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저질 막장극’이 ‘대의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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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희롱 사건 직권조사를 맡았던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의 주장 대부분을 사실로 인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언론이 지난 17일 입수해 보도한 인권위의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희롱 등에 대한 직권조사’ 결정문에는 박 전 시장이 피해자를 대상으로 수년간 신체접촉을 포함해 문자와 비밀 대화방 등의 수단으로 낯 뜨거운 성희롱을 저질러온 행위들이 상세히 적시되어 있다.

피해자가 박 전 시장으로부터 늦은 밤 ‘혼자 있냐’ ‘너네 집에 갈까’ ‘향기 좋아 킁킁’ 등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박 전 시장의 속옷만 입은 사진, 여성의 가슴이 부각된 이모티콘을 받은 것도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박 전 시장이 피해자의 멍든 신체 부위에 입술을 대거나, 비밀대화방에 “결혼하려면 여자는 성행위를 잘해야 돼”라고 말했다는 등의 진술은 확인이 어렵다는 이유로 사실로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피해자의 주장에 일관성이 있어 상당히 신뢰가 있다고 인권위는 판단했다.

피해자는 박 전 시장의 집요하고도 거듭된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정신과에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상담을 받기도 했다. 인권위가 확인한 피해자의 정신건강의학과 상담 기록에는 ‘야한 문자·몸매 사진을 보내 달라는 요구를 받음’ ‘집에 혼자 있어? 나 별거 중이야 라는 메시지를 받음’ 등의 구체적인 내용의 호소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소속 자치단체장이 저지른 참담한 성범죄에 대해 눈 감는 대신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 부르며 2차 가해를 저질렀다. 친여 검사는 피해자를 ‘꽃뱀’으로 표현하고, 친여 지지단체는 피해자를 고 박 시장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기까지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시절 소속 단체장의 부적절한 문제로 공석이 된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당헌을 직접 만들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눈앞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당헌마저 폐기해 버리고 보궐선거에 참가했다. 여당의 이런 표변에 대해 국민을 대신해 꾸짖어야 할 문 대통령마저 신년기자회견에서 희한한 논리로 감싸고 두둔했다.

“우리 헌법이 고정불변이 아니고 국민의 뜻에 의해서 언제든지 개정될 수 있듯이 당헌도 고정불변일 수는 없다”고 한 문 대통령의 말은 논리의 적절성 여부를 따지는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당리당략을 위해 스스로 국민 앞에 한 약속마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만들 정도의 수준에서 굳이 헌법까지 들먹일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데 보다 심각한 것은 국정의 책임을 진 공당으로서 제 아무리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러도, 국민에게 한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하고도 누구 하나 부끄러워 할 모르는 오만함에 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에 합세했던 민주당 여성 의원 세 명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자당 여성 후보의 공동선거위원장과 대변인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러더니 피해자가 17일 여성·노동·시민·사회단체 288개가 참여한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공동행동’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피해의 전말을 밝히고, 2차 가해 중단을 거듭 요청하는 시점에 LH 부동산 투기 사건과 더불어 여론이 급속히 나빠지자 모두 하루아침에 선대위를 하차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공교롭게 미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문제가 일어났다. 여당이고 민주당 소속 자치단체장의 성 스캔들이라는 것까지 똑같다. 그런데 180도 다른 것은 한국은 ‘제 식구 감싸기’에 올인 하는 반면에 미국은 정치인의 성범죄에 관한 한 ‘내편’일수록 더 혹독한 철퇴를 가한다는 점일 것이다.

거듭된 성추문에 휩싸인 앤드루 쿠오모 미 뉴욕주지사에 대해 즉각 사퇴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야당인 공화당이 아닌 그의 소속 정당인 민주당의 연방 상원 원내대표였다. 뉴욕주를 지역구로 둔 민주당 소속 연방 하원 의원 19명 중 16명도 사퇴 촉구 행렬에 동참했다.

그런데 민주당이 명문가 출신으로 차기 대선에까지 거론되는 3선의 거물 뉴욕주지사를 향해 사퇴를 요구하고 나선 시점과 이유가 참으로 놀랍다. 법원에서 성범죄로 판결하기도 전에 단지 “성희롱 의혹이 제기된 것만으로도 뉴욕 시민의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 그가 사퇴해야 할 이유라는 것이다.

국민 없는 정치인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죄질이 무겁든 가볍든, 크든 작든 범죄, 혹은 스캔들에 연루되었다면 정치 인생을 걸고 책임을 져야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물며 성범죄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정치에서 이런 기본적인 도리는 사라진지 오래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기 때문이다. 시대는 21세기인데 좌표는 중세 암흑시대를 향하고 있는 게 대한민국 정치의 현주소다. 여성을 성도구화 하는, 가장 죄질이 나쁜 성범죄조차 내편이면 무조건 감싸고도는 정치, 여성을 대표한다는 그 많은 여성 국회의원들조차 입을 꾹 다물고 진영논리를 앞세우는 것이 이 나라의 정치현실이라면 ‘대의민주주의’는 이미 중병이 들었다는 증거다.

민주당의 잘못이 크지만 이번 사건을 정쟁의 도구로 삼아 잃어버린 정치적 자산을 되찾는데 몰두하고 있는 국민의힘도 야당으로서 결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까지의 후보단일화 과정을 보면 박 전 시장의 성비위로 치러지는 보궐선거라는 점을 깡그리 잊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자기들이 잘해서 지지율이 오르는 줄로 아는 착각, 국민을 외면하는 오만은 여당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치를 왜 ‘아사리판’이라고 하는지 요즘 돌아가는 정치판에 해답이 있다. 이 정도로 “난잡하고 무질서하고 엉망진창”이 되기도 쉽지 않다. 국민들은 코로나19로 아우성인데 여든 야든 오직 권력을 잡는데 함몰된 이런 ‘야바위’ 선거판에 국민은 언제까지 조연도 아닌 ‘소품’ 신세로 전락할 것인가. 그나마 유권자인 국민이 이때만이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투표하지 않는다면 이런 저질 막장극을 안 볼 기회마저 날려버리게 된다. 선거는 ‘대의민주주의’를 지키는 유일한 버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