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사회개혁 공헌과 초창기 기독교교육의 힘 발휘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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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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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크리스천스쿨協 '한국 크리스천 스쿨의 정체성과 나아갈 길' 심포지움 개최
▲유은희 교수(총신대 기독교교육학과)가 '한국 기독교학교의 역사가 주는 교훈과 과제'를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오상아 기자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개화기 봉건적인 한국사회를 개혁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초창기 기독교학교의 역사부터, 획일화된 교육으로 인성교육이 무너진 공교육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기독교대안학교까지 기독교학교의 역사를 살피며 공과(功過)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마련됐다.

대안학교 법제화에 따른 '한국 크리스천 스쿨의 정체성과 나아갈 길'을 주제로 한국크리스천스쿨협의회(AKCS) 심포지움이 19일 오전 10시 한국여전도회관에서 개최됐다.

이날 심포지움에서 '한국 기독교학교의 역사가 주는 교훈과 과제'를 주제로 발제한 유은희 교수(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는 기독교학교의 역사를 훑으며 역사 속에서 얻은 교훈과 과제를 발표했다.

그는 먼저 "기독교학교의 역사는 개화기랑 구한말(1884년부터 1910년)에 시작됐다"며 "근대의 학교 역사를 생각하며 기독교학교의 공헌을 의심하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이만열 교수님이 개화기때 기독교학교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며 영혼구원에 대해 이야기한 것도 있지만 이웃과 나라, 세계에 대해서 책임감을 갖고 살아야 된다고 말해줄 수 있었던 교육이다고 말씀하셨다"며 "그것 자체가 봉건적인 사회에 대한 해방이 됐다. 집에 있는 여성들이 어떻게 하면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여성들에게 교육을 받고 사회참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고 소개했다.

유은희 교수에 따르면 평양대부흥과 함께 1907년 평안남도 북서쪽 지역은 교회가 104개, 학교는 149개가 생길 정도로 교육 사역이 활발했으나 1906년 일본이 식민지 교육을 시작하고, 1908년 사립학교법과 조선교육령을 내리며 종교수업이 폐지됐다.

그후 1910년 기독교 사립학교의 수가 1913에서 759개로 줄고, 1915년이 됐을때는 500개 정도로 줄었다고 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일제의 회유책인 문화 정책으로 사립학교가 숨통이 트이는가 싶었지만 1931~1934년이 지나며 일제가 전쟁을 준비하며 신사참배 등을 강요해 사립학교가 다시 문을 닫게 되었다.

◆ 광복 후 1980년까지 기독교학교 부흥기…제 역할 못 찾은 점 아쉬워

유 교수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는 사실 일제 압박 하에서 사립학교가 숨통을 트기 어려운 시대였다"며 "그러나 광복이 되고 6.25전쟁이 일어나는 모든 과정 속에서 기독교학교를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종교의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많이 있었지만 진보주의적인 교육철학이 들어오고, 우리나라가 여러 복잡한 상황 속에서 민족 정체성 확립해야 할 시기에 기독교학교가 한 일은 너무 적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해방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는 교회가 많이 부흥하던 시기다"며 "해방이 되고 인구가 폭발하고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가 되고 독재정권 하에서 어려움을 겪는 불안정하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밀려왔다"고 전하며 "그때 한국교회는 밀려오는 교인들과 함께 한국사회의 산업화와 성장위주의 문화에 휩쓸려 갔다"며 "개화기에 한국사회를 반봉건적인 사회로 개혁하는 역할을 잘 했었던 것처럼 이 시기는 더 잘 해야됐던 때인데 이 역할을 확 놔버렸던 시대다"고 분석했다.

유 교수 "(당시가) 기독교학교가 건물이 회복되고 숫자가 늘었을 수 있지만, 거기서 더 나가지 못했던 정체됐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며 "고등교육기관 같은 경우 우리나라에 좋은 지도자를 키워냈던 학교였지만 당시에는 한국사회의 경제를 위해서 교육을 도구화시켰던 실용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획일화된 교육을 했다. 또 60년대에서 80년대가 지나면서 교육이 도구화되고 획일화 돼서 무한경쟁으로 아이들을 밀어넣게 됐다"고 설명했다.

◆ 지금이 기독교학교가 가장 필요하고 가장 준비된 단계

유 교수는 이어 "1990년대를 기점으로 기독교세계관 운동이 시작됐는데, 민주화로 인해 고민하던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까 고민하다 시작한 운동이었다"며 이어 "정말 기독교학교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깨닫기 시작했던 것은 1990년대 이후였다"고 말했다.

또 "대안학교도 활발하게 시작되었던 시대다"며 "역사를 보면 기독교학교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성숙하고 있구나 발견하게 된다. 지금 기독교학교는 제일 필요하면서도 제일 잘 할 수 있는 준비된 단계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유 교수는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60~80년대 교육이 획일화돼 어떤 분은 요즘 아이들에게 하는 교육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다양하게 지어진 아이들의 다양성을 묵살하는 교육이 아닐까 한다고도 말하는 것을 들었다"며 "사회가 인성교육을 하기에 어려운 것 같다"며 기독교교육의 역할을 강조했다.

유 교수는 "도덕적인 결정을 한다고 할때 세상의 경험이 늘 바뀌어서 확장되고 나 자신이 거기에 순응해 가야 하는 존재로 이해한다면 확장되어가는 비인격적인 실제 안에서 옳고 그름을 어떻게 판단하겠나"며 "맥킨 타이어가 말한 것처럼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 '내가 무슨 이야기에 속해 있는가?'하는 질문에 우리는 '내가 누구이고 이 세상이 어디로부터 왔고 어떻게 회복이 가능할 것이냐, 그 안에서 내가 어떠한 역할을 할지' 하나님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 기독교교육으로 민족의식·세계화 의식 고취시켜야 

기독교교육의 또 다른 과제는 뭘까. 유은희 교수는 민족의식과 세계화 의식 고취도 과제로 제시했다.

유 교수는 "기독교학교 역사를 볼 때 초창기는 민족의식이있어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던 교육이라고 생각한다"며 "스크랜턴 여사가 이화학당을 처음 만들 때 '나는 더 나은 한국인'(The better Korean)을 만들기 원하지 미국 사람을 만들기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글이라는 것을 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때 성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한글의 존귀함까지 담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세계화'에 대해서 말하면서는 "기독교 자체가 세계를 품고 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걸 축하할 수 있고, 또 안타까워하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다. 글로벌 에듀케이션(Global Education)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계 여러나라 사람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고 기독교인은 이 땅에서 성육신돼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유은희 교수는 기독교학교가 글로벌한 인재를 키워내지만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역할도 감당해야 함을 언급했다. 덧붙여 그는 기독교대안학교, 공교육 안에서의 기독교사립학교가 함께 고군분투하며 각자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주문했다.

#유은희교수 #한국크리스천스쿨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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