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어둠 이기고 빛으로 오신 ‘평화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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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앞두고 교회마다 다양한 축하행사 준비에 한창이다. 거리에서 울리는 구세군 종소리가 지난 3년여 코로나19 방역으로 위축됐던 성탄절 분위기가 다시 살아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성탄절은 인류의 소망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날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샬롬, 평화의 은총이 온 누리에 임하는 특별한 절기다. 이런 때에 교회들이 자체 축하행사에 열과 성을 다하는 건 오랜 관습에 속한다. 하지만 그것이 교회 울안에서 자기 식구끼리 먹고 즐기는 행사로 그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의 은총을 다 담을 수 없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이번 성탄절에 교회들이 어떤 행사 준비로 바쁜가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교회학교 성탄 공연/문학의 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 목회자 494명을 대상으로 지난 4일부터 17일까지 설문 조사한 결과 ‘교회학교 성탄 공연/문학의 밤’이 22%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불우 이웃 돕기(물품 나눔, 헌혈 참여 등)’ 19%, ‘성탄 관련 문화 공연(연극, 연주, 뮤지컬 등)’ 11%, ‘특별 새벽기도’ 5% 등의 순이었다.

과거 성탄절 전날 밤부터 새벽까지 예수 탄생의 소식을 전하는 의미로 많이 행하던 ‘새벽송’은 3%에 불과했다. 소음 규제 등에 따른 민원 발생이 요인이지만 성탄절의 전통이 점점 퇴색해 간다는 데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기타 응답으로는 ‘특별한 행사가 없다’가 가장 많았다.

한국교회가 갈수록 사회와 괴리된다는 지적이 많다. 과거엔 교회가 사회를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교회가 사회에 부담이 되고 있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다. 교회가 양적으로 커지면서 사회봉사에도 힘을 많이 쏟고 있지만, 과거 믿음의 선각자들이 보여준 희생과 헌신만큼 사회 곳곳에 빛을 발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한국교회는 성장 분기점을 지나 시간이 갈수록 마이너스 성장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 그 원인 중에 저출산으로 교회학교가 문을 닫아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교회의 책임으로 다 돌릴 순 없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 가나안 교인이 되는 현실은 사회 문제라기보다는 교회 자체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성탄 분위기에 들떠있는 지금 지구촌 한쪽에선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한창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매일 매일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한국교회가 남의 일인 양 외면해선 안 된다.

북한 김정은 정권은 핵무기 무장을 법제화하고 ICBM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며 노골적으로 안보 위협을 가하고 있다. 북한 정권이 전쟁 준비와 도발에 군비를 쏟아부을수록 북한 인민의 삶은 낭떠러지 끝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배가 고파서, 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을 억류했다가 일시에 북한으로 강제 북송했다. 유엔 난민조약에 가입하고도 이런 비인도적인 만행을 식은 죽 먹듯 하는 중국을 향한 국제사회와 우리 정부의 호소는 소귀에 경 읽기다.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탈북민들이 겪을 고초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럴 때 꼭 필요한 게 중보기도다. 주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고 하셨다. 압제자로부터 자유와 평화를 구속당한 이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신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굳이 인간 세상으로 오실 필요가 없는 분이다.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실 원대한 계획이 없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을 낮추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세상에 오시더라도 굳이 가축이 거하는 냄새나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실 필요가 있었을까. 기왕 태어나실 바에 왕이나 귀족, 수만 대군을 호령하는 장수의 모습으로 등장하셨으면 많은 사람이 열광하고 환호했을 텐데.

바로 그 안에 복음의 진수가 숨겨져 있다. 가난하고 병든 자, 사회적 약자와의 동행이다.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다”(눅2:17)고 하셨다. 즉 예수님 자신이 죄인, 약자의 친구이심을 강조하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누굴 위해 기도에 매진하고 있나. 그리고 매일 매일 약자와 동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부유하고 강한 자들과 사귀며 어울리기를 즐겨 하는가. 주님이 세상에 오심을 축하하는 성탄절의 의미는 거창한 행사에 있지 않다. 작은 자들을 돌봄이 훨씬 주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길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그 어둠을 이기는 힘은 강함이 아니라 약한 데서 나온다. 칠흑같는 어둠을 이기고 빛으로 오신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셔 들이는 2023년 성탄절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