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성 목사 설교] "나는 악한 자가 두렵지 않습니다"

목회·신학
편집부 기자
7월28일 주일예배(시편 강해 61)ㅣ시편 52:1~9
유기성 목사   ©선한목자교회

미국 크로스포인트 교회를 담임하는 피트윌슨(Pete Wilson) 목사님이『하나님인가, 세상인가(미처 몰랐던 내 안의 우상 버리기)』라는 책에서 아이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둘째 이들이 막 걷기 시작했을 무렵, 술레잡기 놀이를 좋아했는데 언제나 술래는 아빠인 목사님이 헸답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열까지 센 다음, 온 집 안을 뒤지며 아들을 찾는데, 항상 어디로 움직이는지, 어딜 뒤졌는지 큰 소리로 알리면서 찾습니다. 갑자기 찾으면 놀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소파 뒤나 책상 밑에서 숨어있는 아들을 찾게 되는데, 그 때마다 아이는 즉시 두 눈을 질끈 감곤 했답니다.

"술래가 보이지 않으면, 술래도 자기를 못 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숨었습니다. 숨으면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시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도 못 보실 줄 압니다. 그래서 은밀히 죄를 짓고, 거짓말하고, 음란한 유혹에 넘어가고, 남의 말을 하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외롭다고 울고,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아예 하나님께서 안 계신 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을 자랑하는 자리까지 갑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악을 저질러도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1-7절에 기가막힌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을까요? 실제 인물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에돔 사람 도엑'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도엑은 사무엘상 21-22장에 나오는 사람인데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서 급히 도망하다가 놉이라는 곳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아히멜렉이 진설병을 주어 먹고 떠난 적이 있었는데, 그걸 사울에게 일러바쳤습니다. 마치 아히멜렉이 다윗과 함께 사울을 대적하였던 것처럼 고소하여 사울 왕은 제사장 아히멜렉을 죽이고 그 지역의 85명의 모든 제사장들까지 다 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아무도 제사장을 죽이려하지 않자... 도엑에게 죽이라고 명했고... 도엑은 제사장 아히멜렉과 함께 85명의 제사장을 전부 죽이고 놉의 남녀와 젖먹는 어린 아이들과 짐승들까지 전부 죽였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안 계신 줄 알면 이런 사람도 되는 것입니다. 이런 악한 사람이 우리 주위에 항상 있습니다! 신성하고 깨끗해야 할 학교에도, 복지시설에도, 심지어 교회에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부인하면 이렇게 무서운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피트윌슨 목사님은 아이들 이야기를 하나 더 하셨습니다. 저녁식사할 때마다 아들 중 하나가 식사 기도를 해야 했는데, 늘 누가 기도할 지를 놓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서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기도하지 않으려다가 결국 아빠인 목사님이 끼어들어 한 녀석이 기도를 하게 되는데, 기도하는 내용을 듣고 있노라면 기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마치 너무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여 기도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던 것처럼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 녀석들은 기도하기 싫어서 다투는 모습을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대표 기도할 때 평소와 다른 목소리나 표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내용도 일상 대화 속의 내용과 많이 다릅니다. 그런 기도를 받으시는 주님이 얼마나 어색하실까요? "야, 평소처럼 해라!" 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처럼 삽니다.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악한 자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악한 계획을 오히려 자랑하며 우리를 해코지하고 죽이려할 때, 담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자녀가, 교인들이,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결단하면 '잘 했다' 하기 보다 걱정이 앞섭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왜 두렵습니까? 악한 자가 활개치며 돌아다니는 것은 보이는데 하나님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들을 보고 두려울 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믿음이 대단한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다윗도 악한 도엑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두려워했던 것은 도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다윗은 도엑을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이 고발로 충분하였습니다. 쫓아가서 복수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도엑과 같은 자가 세력을 얻어 활개치는 상황에서도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이런 믿음을 가졌던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처럼 바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눈을 떠야 합니다. 그러면 직장에서 사업하면서 학교에서 세상에서 악한 자를 만나도 그들을 탓하고 원망하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아람 왕이 도단 성을 포위하고 엘리사를 죽이려 할 때, 종이 아침에 나가 포위한 아람 군대를 보고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 잡혀 엘리사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담담히 종에게 한 마디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종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도 악한 세상에 바로 살아가기 위하여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눈이 열리면 모든 것이 달리 보이게 됩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려면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일 때부터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주 예수님을 친밀히 알고 동행하려면 24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고, 하루 하루 주 예수님과 친밀해지는 훈련이요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말씀을 들어도 믿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체험은 하지 못하였지만, 주님의 분명한 약속이기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주님이 함께 계심이 믿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애를 쓰지 않는데도 순간 순간 주님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믿으려고 애를 쓰는 것과 믿어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때부터 주님을 믿고 사는 자가 됩니다.

주님이 함께 계심이 믿어지면, 주님이 원하시는 것도 깨달아집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이 구분이 애매할 때도 있지만 점점 분명해집니다. 이 때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귀가 열린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자주 경험될 때, 주님과 친밀해졌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으시는 주님이 보이는 분 처럼 믿어지고 주님의 뜻이 깨달아지면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아브라함 처럼 요셉 처럼, 다윗 처럼 다니엘 처럼 엘리사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있는 몇몇 선교사들은 섬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지 그곳에 계속 머물러야 할지 선택해야 했습니다. 달런 데이블러 로즈( Darlene Deibler Rose) 선교사이라는 분이 당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선교사들이 기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선임 선교사인 재프리 박사가"나는 여러분이 이 문제에 대해 남편과 아내 간에도 토론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저 무릎을 꿇고'주여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아니면 그냥 머물러 있어야 할까요?'라고 물으십시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하나님만이 정확하게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이 곳에서 떠나라 하시면 여러분이 겁쟁이거나 도망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머무르라는 응답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주여, 당신이 저를 여기 있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은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금요일에 트럭이 선교사들을 데리러 왔을 때 떠나야한다고 느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프리 박사는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반대하는 경우로 혼란스럽게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인도하심이라 확신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안전하고 현명한 선택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섬에 계속 머무는 것은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들을 네델란드로 데려가기 위하여 왔던 배는 항해 3일 후 생존자 없이 난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인본주의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인본주의의 핵심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일생을 산다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만 실재라고 생각하고 보이는 것만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 사설 해병대 캠프에서 고등학생들 익사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 바다는 위험한 바다니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그 많은 학생들을 그리 깊은데 데려가면서 구명조끼 하나 지급하지 않고 바다로 들어가게 했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교관의 눈에는 바다가 안전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눈에 보이는 교관만 믿은 것입니다. 앞으로 걸어 들어가는 친구들만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사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인생의 진로를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합니다. 기준은 오직 많은 사람이 가니까, 사람이 좋다고 하니까, 내 눈에 좋아 보이니까,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그렇게 간다면 어디에 다다르겠습니까? 그런데 왜 인생은 그렇게 사십니까? · 집이 좋고 · 주위 사람들 보다 돈을 더 벌고 ·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승진하면 정말 행복합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을 만들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단호히 금하시고, 겨우 텐트같은 성막을 만들어 하나님께 제사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급하기 전에 거대한 우상들을 만든 애급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머리 속에 크고 화려한 것은 좋은 것, 위대한 것이라고 각인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발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신차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훈련하셨던 것입니다.

이 훈련이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요구하십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엄청난 기적을 보면서 출애급한 후 광야에서 3개월이 못되어 금송아지를 만드는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금송아지를 만들었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시는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내려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에 나와 너무나 불안했습니다. 무엇인가 자기들의 마음을 붙잡아줄 것이 있었으면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지켜줄 신상을 만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서 만들어 섬긴 금송아지는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그들에게 해 줄 수 없었습니다. 말도 뭇하고, 숨도 못 쉬고, 백성을 이끌지도 못하고, 기적을 베풀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우상은 함께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청난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수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온누리교회 김중원 목사, 하신주 선교사 내외분이 [그래도 괜찮아] 라는 자녀 교육에 대한 책을 쓰셨습니다. 책 속에 큰 아들이 방황할 때, 하신주 선교사님이 겪었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큰 아들이 선교사의 아들로 외국에서 자라면서 극심한 따돌림으로 한동안 너무나 방황하고 좌절하고 자포자기했었답니다. 그런 아들을 보면서 하신주 선교사는 무서웠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네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으면 네 이들을 내가 변화시켜 줄 것이다. 나의 영광을 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들은 눈 앞에서 계속 무너져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죽고 싶다고 칼을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아주 잘못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 우리 아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이 변화되지 않는 건 너의 두려움 때문이다. 넌 나를 신뢰하지 않는구나." 그제야 자신에게 있는 두려움의 실체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았고 하나님이 무능하게 느껴져서 자신이 하나님은 절대로 아들을 회복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라도 나서서 아들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탄은 계속 협박을 합니다."너의 아들은 잘못될 거야. 너의 아이는 잘못될 거야." 그 아이는 폐인이 될 거야.""너의 아이는 실패할 거야."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거짓말이 더 믿어질 때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두려워하면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미 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하나님! 맞아요 전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아들이 잘못될까 봐 두려워요. 어떻게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 때 하나님께서 사탄을 완전 무시하라고 가르쳐 주셨답니다.

"그래? 우리 아이 잘못 되게 해봐! 우리 아이 폐인 만들어 봐! 우리 아이 더 타락하게 만들어 봐! 넌 아무 것도 못해. 하나님이 우리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아. 하나님은 우리 아이를 회복시키실 거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두려움의 영은 떠나갈지어다." 이렇게 하면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잘못되게 해 봐"라고 말하면 사탄이 그 즉시로 해코지할 것 같아서 무서웠지만 마음의 결단을 하고 선포하기 시작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려움이 깨지는 것만큼 아들이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30% 깨지면 아들이 며칠 만에 30% 만큼 회복되었습니다. 50%, 70% 90% 두려움이 거의 깨졌을 때 이젠 아들도 사탄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담대해졌습니다. 두려움이 깨지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니까 위로부터 지혜가 내려오기 시작했습나다. 언제 위로해 주어야하는지, 언제 야단쳐야 하는지,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깨달아졌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때서야 아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속회 방학을 합니다. 방학을 왜 합니까? 속회원들끼리 모이기가 어려워서 방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친밀함을 경험하기에는 너무나 좋은 때가 방학 때입니다.

주 예수님은 이미 우리 마음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함도 한 순간. 특별한 체험으로 빨리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런 친밀함은 없습니다. 어떤 두 사람 사이에 친밀함이 형성되려면 꾸준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에 힘쓰며, 24시간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생활을 하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모든 순간이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기회요 훈련임을 명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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