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오해에 대한 작은 답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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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는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다?

최더함 박사

비판자들은 칼빈이 사용한 신학 용어에도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어떤 이들은 칼빈의 이중예정이 성경밖의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한다며 이런 이론은 당장 폐기되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이외 삼위일체, 휴거, 천년왕국 등의 용어도 거부한다. 알닥시피 삼위일체의 발견은 가장 위대한 신학적 발견이라고 평가받는다. 아리우스주의 등 이단을 제외하고선 누구도 이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오직 한 분이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적 통일성과 다양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교리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단들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다.

그러므로 이런 반론들은 타당성이 없다. 이런 논리라면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하여 설명하는 모든 신학 용어가 무용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 진리인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어떻게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로 가르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치 라면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없고 무조건 건강을 해치는 음식이므로 라면을 추방해야 한다는 논리와 진배없다.

칼빈으로 인해 율법주의 혹은 교조주의가 나타났고 이것이 복음을 가로막았다?

적대자들은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복음을 지나치게 교리 중심으로 분류하고 해석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흐름을 가로막았다고 평한다. 다시 말해 칼빈의 영향으로 나타난 강해설교는 성경을 지나치게 분석하고 주석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교조화하고 형해화했다고 공격한다. 특히 이런 반론자들은 칼빈의 예정론을 대단히 거부하는 심사를 가지고 있다. 예정론으로 말미암아 모든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로 예정론을 꼽는다. 북미개혁교회의 프롱크 목사는 도르트 신조 강해 설교를 통해 예정론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고취하면서 예정론을 이해하기 위해선 전문가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우리는 예정을 구름 속에 있는 높은 산꼭대기와 비교할 수 있다. 그 산꼭대기는 깊은 골짜기, 갈라진 틈, 벼랑을 따라 굽이굽이 좁은 길로 오를 때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것은 매우 좁은 길이어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걸어가야 한다. 한 걸음이라도 헛디디면 당신은 벼랑 아래 바위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높은 곳을 오를 때에는 전문가의 안내가 필요하다”

또 김세윤 박사는 예정론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가장 밝은 불빛으로부터 시작해야 이해된다고 조언한다.

"예정은 태초를 논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논할 때 태초라는 시점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 사건부터 논해야 한다.(중략) 예정 교리는 역사의 중심에서부터 논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다고 고백하며 그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일어났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 게시되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 계시가 가장 환하다. 이전까지의 계시 즉, 구약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계시에 대한 준비 계시였다. 그래서 구약의 계시는 그 불빛이 그다지 환하지 않았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계시에 대한 그림자였다. (중략) 그런데 이 계시의 불빛은 양쪽으로 멀리멀리 비췰수록 희미해진다. 이쪽은 태초요 저쪽은 종말인데 중간의 불빛이 양쪽으로 갈수록 희미해진다. 중간(그리스도)이 제일 환하다“

확실히 우리에게 예정론이 없다면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모든 불안감으로 신앙의 항로가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확신은 구원의 감사로 이어지고 신앙하는 일을 더욱 경건하게 만든다. 예정이라는 산꼭대기에 오르려면 많은 땀과 피의 헌신을 쏟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죄인은 자신을 낮춘다. 예정의 골짜기에 갇혀 불쌍한 거지처럼 무릎을 꿇고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추한 죄인이며 우매한 자인지를 깨닫는다. 도무지 자신의 힘으로는 산의 정상으로 갈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예정은 죄인을 낮추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의 방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예정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얼마나 불쌍한 자인가?

결어

칼빈주의는 결코 율법주의도 아니고 교조주의도 아니다. 더욱이 칼빈주의는 칼빈 개인의 사상도 아니요, 칼빈이라는 한 사람을 추앙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품도 아니다. 칼빈주의는 초대 교회 사도들의 전승과 교부들과 어거스틴과 그 뒤를 잇는 후예들과 종교개혁가들의 사상들을 칼빈이 가장 성경적인 기독교를 세우기 위해 혼신의 열정과 모든 지성적 헌신으로 종합하고 체계화한 신학적 열매들이다. 가장 성경적인 신학으로서 오직 칼빈주의만이 성경을 바로 알게 하고 바로 믿게 하고 바로 행하게 한다. 그리고 지금도 칼빈주의는 개혁을 위한 연구를 병행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가장 성경적인 개혁신학이다. 지금도 칼빈주의는 개혁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장 성경적인 신학과 사상과 신앙을 고수하고 개혁하기 위해 정통 기독교라는 역사의 강물이 되어 도도히 흐르고 있다. 한 번도 이 강줄기에서 이탈하지 않고 비록 소수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그루터기로서의 사명을 잃지 않고 있다. 칼빈주의가 곧 개혁주의요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의 주류(main stream)임에 틀림없다. (끝)

최더함(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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