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횔덜린, 니체, 고호 1부> 중(PP. 419 - 421)
그럼 ‘선한 신’과 그 ‘선한 신’이 만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대체 어떤 관계일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란 이름이 시사하듯, 창조주인 ‘선한 신’은 이미 피조세계의 ‘선과 악’의 실체를 아시고 계셨습니다.
뵈메의 말처럼, 만물의 존재가 신의 선하신 뜻과 사랑의 계시로 창조되었다고 할 때, 창조주인 ‘신’의 선한 속성은 인간의 선함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신(God)’의 ‘선하심’은, 만물을 통치함에 있어서 ‘신(God)의 기준’에 따라 선악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만물 속에 파생된 ‘악’을 통제하고 진멸하는 것을 포함하는 ‘선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선’에 대한 ‘신(God)’의 기준은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협력하여 이루는 선’의 전체적 차원도 포괄하기에 인간의 판단 차원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신(God)’의 이 모든 ‘선’의 판단 기준은 구속사적 목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창3:22)”는 ‘신(God)’의 말씀에 대해, 인간의 선악의 앎이 ‘신(God)’과 동등한 수준인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인간의 교만에 대한 창조주 ‘신(God)’의 통탄의 심정이 녹아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은 ‘신(God)’의 큰 한숨 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신(God)’의 눈물이 보이지 않습니까? ‘신(God)’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느 만큼이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그 고통 만큼인 것입니다!
애초 선악과는 신(God)의 ‘계명/규례(말씀)’와 함께 탄생하고 존재한 것이며, 그 ‘말씀’의 메시지는 ‘순종’이며, 신(God)의 ‘말씀’은 ‘의’와 ’지혜’를 포함하는 ‘생명나무’입니다(잠3:18, 11:30). 그러므로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본래 불가분의 관계인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에덴에서 ‘선악과’에 욕심을 품지 않았다면 ‘생명나무’는 순리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졌을 겁니다. 범죄 전 에덴에서의 삶은 ‘신의 계명/규례(말씀)’에 따른 ‘선’이 존재했기에 빛 가운데 완벽한 평안과 기쁨이 있었습니다만, ‘신의 계명/규례(말씀)’을 자의적으로 저버린 인간은 ‘무법(lawless)’한 자가 되어, 불의와 어리석음이 따르는 혼돈 가운데서 어둠의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선악과(말씀)’를 저버린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생명나무’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정의하고 있는 인간의 ‘죄악’입니다!
그 결과, 근본 ‘빛’이시고 ‘의(義)’이신 ‘신(God)’ 은 어둠과 불의에 물든 인간과 더 이상 공존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요일 1:5; 고후6:14), 부득불 에덴에서 인간을 추방할 수밖에 없으셨던 겁니다.
바로 여기에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통절한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 인간의 ‘선악에 대한 앎’은, ‘선악을 온전히 판단할 수 없는(마 7:1-2) 한계’ 내에서의 ‘선악에 대한 앎’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세상은 본질적으로, 안다고 하나 모르는 것이 될 수밖에 없고, 옳다고 하나 그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God)’과 같이 되고자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실제 상황인 것인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선악’에 대해 전권을 쥔 것처럼 휘둘렀습니다.
이는 인간이 사탄의 계략대로, “하나님이 정말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창3:1)”라는 유도질문에 넘어가, 신의 금기를 보이지 않는 ‘신의 계명/규례(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열매 인 ‘물질’에 두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그들에겐 금단의 열매가 자신들의 육체에 미칠 악영향(죽음)의 여부만이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정작 그들이 경험한 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눈이 밝아진 ‘계몽’이었습니다. 즉 ‘영안(靈眼)’은 멀고 ‘육안(肉眼)’이 밝아진 것입니다!
그 순간, 아담의 마음속엔 전에 없이, ‘물질’에 대한 자신감과 정복욕이 솟아났습니다. 이후, 아담의 후예들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보다, ‘보이는 물질’에 대한 생래적인 의욕과 호기심을 가지고, 우주 만물의 구성 요소에 관심을 쏟게 되었고, 가시적인 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유도하고자 세상의 물질 탐구에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 했습니다(과학자).
또 다른 한편에선, ‘불완전한 선악’의 세상에 만연한 ‘선악’의 허점과 모순을 간파하게 된 영민하고 예리한 소수의 부류들이 있어서, 이들은 ‘선악’에 대한 구별과 판단이 부재한 ‘조화와 통합’의 진리만이 이 혼돈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여 주장했습니다(이방 종교/기독교 좌파, 세속적 정치가와 예술가).
이들로부터 ‘선악’ 을 초월한 ‘원리적 신(The principle god)’의 개념이 출현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겁니다(범신론 계열).
결과적으로, 에덴에서의 ‘선악과’가 지닌 본래적 ‘선악’의 의미가 ‘신의 계명/규례(말씀)에 따른 선악’임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이들은, ‘선악과’ 범죄자의 후예답게 만물을 ‘신(god)’으로 만들었고, 여기서 나온 ‘인간 신’들은 에덴동산의 ‘죽은 선악과’를 세상에 옮겨 와서 신상처럼 금도금을 하고 그로부터 여러 모양의 철학 사상과 종교의 신들(gods)을 만들어서 ‘우상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만든 다양한 우상들은 제각기 다른 특성과 모습을 지니고 다른 주장을 하는 것 같지만, ‘죄’ 와 ‘악’의 개념을 무력화하거나 희석시키고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데엔 이견 없이 대동단결했습니다.
결국 에덴에서의 첫 계몽을 맛보았던 인간의 흥분스런 경험은 유구한 인류역사의 조류를 타고 ‘계몽주의(인본주의)’란 이름으로 만개되어 사람들은 서슴없이 심판대에 앉은 ‘신(God)’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며 ‘신(God)’을 향해 조롱 섞인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과학 문명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갈수록 무법천지로 점점 더 흉흉해지고 미덕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쇠락되어갔습니다. 자, 이제 세상의 문제를 위한 긴요한 해결책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에덴에서 저버린 ‘선악과’에 대한 참회의 심정으로 ‘말씀’이신 주님을 전격적으로 붙드는 결행입니다.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께선 에덴에서 ‘선악과(말씀)’를 저버린 인간을 위해, 육신을 입으신 ‘말씀’ 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각인의 심령 안에 ‘말씀’이 찾아오시는 초자연적 역사는, 물리적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대에 이루어지는 신비롭고도 감격적인 현재적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는 ‘미완의 에덴’으로 끝나버린, ‘선악과’의 비극적 사건의 전모와 그 본래의 참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기는 가운데,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내려오는 완성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계21:1-2)으로의 입성을 위해 ‘선악과’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를 감사와 감격 속에 전격 붙들고 ‘말씀’으로 굳건히 무장해야만 합니다. 할렐루야!
#박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