희생에 의해 극적인 구조로 살아난 사람이, 그 소방관에 대한 감격스런 감사로 충만하여, 자기도 같은 제2의 소방관의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자기가 진 생명의 빚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남들을 구조하는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는 어찌 ‘수동적인 반응’이니 ‘그런 현실에 불과하다’니란 표현을 감히 쓸 수가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누린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새 생명’을 얻은 기쁨과 감격을 누린다는 것이며, 이런 영적인 희열과 감사는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만 우러나는 것이어서 결코 수동적인 반응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주님의 말씀대로 심령에서 생수(성령)의 강이 흘러나오는 은혜이다(요7:38).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51:12)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8-39)

신자는 교황과 같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여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파견하신 복음의 전달자로서 ‘그리스도의 사신(Christ's ambassadors)’이다(고후5:20).

크리스찬이 믿고 인식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당연히, 창조주이신 성부 하나님과 구원의 주이신 성자 하나님과 임마누엘의 영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하나님 –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부디 한국신학계가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요16:13), 성경의 내용에 근거한 언어 사용과 성경의 본질에 근거한 신학적 통찰과 성경의 메시지에 근거한 해석학적 접근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박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