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종전선언’ 마지막 승부수가 위험해 보이는 이유

오피니언·칼럼
사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제76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됐음을 함께 선언하길 제안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유엔 총회에 이어 이번에 또다시 '종전선언' 카드를 꺼내든 것은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를 국제사회의 다자협력을 통해 어떻게든 이어가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취임 첫 해부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강조하며 ‘종전선언’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피력해 왔다. 이번 유엔 총회 기조연설도 그 연장선상에 있어 보인다.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는 그렇다 쳐도 상대인 북한의 최근 태도로 볼 때 기대와 바람만큼 성과를 거두기란 사실상 힘들어 보인다.

현 정부 들어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두 차례의 북미정상회담이 있었다. 그 자체로만 보면 역대 정부를 뛰어넘는 역사적 성과다. 하지만 결과는 역대 정부와 별 다를 바 없었다. 2018년 9월 19일 문 대통령은 평양 능라도 경기장을 가득 메운 15만 북한 군중 앞에서 남과 북이 함께 평화를 만들어가자며 벅찬 감격의 연설로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만 3년 뒤의 현실은 되돌이표다.

더구나 남북 대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북한 비핵화 문제는 2019년 2월 하노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오히려 뒷걸음치고 말았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오던 남북관계도 지난해 6월 북한이 대북전단을 문제 삼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면서 차갑게 식어버렸다.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는 올 7월 남북통신선이 복원되면서 잠시 회복되는 듯 했다. 그러나 북한이 한미연합훈련을 비난하며 남북 통신연락선을 다시 차단한 데 이어 잇단 미사일 발사와 영변 핵시설 재가동 조짐으로 긴장 수위는 한층 높아만 가고 있다. 상대방을 겨냥한 적대행위·군사연습을 중단하기로 한 9·19 군사합의 3주년을 맞았지만 남북 관계는 경색 수준을 넘어 파국으로 향하는 분위기다.

북한은 한동안 잠잠했던 미사일 시위를 다시 시작했다. 지난 13일 장거리 순항미사일 시험 발사해 성공했다고 발표한 데 이어 15일 오후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 2발을 발사한 것이다. 올 들어서만 벌써 다섯 번째인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바이든 행정부를 향한 압박성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보이나 단거리든 장거리든 탄도미사일 발사는 명백한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다.

문제는 북한의 이런 위험한 도박이 미사일 도발로만 그치지 않는데 있다. 북한은 최근 영변 핵시설에서 원자로를 재가동하고 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20일 열린 IAEA 제65차 총회에서 “북한에서 플루토늄 분리와 우라늄 농축, 다른 활동들에 대한 작업이 전속력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의 핵시설 가동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김정은은 지난 1월 노동당 대회에서 “핵 무력 건설을 중단 없이 추진할 것”이라 공언하며 ‘핵’을 36차례나 강조했다. “탄두 위력이 세계를 압도하는 신형 미사일과 중장거리 순항미사일 개발”도 공언했다. 그러니까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영변 핵시설 가동 움직임은 김정은이 공언한 핵 무력 건설이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북한의 잇단 미사일 발사와 영변 핵시설 원자로 재가동 움직임에 대해 유엔 등 국제사회는 일제히 우려를 나타내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도 북한의 위험한 도박이 어떤 사태를 불러 올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국민의 생명과 안보가 걸린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핵시설 재가동에 대해 청와대와 정부, 여당만은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로 일관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 총회 연설을 위해 출국한 문 대통령의 속내가 얼마나 복잡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뚜껑이 열리자 또 다시 ‘종전선언’이다. 아무리 3자 및 4자간 다자협력을 통해 멈춰버린 한반도 평화 시계를 다시 돌려보려는 의지를 담았다 하더라도 냉엄한 국제 정치의 벽을 뛰어넘기란 역부족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자칫 8개월여 임기를 남긴 대통령의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게 되지나 않을까 안타깝기까지 하다.

문 대통령으로선 이런 모든 불리한 조건을 뛰어넘어 극적인 반전을 이루고 싶었을 것이다. 올해가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한 지 30년이 되는 해인만큼 국제사회가 문 대통령의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 주목하고 있는 점도 호기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임기 중 마지막으로 참석한 유엔총회에서 자신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마침표를 찍고 싶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의 의지와 바람대로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주변국들이 함께 협력해 전쟁이 끝나고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다. 문 대통령은 그 업적 하나만으로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한반도 평화를 이룬 위대한 지도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무엇보다 북미 간 비핵화 방법론에 대한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한 미국의 종전선언 동참을 기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사사건건 미국과 대립하고 있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백번 양보해서 미국과 중국을 어떻게든 설득해 다자간 협상 테이블에 앉힌다 치자. 북한은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의 전향적인 변화, 즉 비핵화 의지와 실천 없이 종전선언을 백번 한들 달라질게 없다. 북한이 전략적으로 호응해 온다 해도 그들의 속셈이 한반도 내에서 외국군의 철수, 즉 주한미군 철수에 있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안다.

‘평화’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국민과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 말 뿐인 ‘평화’가 어떤 파탄을 불러왔는지는 일제 36년과 6.25 전쟁이 그 증거다. 상대가 북한이란 점을 냉정하고 인식하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어떤 ‘마지막 승부수’도 위험한 도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