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칼럼] 세 개의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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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목사ㅣ금천교회

[기독일보=칼럼] 솔직히 말해서 은퇴를 앞두고 홀가분한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한 감정이 앞서는 것 도 사실이다. 그 중에 하나가 교회 안에는 당회장실 이라는 공간에 잘 읽지도 않은 책들로 갖추어 놓고 놓았고 분위기도 있는 서재실만은 어느 교회 못지않은 공간이라고 자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장소를 후임 목회자에게 내어주고 나니 허전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인생이란 생각해 보면 의자 자리다툼이 아닌가? 이오네스크는 프랑스의 극작가로서 현대인들의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른바 ‘앙티테아트를’ 즉 반연극(反演劇)의 거장으로 널리 알려 지고 있다. 그가 39살 되던 해 ‘발효한 의자들’이란 희곡은 그를 부조리극의 대표적인 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얼핏 보면 난해한 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풍자적인 이 희곡에는 나이를 알 수 없는 두 노 인 부부만 무대 위에 등장 할 뿐 등장하는 것은 단지 의자들뿐이다. 이 노인 부부는 초대받은 손님들이 올 때마다 무대 위에 의자를 갖다 놓는다. 무대 위에는 끊임없이 귀족 귀부인, 같은 지체 높은 분들 명망가들이 몰려오는데 그럴 때 마다 노인 부부는 ‘어서 오십시오’ 하고 인사를 하면서 의자를 갖다 놓는다.

결국 무대 위에는 빈 의자들만 늘어나게 된다. 그 의자 위에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귀족들이 앉아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 만 실제로 보이는 것은 빈 의자들뿐이다. 이 전위극을 통해서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 형상화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위라든가, 명예라든가 그런 것은 없고 다만 있는 것은 하나의 도구인 ‘의자들뿐이 라는 강력한 충격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윗자리에 앉으려는 것을 보시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 고 말씀 하신다. 인간에게는 원래부터 낮은 사람은 없는 것 아닌가? 있는 것은 다만 높고 낮은 것은 높여진 위치의 차이 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높은 자리에 앉을 때 우리가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착각 하 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간에게 있어 권력과, 명예와, 부는 이오네스크가 표현 하였듯 하나의 의자 싸움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하나의 의자에 불과 함에도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독점 하려하고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은 언제까지나 강탈 하려고 호시 탐탐 노리고 있음으로 해서 인간의 비극이 시작 되는가 보다.

요즘 밖에 나가보면 총선을 앞두고 온갖 감언이설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온갖 화려한 문구가 시야에 각인된다. 그 많은 미사여구들 단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자리다툼의 신호가 아니겠는가?

목회 정년을 남겨 두고 자원 은퇴를 하고 자리를 양보하고 우연이 3개의 자리가 본인에게 주어졌다. 천안으로 이사를 하고 서재를 꾸미다 보니 어릴 적에 불러 보았던 ‘빙글’ ‘빙글’ 도는 의자가 굴러 떨어졌다. 또한 다문화 일을 맡다보니 거기에도 안락한 의자가 주어졌고 또 하나의 언론사 일을 맡고 보니 거기에도 의자가 준비 되어 있다. 이렇게 보니 나는 의자에 복이 많은 듯싶다.

그렇다고 마냥 좋아 할 일만은 아닌 듯싶다. 사고는 고급 의자에 않아 있던 분들에 저질러졌으니 더욱 삼가고 겸손 하라는 교훈을 주시는 듯하다.

오늘 아침 기도 제목이다.

‘주님 낮은 자리에 앉게 하소서. 나를 의자에 노예가 되지 않게 하소서. 교만이라는 병균은 완전 불치의 병균으로 틈만 보이면 고개를 들고 설쳐댄다. 교만은 하나님의 은총을 거역하게 만들지만 겸손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자이다. 주여! 나로 하여금 높은 의자에 탐닉하기보다 낮은 의자의 자리에 앉게 하소서.’

앉아야 자리를 구상하며 의자를 주시해 본다. 다문화선교센터의 의자를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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