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칼럼] 죽음의 단상

오피니언·칼럼
칼럼
편집부 기자
veritas@cdaily.co.kr
▲이선규 목사ㅣ금천교회

[기독일보=이선규 목사] 히브리어에서 ‘죽음’ 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는 ‘마베트’이다. 죽음에는 자연적인 죽음, 또는 형벌로서의 죽음이 있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으로 모든 육체적인 요소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의 죽음을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야훼께서는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고 끌어올리기도 하신다.(삼상2:6)’고 하여 하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말하고 있다.

아무리 죽음에 대해 초연한척 하여도 막상 내게 죽음이 다가오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기대 하지 않은 불청객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죽는 순간까지 사는 것만 생각하고 노력하다 결국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 대 부분이다.

사람은 누구도 자기가 죽는다는 것만은 부인하지 못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갖가지의 질병과 각종사고 그리고 전쟁과 천재지변 등으로 남녀, 노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때와 장소의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시도 때도 없이 평등하게 다가온다.

죽는 모양은 각 각 다르겠지만 사람에 따라서 죽음을 맞는 태도는 각양각색이다.

불안과 공포가 없이 평화와 희망의 빛난 얼굴로 잠자리에 든 것 같은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얼마나 복스러울까? 봄에 싹을 티 우고 여름에 무성 했다가 가을에 씨를 맺는 것과 같이 인생도 그때를 대비하여 푸름을 유지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나 잎만 무성해서는 안 된다. 알이 차야한다. 알찬 영혼은 무르익은 실과 빛처럼 우아하고 고결한 법이다.

생일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는 말씀이 있다. 생일 집에서 보다 초상집에서 인생을 알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사람은 결코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랑과 이해와 관심을 먹고사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정신적인 압박과 배신을 당하게 되면 괴로 와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타인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든지 또는 배신을 하는 경우에‘짐승 같은 놈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얼마 전에 서울 공원에서 사육사가 먹이를 주다 사자에게 물려 세상을 떠난 것이 떠 오른다. 이 잔인한 짐승을 욕해서 무엇 하랴? 그 사자가 자기에게 양식을 먹여 주던 고마운 사육사를 왜 해쳤을까? 사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진정 우리 자신을 돌아 볼 때에 너무나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인간도 인간끼리 서로 물고 먹으면 희망이 없게 된다.

거기는 오직 파멸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 증오하고 배신을 일삼으면 결국은 총살된 사자처럼 자기 자신도 죽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죽게 된다는 사실(갈5:15), 분열과 아집, 편견, 죄로 얼룩진 '나'라는 무덤, 사랑과 평화가 사라져 가는 '가정이라는 무덤, 신뢰와 빛을 잃어가는 학원 이라는 무덤, 노사 분규로 증오와 불신이 팽배해 가고 ‘직장’이라는 무덤, 권모, 술수와 당리, 당략이 난무하는 '정치'라는 무덤, 경쟁과 폭력, 빈부 격차에 흔들리는' 자본주의라는 무덤, 물질주의에 발목 잡혀 세속화 되어가는 '교회' 라는 무덤 우리는 이런 무덤에서 부활을 체험하고 변화 시켜야 하며 오직 사랑과 용서와, 배려만이 우리들을 연합케 하는 줄이 되어야 한다.

그 길만이 나도 너도 같이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는 평생 개척 교회를 섬기며 그 흔해 빠진 시찰장, 노회장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자녀들에게는 제대로 익은 과실 한번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키우고 조기 은퇴를 하였으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사남매가 잘 자라 큰 아들은 한의사로, 둘째 아들은 의사로 딸은 교수부인이 되기까지 역경의 세월을 보내고 소천하신 목사님의 감동적인 일화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나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생각하며 밤은 깊어만 간다.

글ㅣ이선규 목사(금천교회)

#이선규목사 #이선규칼럼 #죽음

지금 인기 많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