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복음주의다

교회일반
교회
노승현 기자
shnoh@c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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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ism)'이 붙으면 모든 것이 악마화된다. 한쪽으로 극단화되기 때문이다. 개인도 좋고, 자유도 좋고, 사회도 좋고, 공동체도 좋고, 율법도 좋지만,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율법주의로 빠지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된다. 지금 세상도, 한국 사회도 이 'ism' 때문에 서로 싸우고 갈등하며 지옥이 되고 있다. 바로 그들 안에 '복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ism'이 붙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복음주의다.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열심히 퍼트리는 복음의 전도사가 되어야 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어원적으로는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이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쉽게 말하면, 복음이란 예수에 대한 것이다. 예수의 삶과 예수의 가르침이 복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추구해야 할 것은 예수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사랑이다. 희생이다. 용서다. 속죄다. 대속이다. 기독교인들의 기본적인, 본질적인 지표는 십자가, 즉 사랑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계명, 십계명 보다 큰 계명, 계명 중의 계명은 사랑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고 하셨다. 사랑이 없는 자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즉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 아가페의 사랑은 십자가로 나타났고, 희생으로, 용서로, 속죄로, 대속으로 나타났다.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13)고 표현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완성하고 온전케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칼을 예로 들어보자. 칼은 찌르거나 자르는 도구라는 것을 인간의 이성은 안다. 그런데 그것이 필요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게 하는 것은, 그 칼이 충분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그 칼의 기능을 알아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이 이성을, 사랑이 지식을, 사랑이 인간을 온전케 한다. 우리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 예수에게서, 예수의 십자가에서 발견한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그분은 때로 거짓된 이스라엘 백성들, 거짓된 종교지도자들, 타락하고 부패한 성전(교회)에 대해 아주 심하게 분노도 하셨다. 그분은 때로 자신의 제자들을 무섭게 책망하고 혼내기도 하셨다. 그런데 다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인간적인 감정과 혈기, 분노로 그러신 것이 아니다. 불타오르는 긍휼로 인해, 불타오르는 사랑으로 인해 그러셨던 것이다. 그분은 사랑으로 행하셨다. 그런데 그 마음에, 그 중심에 사랑이 없으면서 예수 흉내 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저 사랑 없이 냉혹한 칼을 휘두르면서 정의의 사도를 자처한다. 살리고자, 구원하고자,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그 중심에는 오직 살인하고자 하는 마음 밖에 없다. 그게 어떻게 예수의 마음과 같은가? 실제론 바리새인일 뿐이다.

예수께서 축복하는 천국의 백성들은 겸손한 자, 애통한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다. 정의에 목말라 정의만 외쳐서도 안 되고, 의를 위하여 열심을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동시에 겸손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고, 나와 백성들을 위해 울며 기도할 수도 있어야 하고, 긍휼의 마음도 있어야 하고, 화평을 가져오려고 노력도 해야 한다. 팔복의 여덟 가지 지표는 'or'가 아니라 'and'다.

사랑이 있어야 기쁘다. 사랑이 있어야 생명이 있다. 부활은 무엇인가? 십자가로 인한 생명이다. 십자가를, 사랑을 실천할 때 기쁨이 오고 생명이 온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기쁨의 동산, 생명의 동산이 된다. 잃어버린 에덴을, 낙원을 회복하게 된다. 이 세상이 사람 살만한 세상이 된다.

기독교인들은 이것도 비판하고 저것도 비판하는 양비론자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복음을 알고, 복음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찬란함과 영광을 아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 앞에서 다른 모든 것들은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 3:7-8)이라고 했다. 해 앞에서 달과 별이 빛을 잃듯, 복음 앞에서 세상의 것들은 빛을 잃는 것이다. 더 고상한 십자가의 지식으로 인해 세상의 지식은 빛을 잃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기본 이해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전적 부패, 전적 타락을 인정한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는 일에, 인간이 만드는 것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느 정도 양보해도, 인간 안에는 부분적 참, 부분적 거짓이 혼재되어 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온전히 선한, 온전히 완벽한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최선이 아니라 차선, 최악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차선에 대해, 차악에 대해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차선이나 차악과 비교할 수 없는 예수의 피의 복음, 사랑의 복음을, 십자가와 부활을 가진 자다. 그것들을 예수보다, 복음보다, 십자가와 부활보다, 사랑과 생명보다 앞세우지 말라. 예수보다 높아진 것들, 복음보다 높아진 것들은 모두 낮춰야 한다. 낙원으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인간이 만든 것들로 막지 말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