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오 칼럼] 종교개혁 500주년 루터에게 듣는다(10)

오피니언·칼럼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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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하이델베르크 논쟁(1518) -논제 9-
▲정진오 목사(미국 시온루터교회 한인 담당목사)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은 확신하게 되고, 오만하게 되는데,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고, 가급적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에 스스로 그 영광을 취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은 다른 것들로 변질된다. 그 이유에 대해 성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데 지체하지 마라"(이 인용문은 시락서 5장 7절에서 인용되었다. 불가타 성서는 시락서를 포함하고 있다-역자 주)고 충고한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영광을 철회하는 자들을 불쾌해 할 텐데, 하물며 그런 인간으로부터 끊임없이 영광을 철회시키고자 하는 자를 얼마나 불쾌하게 여기겠는가! 이것이 얼마나 뻔뻔한 행동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들마다 또는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난 자들은 잘 알려진 것처럼 그리스도로부터 영광을 빼앗는 것이다." (LW 31, 47)

앞선 논제 7과 8에서 루터는 하나님을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이 행한 모든 행위들은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s)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광의 신학자들은 언제나 허점을 찾아 논쟁하기를 즐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행하는 선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죽음에 이르는 죄'를 행했는가?

대부분의 신학교 교수들과 목회자들은 이러한 질문을 학생들과 교인들로부터 자주 받는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지만, 예수 믿는 자들 보다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만일 그들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모든 행위가 '죽음에 이르는 죄' 라고 한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는가?

중세 스콜라 전통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은 행실'(dead works)과 '죽이는 행실'(deadly works)을 구분한다. 즉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앙인들이 행한 선한 사역들은 은혜가 없이 행한 행위로 공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죽은 행실'이지만, 그럼에도 영원한 처벌을 받는 '죽이는 행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곧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는 아니라는 점이다(스콜라 전통은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s)와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s)로 구분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논제 3의 주해를 참고하라-필자 주)

토마스 아퀴나스는 '불신앙인들의 모든 행위가 죄인가?'라는 질문에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서 다음과 같이 답한다.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는 신성한 은혜를 제거한다. 그러나 본성의 선함을 전적으로 타락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불신앙은 죽음에 이르는 죄이고, 불신앙인들은 은혜가 없는 자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성의 선함이 그들 안에 남아있다. 결론적으로 불신앙인들은 은혜로 나아가는(공적있는 행위) 선한 사역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본성의 선함으로도 충분한 선한 행위를 한다. 따라서 불신앙인들이 행하는 모든 것들이 죄라고 말할 수 없다."(Summa Theologica, II-II, Q 10, Art. 4)

그러나 여기서 루터는 '죽은 행실'과 '죽이는 행실'에 대한 스콜라 신학의 이러한 구분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포기하게 만드는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루터는 다시 한 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한다. 믿지 않는 자들의 행위가 죽은 것이기는 하지만, 영원한 형벌에 이르는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교회에 매우 위험한 것이다. 중세 스콜라 전통이 말하듯이, 불신앙인들이 자신의 선한 본성으로 충분히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면, 또한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갖겠는가? 그러한 구분은 도리어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회심을 지연시키는 핑계와 변명을 제공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빼앗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회심시키기 위한 동력을 약화시킬 뿐이다. 따라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담대하게 주장한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선을 위해 봉사하거나 일할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스스로 그를 악으로 향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 속박되어 있다. 이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경한 방식을 통해 그 모든 것을 사용한다."(Martin Luther 'Concerning Christian Liberty: with , Letter of martin Luther To Pope Leo X, RDMc publishing, 2007, p. 41.)

최근 세계 교회들이 점차 동성애 결혼과 동성애자 성직 안수를 허용하면서 기독교 내에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장로교(Presbyterian Church USA)는 성경에서 금지하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동성애자가 목사, 장로, 집사가 될 수 있도록 교단헌법을 수정했다. 또한 대표적인 보수 가톨릭 국가로 알려진 아일랜드는 얼마 전 국민투표를 통해 동성결혼을 합법화함으로써 동성애 반대를 차별과 억압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 보호 등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아래 동성애자들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들에 대해서도 좀 더 관대하라고 주문한다. 그러는 사이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성경적 진리들이 지금은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 기독교 진리에 대한 세상의 여러 도전들이 이제는 관용이란 명분 아래 묵인되고 받아들여지고 진리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지금 우리는 다시 한 번 개혁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과 기독교 진리에 대한 도전 앞에 '관대' 하고자 하는 교회와 신학적 시도들은 도리어 루터가 말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포기'하게 만들어 더 큰 재앙으로 이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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