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정치학2. 보수와 진보

오피니언·칼럼
기고
류현모 교수

프랑스 대혁명 때 구체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개혁하자는 지롱드파는 온건한 부르주아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대혁명의 국민회의에서 오른쪽 편에 앉았기 때문에 우파라 불렸다. 반대로 급진적 개혁을 주장한 자코뱅파는 노동자나 서민을 대변하였고 국민회의에서 왼쪽 편에 앉았기 때문에 좌파라고 불렸다.

보수주의자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이라는 글에서 프랑스 혁명의 실패 원인이 너무나도 급진적인 개혁 때문임을 지적하였다. 버크는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을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비교하며 “영국의 혁명과 프랑스의 혁명은 거의 모든 점에서, 그리고 근본적 정신에서 서로 정반대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사회질서를 지키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버크 주장의 핵심은 사회질서이다. 사회변화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견딜 수 없는 급진적이고 파괴적인 변화를 반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수는 자유의 가치를 진보는 평등의 가치를 더 중요시 한다고 알려져 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자유와 평등의 측면에서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의 명예혁명을 비교하였다. 영국은 1640년 청교도 혁명 이후 자유를 목표로 40년 이상에 걸쳐 점진적으로 민주혁명을 달성하려 노력했다. 반면, 프랑스는 1789의 대혁명을 기점으로 평등을 목표로 즉각적인 민주혁명을 이루려했다.

모든 인간은 자유를 본능적으로 갈구하기에 그것을 지키려하고, 그것을 빼앗길 때에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토크빌의 프랑스 대혁명 분석에 따르면 평등에 대한 갈구는 그 강도가 훨씬 높고, 열렬하다. 인간은 자유 속에서 평등을 갈구하다가 찾지 못하면, 자유를 포기하고 예속 속에서라도 평등을 찾게 된다. 이들은 가난을 참고, 속박을 참고, 무지함을 참지만 불평등은 참지 못한다. 이것은 CS 루이스가 지적한 인간의 가장 큰 죄인 교만과도 맞닿는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라는 이 시대의 우스갯말도 불평등을 견디지 못하는 원죄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본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칼빈주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칼빈주의는 프랑스의 위그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네덜란드로 쫓기고, 또 영국으로 쫓기고, 다시 종교의 자유를 위해 미국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착한 네덜란드, 영국, 미국에서 기존 종교와 정치체제에 저항하여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얻어내는 혁명을 이루었다. 네덜란드에서 스페인과 가톨릭에 대항하여 네덜란드의 독립과 종교의 자유를 얻어낸다.

토크빌이 영국의 명예혁명을 분석한 것처럼 영국의 청교도들은 혁명의 주류 세력은 아니었지만 오랜 기간 동안 끊임없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얻지 못하자, 모든 것을 버리고 신대륙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결국 미국의 경제와 종교의 자유에 간섭하는 영국의 식민 지배에 대항하여 미국독립혁명을 완성한다. 그 결과 이들은 창조주께서 주신 양도불가능한 인권의 수호와 하나님의 의도에 맞는 법질서의 준수를 미국독립선언문에 천명한다.

이들 세 나라 혁명의 공통점은 종교의 자유를 향한 끝없는 저항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른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인 알렉산더 헤밀튼은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의미를 부여하는 토론에서 “뉴잉글랜드 청교도 부인과 프랑스 소설에 나오는 부정한 아내가 다르듯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했다. 전자는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한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평등을 주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를 대비할 때,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로 설명한다. 보수는 자유 시장경제와 그에 대한 개입을 피하는 작은 정부를, 진보는 시장의 불합리한 부분에 개입하여 문제의 해결을 추구하는 큰 정부를 선호한다. 보수는 성장을 통한 파이 확대에 주안점을 두는 반면, 진보는 공평한 분배를 우선시 한다. 이런 이유로 보수는 개인의 자유와 이익에 가치를 두지만 진보는 집단 내에서의 평등과 공리에 가치를 둔다. 변화에 대해 보수는 점진적인 것을 진보는 급진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대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라 말한다. 진리란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변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 참이며, 우리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상은 과학의 발달로 급속히 변해가고 있고, 새로운 정보의 양은 기하급수적 증가를 하고 있어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변화하는 세상 속 대학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교수들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옳지만 낡은 주장보다는 진위가 불명확 하더라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젊은이들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스스로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기득권에 대해 반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대학은 진보적이고 좌경화되기 쉽다. 이런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보다 불변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꼭 지켜야할 가치를 지켜내려는 것을 보수라 한다. 프로테스탄트의 혁명이 정착한 국가에서 보수가 지키려는 가치는 성경의 절대적인 기준이다. 반면 진보는 보수가 주장하는 것의 가치가 이제 사라졌으니 빨리 기준을 바꾸자고 주장한다. 오늘날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는 기준이 동성애, 성전환, 낙태, 동거 등의 성혁명 이슈들이다. 기독교인은 어떤 정파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며, 성경이 가리키는 가치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명확히 분별해야 한다.

정치적 문제는 정의의 문제이며, 결국 절대적 기준의 문제이기에 반드시 종교와 윤리로 귀결된다.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권위와 질서 아래의 안정이 필요하다. 사회는 바뀌어야 하지만 신중한 변화만이 사회의 안정을 지켜낼 수 있다는 러셀 커크의 주장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정치의 주요한 덕목은 신중함이란 사실을 우리는 현실 속에서 절실히 느끼고 있다.

묵상: 당신은 진보와 보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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