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목회자가 이해한 교황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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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기자
총회니, 노회니, 연회니 등등 자리다툼에 소진하고 있다면 기독교의 희망 어두워
▲이선규 목사ㅣ금천교회

[기독일보]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으로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카톨릭은 개신교에 많은 빚을 진 것은 사실이다. 교계에서 지적했듯이 흔히 인식 하기를 우리가 카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하는 관념이 존재해 있고 카톨릭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가장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우상 숭배 사상과 태양신 숭배 사상이 유입되었다는 이해하고 있다.

과거에 카톨릭과 프로테스 탄트와의 사이에 일어난 여러 가지 불행하고 불미한 사건을 말하려면 지면이 부족하다.

다만 긍정적인 공통적인 요소들을 찾아보고 그 대안을 제시 하고자 한다.

카톨릭이나 개신교가 똑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 속한 공동체로서 다같이 기독교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그의 속죄로 구원 받고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면 요즘 교황방문을 계기로 카톨릭에 대한 평가를 '이단을 넘어 이방 종교, 혼합 종교'라는 표현은 이해는 가지만 좀 지나친 것 같은 느낌이다.

두 교단은 다같이 성경을 갖고 있다. 카톨릭에서도 성경을 최고 표준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같은 역사를 갖고 있는 것도 하나의 공통점이다.

우리가 기독교 사를 말할 때 전체로서의 기독교 사를 말하는 것이지, 칼빈이나 루터 이후의 개혁 교회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이렇게 공통 근거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일치의 사명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공통점을 발견하고 동시에 현재의 자신을 발견하고 자체 개혁과 아울러 상대방과의 실제적인 일치에 접근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 대하여 카톨릭 성경을 교권의 골방에 유페 시켜 일반 평신도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것과 성경을 각기 자기나라 말로 번역하는 것을 금했던 것에 반발하여 개혁 교회 에서는 성경을 일반에 공개하고 '성경만을' 규준으로 삼아 왔다. 그래서 마치 성경은 프로테스탄트의 전용물인 것처럼 보여 졌다.

그러나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성경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 교단은 없다.

다만 그 해석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현재는 세계의 성서학자들이 성서 연구와 해석에 있어서 엄정한 학자적 양심과 객관적 공정을 기하기 때문에 편협된 해석은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예를 들면 마태 16: 13-20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예수님의 말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것과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를 문자 그대로 카톨릭에서는 그 '반석'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교회 존립의 근거로 삼아 왔음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카톨릭의 학자들도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을 기록한 것이라는데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신교의 구원론의 핵심인 로마서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구절에서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루터의 번역을 옳은 것으로 인정하는 추세이다.

본인은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발췌한 대목을 여기에 기록하고자 한다.

"우리가 이해하지도 못한 것을 놓고 경멸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일뿐만 아니라, 위험하고도 건방진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선명한 이해력을 가지고 진리와 거짓의 한계를 설정해 놓고 보면 우리가 보통 무시할만한 것보다 훨씬 이상한 것들도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과 과정을 거치고 나서 단념하는 것도 늦지 않을 것이다."

마음에 와 닿는 말이다. 종교는 무엇보다 유일 절대의 진리를 표방하는 것이기에, 그 어느 쪽에도 양보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한편으로 치우쳐 이데올로기를 잘못 이해한 나머지 교리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지 아니한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대안은 무엇인가?

참된 기독교 사랑을 발휘하자.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남의 허물을 용서하되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라는 등의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만큼 높은 수준을 오로지 우리 기독교만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오늘의 시대는 도덕적 영웅심에서 자랑 삼아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자기 것을 나누지 않고는 괴로워서 못 견디게 되는 기독교의 사랑 실천 운동이 활화산 같이 타올라야 한다.

백 마디 천 마디의 설교보다도 가난한 과부의 한 푼이 어떤 부자의 백만 냥 보다 더 귀하듯이 마음의 뜨거움이 전파처럼 남에게 통할 수 있는 그런 행동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국민들이 소박하고 섬김을 삶을 보여준 교황의 모습에 환호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각 교파마다 무슨 총회니, 노회니, 연회니 등등 자리다툼에 소진되어 있는 모습으로는 기독교의 희망은 어둡기만 하다.

프란치스코의 방한으로 개신교의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함께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글ㅣ이선규 목사(금천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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