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찬성에 대해 ‘환대와 포용’의 신학을 근거로 든다면 자연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절대의존적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롭고 포용적인 환대가 창조와 구원과 종말을 관통하고 완성된다는 슐라이어마허의 주장은, 모든 자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딤전2:4)을 드러내지만 한편 매우 미흡하고 피상적인 이해임을 간과할 수 없다.
왜냐면 슐라이어마허가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속의 ‘보편성’일뿐 개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인류에 대한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라는 교리적 이해에만 머무르기 때문이다.
이는 칸트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개인의 구체적 삶의 정황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인류라는 이성적인 존재 일반에 보편적 설득력을 주는 정도인 것과 유사하다(횔덜린니체고흐1부, P. 171).
이에 따라 죄성에 대한 자각이나 통찰은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십자가의 대속이 공감없는 공식처럼 이해된다면,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죄의 값’으로 십자가 위에서 감내하셔야 했던 엄중한 ‘심판’의 무게가 지니는 심각성에 대해선 자연 무감각하거나 외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변변치 못한 신앙 이해로부터 “인간의 죗값을 고통과 죽음으로 갚을 것을 요구하는 신”이라니 “그리스도의 속죄 교리가 폭력의 메커니즘”이니 하는 망발들이 신학의 탈을 쓰고 등장해 활개쳐온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류의 주장들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내리셨던 하나님의 명령과 심판이 지닌 당위성과 신적 구속력을 무효화하는 것이어서 결국 창조주의 권위에 정면 대항하는 자세인 것이다.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은 ‘공의적 사랑’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과 ‘심판’을 아우르는 ‘십자가’의 사랑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심판’이 부재한 대속적인 ‘중재자’로서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슐라이어마허의 이해는 반성경적인 것이다.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유일신 창조주의 계시인 창세기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있어 ‘심판’의 의미가 중요한 것은 ‘심판의 기준’이 하나님의 ‘계명-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에 대해 ‘폭력’이라는 증오성 프레임을 덮어 씌우는 것은, ‘계명-말씀’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실추시키기 위함인 것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창조주와 성경을 넘어서는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우주’의 본질을 회복함으로써 기독교가 진정한 ‘종교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슐라이어마허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재자’가 아니라 ‘타종교들과의 중재자’인 것이다.(횔덜린니체고흐1부, P. 162 )
자, 생각해 보자. 차별금지법을 목청높이 주창하는 것이 과연 성소수자들을 위한 것이고 그들의 회심에 더 효율적이겠는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환대는 그저 무조건적이거나 열린 공간같이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두루뭉실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회개로의 부름’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만 하는 진지한 초대인 것이다.
예수께서 소외된 자들과 즐겨 함께 하신 것은 그들이 당시 종교지도자들 보다 더 마음을 열고 순수하고 겸손한 심령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지 그들이 단지 소외된 소수자들였기 때문이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나 세리의 기도나 삭개오나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향유옥합을 깬 여인의 예에서 보듯 말이다.
진정 신자된 우리가 주님의 죄사함의 피흘리신 사랑을 깊이 묵상한다면, 주님을 피흘리시게한 우리의 ‘죄’에 대해 표현할길 없는 미안함과 뼈아픈 뉘우침을 품는다면, 너무도 아픈 주님의 애틋한 사랑이 우리의 심령에 부딪힌다면, 우리는 우리 속의 ‘죄’에 대해 점점 더 예리해지고 예민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
그러므로 동성애자들에게 포용과 환대의 하나님을 소개하려면 먼저 소개자가 심령에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죄의 무게’와 상흔을 지고, 그들을 향해 영혼의 회개를 선포하고 회심으로 이끄는 치열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창세기의 말씀을 부인하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아닌, 인간 사회의 이분법적 이성애적 젠더규범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성경과는 무관한 자이다.
죄의 대가를 치루는 것을 ‘폭력’으로, 회개와 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배제’ 내지 ‘증오’의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하나님과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이며 모욕이다.
그런 악영향이 결국 ‘바른 복음’에로의 회개와 회심으로 이어지지 못한 친젠더성향의 한 청년에 의해 ‘찰리커크의 죽음’을 가져오는 대참사를 낳았다!
현재 한국의 정치권은 인간 이성의 판타지의 산물인 패망한 마르크스 공산주의 체재에 경도된 것 처럼, 반미 정책에 기울고 우파시민들과 기독교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극우프레임으로 혐오를 조장하는 좌파의 행태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그 중심에 도올식 “역사적 예수”나 “예수운동”사상을 계승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로마제국과의 투쟁 속 민중 운동으로 속화시키고, 민족주의를 은연중 부추키어 국가적 대외적 자주권을 주창하는 진보좌파 기독교 리더들의 무리가 있음은 간과할 수 없는 영젹 참사이다.
이들이 영향받은 무신론적 마르크스 사상 또한 술라이어마허로 거슬러 올라감은 두말할 것도 없다(횔덜린니체고흐1부, P.345).
불가피한 영적 전쟁이 갈수록 심화 되어가는 국가 상황이다. 그리고 승전을 위한 핵심 키는 보수우파 기독교 내 리더들의 철저한 회개와 청결한 양심과 의롭고 순수한 영성의 회복일 것이다.
#박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