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간첩 활개 치는데 잠자는 ‘간첩죄’ 개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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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무비자로 국내에 입국한 일부 중국인들의 부적절한 행동이 보도되며 사회 문제로까지 비화된 가운데 군사시설을 염탐하다 적발되는 사례까지 빈번해져 근본적인 대책이 시급하다. 우리나라를 찾는 중국인에 대한 막연한 혐오나 적대 감정은 안 될 일이나 법 위반자, 특히 안보에 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선 철저한 수사와 처벌로 재발을 막아야 할 것이다.

얼마 전 국내 주요 군사시설과 국제공항 인근에서 전투기 사진을 무단으로 찍다 적발된 던 중국인 10대 고교생 두 명이 결국 경찰에 구속 송치됐다. 이들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3월까지 각각 3차례, 2차례에 걸쳐 한국에 입국해 수원·오산·평택·청주 등 한미 군사시설 4곳과 인천·김포·제주 등 국제공항 3곳을 돌며 전투기와 관제 시설을 촬영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중국인 10대는 망원렌즈가 장착된 DSLR 카메라와 휴대전화를 이용해 군기지 주변을 오가며 촬영을 이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이 촬영한 사진만 수천 장에 이르며, 항공기 이착륙 순간은 물론 군사시설 주변의 보안 구역까지 포함돼 있다.

경찰은 지난 3월 수원 공군기지 인근에서 전투기 이착륙 장면을 촬영하다 주민 신고로 적발된 이들을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 위반 혐의로 조사해 왔다. 그러다 휴대전화 포렌식과 동선을 분석한 결과 단순 촬영을 넘어선 정황이 드러나자 ‘일반이적죄’로 변경해 구속한 것이다.

이들은 “평소 항공기 촬영이 취미라 사진을 찍었을 뿐”이라며 ‘이적’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취미라도 군사기지 인근에서 몰래 촬영을 하는 건 불법이다. 그들이 10대 청소년이라 할지라도 남의 나라에 와 안보시설을 염탐한 행위를 눈감아 줄 나라는 없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이들 중 한 명이 자신의 부친이 중국 공안이라고 밝혔다는 보도가 있었다. 경찰은 이 부분도 사실관계를 조사중에 있다. 만약 이들의 행위에 중국 공안이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면 한중 양국 외교 관계에 중대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는 큰 문제다.

이들 10대 중국인에게 적용된 혐의는 형법상 ‘일반이적죄’ 및 ‘통신비밀보호법’, ‘전파법’ 위반 이다. 이 중 ‘일반이적죄’는 형법 제99조에 규정된 대한민국의 군사상 이익을 해하거나 적국에 군사상 이익을 공여한 범죄로 재판에 넘겨질 경우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 질 수 있는 중대 범죄다. 

지난 5월엔 주한 미군 공군기지에서 열린 에어쇼 행사장에서 대만 국적의 성인 남성 두 명이 전투기를 불법 촬영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평택경찰서는 대만 국적의 이 남성들에게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긴급 체포해 수사 중이다.

이들은 평택 오산기지에서 열린 ‘2025 오산 에어쇼’ 현장에서 미군 장비·시설을 무단 촬영한 혐의를 받고 있다. 행사 당일 미군 측이 중국 및 대만 국적자에 대해 출입을 제한했음에도 한국인들과 섞여 행사장에 들어온 후 불법 촬영을 하다 적발된 것이다. 미군이 출입을 세 차례나 제지했는데도 보안망을 뚫고 무단 침입한 만큼 이들에게도 ‘이적죄’가 적용될 수 있다.

중국인들이 국내에서 들어와 군사시설 등 핵심 국가시설을 무단으로 촬영하다 적발된 사례는 지난해 6월 이후 11건이나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국가정보원은 지난해 6월 부산 해군작전사령부에 정박한 미 항공모함을 중국인이 드론으로 촬영한 이후 최근까지 발생한 11건의 사진 촬영이 군기지, 공항·항만, 국정원 등 핵심 군사시설 및 국가 중요시설에 집중됐다고 국회에 보고했다.군사시설을 몰래 촬영한 중국인의 경우 관광객 또는 유학생 신분이었고 그중 미성년자도 있었다. 이들은 경찰 조사에서 한결같이 취미이자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둘러댔으나 적발 당시 고성능 카메라와 무전기 등을 사용한 수법과 촬영한 내용이 군사시설 탐지로 볼만한 증거들이 나온 점 등을 미뤄 볼 때 계획적인 안보 정탐 행위가 의심된다.국내에 관광 목적으로 입국한 외국인 중 특히 중국인이 우리 안보에 위협이 된 사례는 갈수록 증가 추세다. 문제는 이런 위법 행위를 처벌할 법적 근거가 미비해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하는 데 있다.

지난해 말부터 각종 안보 불안 이슈가 터지면서 국회에서 ‘간첩죄’ 개정안이 발의됐다. 간첩행위를 ‘적국이나 외국의 지령·사주·의사연락 등을 받아 국가기밀을 탐지·수집·누설·전달·중개하는 행위’로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처벌 대상을 북한뿐 아니라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대한 게 골자다. 하지만 여론이 가라앉자 이 개정안도 국회에서 계류된 채 1년 가까이 잠자고 있다.

간첩행위와 관련해 미국·중국 등 다른 나라는 자국 외 타국 전체를 ‘법 적용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다. 외국은 국가 간 친소관계와 상관없이 자국의 핵심 기술, 안보 관련 기밀 유출에 관여하면 이를 ‘간첩행위’로 규정해 강력히 처벌하는 데 우리나라는 북한만을 한정한 탓에 외국인의 간첩행위를 사실상 방조하는 거나 다름없는 거다.

간첩죄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신설된 이후 72년 동안 단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았다. 그 틈을 비집고 사실상의 간첩 행위자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한국은 ‘중국 간첩들의 놀이터’라는 비아냥까지 듣는 마당에 국회가 왜 법을 개정하지 않는 건지, 못하는 건지,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는지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말끝마다 국민의 대표기관이라는 국회는 국민이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놓든가, 당장 법 개정에 착수하든가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