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외식 신앙과 중심 신앙

오피니언·칼럼
설교
홍석균 목사

본문 : 누가복음 11장 37~54절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은 항상 약자의 편에 서셨다. 왕으로 오셨기에 얼마든지 권력과 결탁하실 수 있었지만, 그가 거하는 곳은 낮고 천한 자리였다. 고아와 과부, 심지어 죄인과 세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을 끌어안으셨다. 반면 불의와 맞설 때는 단호하셨다.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노를 발하셨고(마 12장),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셨다(마 21장).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율법교사에게 “화 있을진저~” 다시 말해 “저주받을 자들아~”라며 분노하셨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인해 인자하신 예수님이 진노를 발하신 것인가?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은 답하고 있다.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식사 초대의 동기는 앞부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본문의 흐름을 살펴보면 예수를 책잡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지 않으시고 직면하셨다. 그 직면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식사 전 손을 씻지 않는 것으로 극대화하셨다. 유대인들에게 손 씻는 행위는 단순히 예의나 위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부정함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결례의식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예수님은 오히려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을 놀랍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에게 진노하고 있다. 여기에는 예수님도 의도가 숨겨 있다. 그 의도는 39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이 겉은 깨끗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즉 그들의 외식신앙은 화려했지만 중심신앙은 부패한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부패성을 구체적으로 고발하신다. 그 예로,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 양념의 십일조를 지적하셨다. 원래 십일조의 범위는 기름, 포도주, 곡식(민18:12)에 한정되었다. 그리고 십일조는 첫째는 하나님께 먼저 드린 바 되고, 그다음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 과부 순으로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바리새인들은 십일조의 본질을 상실한 채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은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을 저버렸다고(42절)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또 다른 바리새인의 부패성을 고발한다. 바로 그들의 교만과 명예욕이었다.(43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 하는도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본질을 상실하고 교만과 자기과시에 있다면 반드시 패망하게 된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이다. 한 교회가 성전 건축을 했다. 성도들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했고 이제 완공이 되어 봉헌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강대상을 무엇으로 할까 회의를 했다. 어느 한 장로님이 강대상을 현대 시대에 맞게 크리스탈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다른 장로님이 강대상은 뭐니 뭐니해도 나무 강대상이 제격이라고 하였다. 어느새 이러한 강대상의 재료를 두고 성도들의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급기야 교회가 둘로 쪼개지고 말았다.

주님은 오늘날 본질을 상실하고 교회를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세대를 향하여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화 있을진저, 회칠한 무덤이여’ 겉으로는 화려하나, 속으로는 음흉한 마음, 겉으로는 친절하나 속으로는 비판하는 마음, 겉으로는 사랑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정죄를 일삼는 것이 바로 외식신앙인 것이다. 외식하는 신앙의 결과는 무엇인가?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53절). 분열과 분쟁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의 축을 외식신앙에서 중심신앙으로 옮겨 가시길 축복한다. 겉은 투박하고 부족하게 보일지 몰라도 내 신앙의 중심만은 주님을 향한 신실함으로 나타나길 기도한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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