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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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이 본 섹슈얼리티(14)
민성길 명예교수

고대 문명에서도 이미 카마수트라 같은 성의학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문명에서는 남자들의 성은 개방적이었고, 동성애(소년애)도 허용적이었으나, 여성들의 성은 억압되었다. 의학에서는 이름 모를 성병에 대한 간단한 기술들이 있었다. 당시 널리 알려진 성 관련 장애는 히스테리였다. 히포크라테스(약 460BC–약 370BC)는 히스테리를 여성 고유의 병으로 기술하였으며, 그 원인으로 자궁(hystera)이 배속을 돌아다니며 다른 장기들과 부딪치면서 여러 증상들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한의학에도 비슷한 장조(臟躁)라는 병명이 있다)

중세 1,000여년 동안에는 갈렌(Claudius Galenus 129-199?)의 성 이론이 지배적이었다. 갈렌도 히스테리아를 여성의 병으로 보았다. 그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을 확고히 하였는데, 즉 남자와 여자의 신체는 근본적으로는 같으나(one sex model), 남자에게 “생명의 열(vital heat)”이 많기 때문에, 완전성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하였다. 남자는 열이 많아 그 성기는 바깥으로 밀려나 있고, 여자는 몸이 더 차가워서 성기를 안에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생식현상은 성교 때 열이 올라 혈액이 씨로 변환하고 오르가즘 때 사정되고 합쳐져서 임신이 된다고 하였다.

중세에는 성은 결혼과 생식을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성적 쾌락은 죄스럽게 여겨 억제하였다. 중세 1,000여년 동안 빈곤, 질병, 더러움, 역겨운 냄새 등도 성욕 억제에 한몫했다고 한다. 중세에도 히스테리는 문제였다. 히스테리는 사탄에 사로잡힌 상태로 인식되어 히스테리를 나타내는 여성은 마녀로 박해받았다.

15세기에 매독이 (아마도 신세계로부터) 출현하였는데, 그 증상이 끔찍하였다. 매독은 페스트와 나병과 더불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매독은 인간의 성적 문란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되었다.

18세기, 계몽주의적 엘리트 의사들은 당시 위대한 조국 프랑스가 성적 문란, 사치, 남성들의 여성화(effeminate) 등등으로 퇴화(dégénération)되고 있고, 그래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고 우려하였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 동안 전문 의학적 지식과 방법을 국가 개혁에 사용하는 도덕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핵심은 건강한 남녀 관계, 건전한 가정 그리고 성위생 등이었다. 이 운동에 동참한 정신과의사로는 정신장애에 대해 도덕치료를 제안한 피넬(Philippe Pinel 1745–1826)이 있다.

근대에서도 사회는 남성중심주의적이었고, 여자들은 섹스에 대한 열정이 없다고 보았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가 가장 전형적인 여성 억압 문화를 나타낸 시대였다. 부인들은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순수하고 안전하게 비치되어 있는 가구 같은 존재였다. 그리하여 “히스테리”가 일상적으로는 의사들이 치료해야 할 전형적인 여성의 질병이 되었다. 많은 일선의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의 히스테리 원인론에 따라 자궁 즉 성기 마사지로 치료하였다. 성기 마사지로 여성이 홍조를 띄면 히스테리가 치료된다고 보았다. (이 방법은 계속 발전하여 20세기에 vibrator 개발로 이어졌다)

18세기에는 메스메리즘이 등장하여, 동물적 자기력(magnetism)으로 병을 치료한다고 하였는데, (나중 사기로 판명됨) 이는 19세기에 최면술로 발전하였다. 파리의 저명한 의사 샤르코(Jean-Martin Charcot 1825-1893))가 히스테리를 최면술로 치료하였다. 프로이트는 그에게 최면술을 배웠다.

19세기 후반에, 정신과의사들 중에 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나중에 성학(sexology)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 선구자는 독일의 정신과의사 크라프트-에빙(Richard von Krafft-Ebing 1840-1902)으로, 그의 1886년 저서 『성병리학』(Psychopathia Sexualis)으로 인해 비로소 성학이 하나의 확립된 과학이 되었다. 동시대의 히르슈펠트(Magnus Hirschfeld 1868–1935), 엘리스(Havelock Ellis 1859–1939) 등 의사들은 성도착증들과 동성애, 자위행동 등을 연구하며, 동성애를 옹호하였다. 특히 히르슈펠트는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1919년 베를린에 성연구소를 세우고 동성애를 옹호하고 원시적인 성전환수술을 시도하였다. (그 중의 한명이 유명한 “대니시 걸”인데, 그는 수술후 감염으로 죽었다) 그는 1921년 《성 개혁을 위한 세계연맹》(The World League for Sexual Reform)이라는 국제조직을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33년 정권을 잡은 나치스가 그의 연구소와 세계연맹을 중단시켰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히스테리치료에서 최면술을 정신분석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히스테리연구를 통해 무의식의 성 억압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후 정신분석가들이 성 기능장애와 동성애 등을 일종의 “노이로제”로 보고 정신분석으로 치료하였다. 이들이 초기 성학 연구를 주도하였다.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는 프로이트의 제자이면서 막시스트로서 1920년대부터 “성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성혁명을 주장하였다. (프로이트는 결코 성해방을 제안하지 않았다. 대신 성억압에 의한 ”노이로제“를 이성적 통찰과 건강한 방어를 통해 치유하는 것에 대해 말하였다) 프로이트의 제자 호나이(Karen Horney 1885–1952)가 프로이트의 남근선망이론과 오르가즘의 질 근원이론을 비판하며 음핵 근원이론을 제시함으로 성학과 페미니즘에서 중요 논쟁점이 되게 만들었다.

벤자민(Harry Benjamin 1885–1986)은 내과의사로 트랜스젠더의 호르몬요법을 옹호하였다. 1948년 곤충학자 킨제이(Alfred Kinsey 1894~1956)는 미국인들의 성행동의 실태를 조사함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90년대에 Judith Reisman에 의해 킨제이의 연구의 상당 부분이 오류로 밝혀졌다) 1950년대 심리학자 머니(John Money 1921–2006)가 젠더이론을 제시하였다. (그의 이론의 근거가 되었던 실험적 연구는 30여년 후 실패로 판명되었다) 미국에 성혁명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 산부인과의사 마스터즈(William Masters 1915–2001)와 심리학자 존슨(Virginia Johnson)의 “인간 성반응”(himan sexual response)이라는 성생리학연구와 성적 대리자(surrogate)를 통한 성치료를 발표함으로 “오르가즘”에 대한 문화적 신봉에 부응하였다. 정신분석가 카플란(Helen S. Kaplan 1929–1995)은 정신분석이론과 행동기법을 통합한 성치료를 제시하였다.

1960-70년대에 동성애자들이 “성혁명”-프리섹스운동-에 편승하여 인권운동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동성애 정상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압력의 결과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가 동성애가 정상이라 발표하였다. 1980년대에 에이즈의 등장으로 성혁명적 풍조와 동성애 옹호활동은 주춤해 졌다. 이를 계기로 성혁명가들과 동성애 옹호자들에 의해 성병예방을 위한 (순결교육이 아닌) “포괄적 성교육”이 제시되었다.

이후 성학에 행동유전학, 동물행동, 진화론, 인류학, 범죄학, 내분비학, 뇌과학(뇌영상연구) 등이 포함됨으로 연구 범위가 확대되어 가고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1990년대 동성애 유전자 발견과 뇌구조 차이 발견이라는 센세이셔널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추가연구로 재확인되지 않았다. 2019년 전장유전체연관연구에서 동성애 유전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처럼 성학은 히스테리와 LGBT와 성도착증 연구로 시작되었지만, 현재는 전반적 “인간섹슈얼리티”에 대한 연구로서, 모든 형태의 성적 쾌락의 증진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당연히 전통 성윤리나 기독교 성윤리와 충돌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학연구는 자칫 사회 통념과 윤리와 법에 부딪치는 수가 많다.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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