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와 사역자가 분별해야 할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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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이단 페미니즘

이재욱 목사

교회 성도, 부흥, 다음으로 목회자와 사역자들의 가장 큰 관심주제는 ‘이단’에 관한 것이다. 이단 중에서도 특히 ‘신종 이단’하면 상당한 이목이 집중된다. 사역자들은 그 이단이 현재 자신의 성도들에게 어떠한 위협이 되지 않을까 면밀히 살펴본다. 코로나가 처음 확산 될 때 교회들 마다 내걸었던 포스터 및 배너들은 ‘신천지 침투’에 대한 경고문들이었다. 신천지도 문제인데 그들이 안고 들어올 코로나가 교회를 더욱 어렵게 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쯤엔 신천지가 의도성을 가지고 기성교회에 침투하여 코로나를 퍼뜨릴 것이란 섬뜩한 말도 돌았다. ‘신천지침투+코로나바이러스’의 패키지를 떠안을까 목회자들과 사역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신천지와 비슷한 모양새를 갖춘 이단이 또 있다. 바로 ‘페미니즘’이다. 목회자들은 이단사설로서의 ‘페미니즘’을 잘 모르는 듯하다.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큰 관심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사회 가운데 자리 잡은 ‘페미니즘’은 어느새 한국교회까지 들어와 다음세대 가운데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강력한 이단사설이 교회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알아야 한다. 다음세대들은 아직 일부지만 ‘복음 대신 페미니즘’을 외치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은 말로써 “복음 대신 페미니즘”이라고 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과 이야기 해보면 이들이 믿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복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페미니즘’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페미니즘 수업의 실체

필자가 서울 흑석동에 소재한 대학원에서 수업을 듣던 중 페미니즘을 마주하였다. 한 번은 학과를 넘어 문화연구학과 수업을 듣게 되었다. ‘페미니즘’을 내걸었던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는데, 여성학 전공 교수로부터 직접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페미니즘’의 실체를 알기 위해 이보다 더 최적화 될 수 있을까?!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시작한 첫 수업은 충격적이었다. 교수는 막시즘을 찬양하며 ‘마르크스주의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이론’이라는 취지로 발언들을 이어갔다. 세상이 이렇게 악해 진 것과 남녀의 차별이 존재하는 이유는 모두 사회 구조가 잘못된 탓이며,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고, 남녀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이에 필자는 신학적인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으나(목사신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완벽한 구조가 주어진다고 해도 필연적으로 다시 악함에 빠질 것이라고 짧게 발언했다. 그러자 수업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교수는 필자의 발언이 ‘무지한 발언이라는 책망’과 함께 인간의 전적타락도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극복될 수 있는 양 가르쳤다. 그렇게 마르크스주의가 여성화 된 것을 ‘페미니즘’이라 보면 이해가 쉽다. 한 학기 동안 여러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며 공부했는데, 페미니즘 번역서 곳곳에는 이 세상 구조를 뒤엎기 위한 전략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목사의 눈을 집중 시키는 문장은 ‘가정, 교회, 국가를 해체’ 시키고 이 사회를 새롭게 건설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이 소위 주장하는 ‘가부장제’의 원흉은 바로 교회 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하나님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고 있었다. 대학원까지 공부하면서 페미니스트를 자처한다면, 거의 막시스트라고 볼 수 있다.

신천지와 페미니즘 접근방식

페미니즘 관련 도서들 서론에는 이런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페미니즘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이러한 전제는 페미니즘의 기본 중 기본이다. 이 안경을 통해 바라본 세상만이 진짜세상이라는 것이다. 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성경의 안경을 착용하고 있다.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인도하심을 발견한다. 그런데 페미니즘이 교묘히 교회 다음세대들에게 접근할 때는 적극적으로 하는 작업은 우리들이 착용하고 있던 ‘말씀의 안경’을 벗겨버리는 것이다. 그런 후 그리스도인들이 끼고 있는 안경을 살며시 자신의 것(페미니즘)으로 바꿔놓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은 페미니즘에 넘어가는 것일까? 신천지와 같은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필자는 페미니즘을 교회에 설명할 때 ‘신천지’를 예로 든다. 신천지도 처음부터 ‘이만희가 이기는 자, 이만희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그가 계시록에 나오는 증인, 본래 과천이 에덴동산’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페미니즘도 처음엔 여성의 인권과 복지, 약자와 차별, 남녀평등, 피해 받는 여성 구제 등 좋은 말로 접근한다. 그러다 결국 본색을 드러낸다고 본다. 신천지의 결론이 이만희로 끝나는 것처럼, 페미니즘의 결론도 기존 ‘가정, 교회, 국가 해체’로 끝난다. 그 수업시간엔 자신을 교회 다니는 청년이라 밝힌 여성도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교회 관련 발언들은 성경 기반이 아닌 페미니즘 기반이었다. 이미 성경적 시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 및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반면 교회를 공격하며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수업 내용에 대해선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 안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청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게 된 계기였다. 이와 같이 페미니즘은 교회 다음세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적 세계관을 페미니즘 세계관으로 대체 시키고 있는 중이다.

페미니즘의 종교성

페미니즘은 종교성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페미니즘을 하나의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받아들인 젊은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의 입에선 ‘페미니즘이 얼마나 세상을 구하고 있는데..’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이유이다. 페미니스트로의 거듭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수업이 잘 보여주었다. 우선 페미니즘 묵상을 통해 진행된다. 과제로 내준 페미니즘 관련 원서나 번역서를 읽고, 그들 나름대로의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과 함께 발표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주요 내용을 발표하며, 자신의 삶이 얼마나 페미니즘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반성한다. 페미니즘을 묵상하고 반성하는 것은 수업의 전부를 차지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얼마나 우리가 차별주의자인가, 얼마나 평등하지 못한가, 그간 삶에서 페미니즘을 왜 실천하지 못했는가’ 를 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수업 중 필자를 제외하고 남자 청년 한 명이 수업을 같이 들었는데, 무조건 남자의 잘못이고 죄송하다는 말의 반복뿐이었다. 페미니즘의 불순종 앞에 ‘참회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이어 한 주간 삶으로 돌아가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며, 삶에 적용하고, 삶에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를 관찰하기로 하며 마친다. 다음 수업시간에는 또 다른 독서 주제와 지난 주 이론을 어떻게 삶에서 실천했는지, 실천에 실패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분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함께 나눈다. 너무 친숙하게 느껴졌다. 경건한 시간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지난 날 교회 공동체에서 했던 성경말씀 묵상과 성령의 조명하심, 회개, 구체적 적용을 통한 순종!! 이와 같은 패턴이 대학원 수업시간에 반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신천지도 그렇고 페미니즘도 어느 정도 넘어오기 전까진 자신의 발톱은 감추고 있으나 ‘넘어왔다’ 싶으면 ‘사실 우리는 신천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의 실체’를 드러낸다.

교회 안 페미복음

필자가 8개월 정도 페미니즘에 깊숙이 빠진 고등학생과 청년들의 질문에 답해주며 성경적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 애를 썼다. 성경구절에 대한 오해와 교회의 직분과 질서에 대한 오해, 때론 설교자가 잘못 해석한 성경구절의 오해들을 바로 잡아주며 상담을 했다. 그렇게 무료로 봉사한 것은 안타까운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상담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8개월쯤 지나니 깨닫게 되었다. 질문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이 제자리를 맴돈다.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질문 유형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성경구절에 대한 질문도 비슷했다. 오해 소지가 있는 성경구절을 바로 해석하고 알려주어도 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뿐, 자신들이 오해했으며 성경해석상 문제가 자신들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 이건 문제가 아닌가요?”, “이건 문제 없다고 할 수 있나요?” 이런 식이었다.

이미 페미복음에 고착화 된 상황이라 전혀 복음을 받아드리지 못하였다. 이들을 건져 올 수 있는 것은 순수한 복음이라 생각하여 이들에게 복음과 그 능력에 대해서 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회 안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도 죄성을 극복할 능력도 없는 것처럼 치부 되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페미니즘이 시행될 때 교회가 개혁되며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된다”고 믿는다. 이들은 그 사실을 부인할지 모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한들 결론은 페미니즘의 실현을 통한 개혁으로 향했다. 교회의 개혁과 부흥은 세상이론으로 실현 불가능하다.

더구나 세상에서 조차 실패한 이론으로 교회를 개혁하고 새롭게 하겠다니 상황이 이정도로 심각하다. 이렇게 다음세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페미복음으로 바뀌어갔다. 이렇게 상황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전까지 보통은 침묵하고 있다. 신천지와 무엇이 다른가? 약간의 내용의 차이가 있을 뿐, 정통교회를 바벨론교회라 부르며 해체를 주장하는 이들과 페미복음 실현 위해 현 교회 질서를 부정하며, 교회를 세상 이론으로 해체 개혁하려는 이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최근 한국사회 가운데 ‘페미니즘’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교육을 통해 전 연령을 공략하고 있으며 특별히 주 공략 대상인 다음세대가 처참히 무너지고 있다. 페미니즘은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대신 타락한 사람의 본성에 근거한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신천지가 교회 안에서 세력을 얻기 위해 기다리며 점차 퍼져나가는 것처럼 페미니즘도 교회 안에서 누룩과 같이 퍼져나가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이재욱 목사(참사랑교회 담임, 카도쉬아카데미 공동대표)

* 이 글은 ‘한국기독문화연구소’가 발행하는 격월간지 2021년 5·6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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