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의 선교역사칼럼] '삼사운동' 방효원 선교사

▲방효원 선교사.

[기독일보=손상웅 목사] 한국장로교회는 1912년 9월 총회 창설에 감사하여 조선 500년의 근간이었던 유교에 빚을 갚는다는 취지로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 토착 선교로 1914년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세명의 선교사가 산동에 파송되었으나 2년 만에 귀국하고 말았다. 1917년 한국 장로교회가 산동선교 재개를 결의하였을 때 방효원 (1886~1953)이 자원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나선 것이다.

방효원은 1886년 7월2일 평북 철산군 여한면에서 태어나 아버지 방만준을 따라 예수를 믿었다. 신성학교에서 양전백 목사와 위대모 선교사로부터 신앙적 훈련을 받은 방효원은 1909년 6월 신성학교 제1회 졸업생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이후 그는 1911년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선교사 마포삼열에게서 배웠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철산 영동교회를 목회하던 중 질병으로 산동선교를 중도 하차한 박태로 선교사와 산동 선교지 시찰을 다녀온 뒤 산동 선교사로 자원했다.

라이양에 거주하면서 김병규 조사의 도움을 받아 중국어 학습을 한 방화중은 남관교회등 지방교회의 순회전도자로 활동하면서 전도대를 결성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주력했다. 1년 만에 내양현에 교회가 설립되면서 홍승한, 박상순, 이대영, 주현측 등의 추가 선교사 파견으로 힘을 얻어 1931년에는 30여 교회를 세워 내양노회를 조직하더니 초대 노회장의 영예를 얻었다. 특별히 내양노회의 회원교회가 자립, 자치, 자전을 실천하는 삼자운동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점은 오늘날 중국교회의 삼자운동의 효시가 되었다고 해서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방효원은 감옥 전도와 걸인구제에도 힘썼고, 복음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발로 뛰어 선교사의 소명을 충실히 감당했다.

목사(교회설립), 교사(학원선교), 의사(의료선교)가 한 팀이 되어 복음사역을 이룬다는 '삼사운동'은 방효원에게서 확실했다. 이는 필자가 만든 용어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목사로서 30여개 교회를 설립하였는가 하면, 16차례의 제직사경회가 마침내 라이양 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 토착민 교회지도자 양성을 목적하여 1923년 1월 1일에 설립된 본 학교는 1년 2학기로 매 학기에 한 달씩 3년 과정으로 첫 입학생은 8명이었다. 방효원이 최초로 해외에서 학교를 세웠다는 영예를 얻는 순간이다. 의료 선교사 안중호는 1932년 내양에 애린학교, 지바에 애도학교를 설립하여 삼사운동에 합세했다. 1919년 의사 김윤식의 내양 남관 병원개업과 더불어 1932년 의료선교사 안중호의 지마성 병원개설이 삼사운동을 실험했다.

'화인(華人)을 얻으려면 화인이 돼야 한다'는 방효원의 신조는 중국 옷을 입고, 중국말을 하고, 중국인들 사이에서 사는 것을 넘어서서 중국교회 목사회원이 되었다. 반기독교인에게 조차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바로 화인이 되고 화인의 목사가 되었던 데 있었고, 이 점에서 오늘날 선교한국이 선교지 교회와의 협력에 소극적인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내지 전도 확장에 따른 해외선교 축소 정책에 따라 방효원은 1935년까지 18년의 중국선교를 마쳤다. 1936년에 총회 전도부 파송으로 상해 조선교회에서 1944년까지 사역하였고, 1945년 이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던 1953년 까지 국내에서 목회를 계속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지런함을 보여 주었다. 방효원은 1937년 그의 아들 방지일이 산동선교사로 파송됨에 따라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이른 부자선교사 제1호가 되었다.

글ㅣ시드선교회 연구실장 손상웅 목사(풀러신학교 선교역사 전공·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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