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을 걷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3) 혈루증을 앓던 여인

오피니언·칼럼
편집부 기자
원솜니 목사(올리브교회 담임)   ©올리브교회

본문: 마가복음 5:21~43

존 그레이(John Gray)라는 작가는 자신의 저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을 통해 남녀의 심리적 차이에 대해서 기술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은 사람이면서도 서로 생각하는 것이 틀려 마치 서로가 다른 별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남녀를 정신적인 면만이 아닌 육체적으로도 뚜렷한 성별의 차이를 세우셨다. 이처럼 뚜렷한 차이가 나도록 인간을 지으신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가 교만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협력해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

이렇게 남녀가 다르다 보니 서로가 경험하는 것도 차이가 난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 점들이 생기게 된다. 여성들은 왜 남자들은 액션영화, 자동차, 전자제품, 정치와 같은 일에 열심을 내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어쩔 때는 단순한 그들의 모습에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들것이다. 반면 여성들은 더 비밀스러운 그들만의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다. 도저히 그 사용처를 알 수 없는 수많은 화장품들과 여러 개의 핸드백, 다양한 장신구와 보석 등에 대한 호기심은 남자들로서 이해하기가 힘든 일이다. 그 중에서도 남성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생리와 출산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여성의 고유한 것으로 부여하셨다. 여성들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야속하고 불평등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남성들은 그런 것을 충분히 잘 감내할 수 있는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인 남편, 애인이라 할지라도 여성의 출산시 고통이나 매달 찾아오는 생리통을 이해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런 고통을 모두 아신다. 그래서 먼 옛날서부터 고통 받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율법 속에 마련하셨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제정하신 이유는 바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름에 따라 율법은 원래의 기능을 잃고 오히려 사람들을 얽매이게 하는 족쇄가 돼버리고 말았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율법이 하나님을 보호하기 위함 것으로 자꾸만 인식되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일은 종교적인 것에 국한되었고 사람들을 심판하는 잣대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율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종교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다름아닌 율법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에 있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순결하게 믿기 위해서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기 위해 율법을 풀어서 실행해주셨다.

오늘의 주인공 여성은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할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제도적 율법에 무려 12 년 동안 고통 받던 한 여인이다. 본문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그녀가 얼마나 힘들고 비참한 생활을 살고 있었는지를 알아야만 할 것이며 그것을 알기 위해선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주인공 여인의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지만 하혈로 인해서 매우 고통 받고 있었다. 사람들에 따라 편차를 보이긴 하지만 여성에게 있어서 생리는 심한 생리통을 수반하기도 하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여성의 신체에 많은 불편을 끼친다.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니 어찌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겠는가? 하지만 이 여인은 그런 단순한 생리통이 아니었다. 몸에 이상이 생겨 시도 때도 없이 비정상적인 하혈을 하게 된 것이다. 많은 피를 쏟아내면서 이 여성은 매우 큰 고통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물론 당시 여성이라면 반드시 했어야만 했던 결혼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결혼 후에 그런 병을 얻었다면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많은 의사들을 만나러 다녔다. 하지만 수많은 비정상적인 민간요법들로 가득했던 당시의 의학시술들은 병을 고치기 보다는 오히려 많은 고통을 가증시켰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결국 가진 것도 모두다 허비하여서 빈털터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병은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26절)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여성을 힘들게 했던 것은 다름아닌 율법에 의한 사회적 고립에 있었다. 레 15:19-33절은 여인의 유출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그 율법에 의하면 이 여인은 지금 12년동안 부정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의 유출이 있는 모든 날 동안에 그가 눕는 침상은 그에게 불결한 때의 침상과 같고 그가 앉는 모든 자리도 부정함이 불결한 때의 부정과 같으니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다 부정한 즉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레 15:26-27)

그녀의 계속되는 유출은 그녀를 아주 심각하게 만들었다. 여인의 불결함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 수 있었다. 누구든지 그녀와 함께 눕거나 그녀의 의자에 앉거나 그녀를 만짐으로써 접촉하는 자는 부정하게 되고 목욕을 하고 의복을 빨아야 했다. 즉 아무도 그녀의 곁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병으로 인해 사회에서 축출당하였고 문둥병자와 같은 취급을 당하였다. 12년동안이나 사회에서 버려짐을 당한 그 여인의 고통을 생각해보라. 모든 사람이 길거리에서 그 여자를 보면 피해갔고 아이들은 돌을 던지며 놀려댔을 것이다.

과부나 병든 여성들은 마을 밖에서 소외된 삶을 살았다   ©원솜니 목사

하지만 레위기의 율법은 원래 그런 병자들을 사회에서 축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피의 유출에 관한 율법을 보면 피를 흘린다는 것은 몸의 이상을 알리는 징표를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가 병원에서 환자를 격리해서 치료하듯이 유출하는 사람을 격리하는 것은 그 사람의 건강과 치료를 위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위생과 관심이 필요했고 불필요한 활동을 삼가고 안정을 취해야 했으며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여서 그의 심리적인 것도 안정시켜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고려하셔서 율법을 제정하신 것이다. 한마디로 율법에 의하면 그녀는 보호받아야 했고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보호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율법의 정신은 사라진 채 오로지 그런 사람들을 축출해서 구분하는데만 온갖 주의를 집중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율법뿐만이 아니라 당시 로마사회도 월경에 대한 엄청난 미신들이 있었다. 대 플리니우스라(Gaius Plinius Secundus Major)는 사람은 매우 유명한 고대저서인 박물지라는 37권의 백과사전을 저술했는데(AD 77) 그곳에 수록된 월경에 대한 기록은 참으로 어이없을 정도이다. 그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월경'중에 있는 여성이 접촉을 하면 정원의 씨앗들이 마르고 나무의 과실들이 떨어지며 거울의 밝은 표면을 칙칙하게 만들고 철의 가장자리를 흐릿하게 하며, 벌을 죽이고, 철과 동을 녹슬게 한다. 그 여성 근처에 개가 있게 되면 미치광이 개가되고 그 개에게 물리면 몸이 독이 퍼진다. 감염된 옷으로부터 나온 실만으로도 이런 모든 것을 하기에 충분했다. 만약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이 세탁하고 삶은 천을 만지면 그 천은 다시 검게 바뀔 것이다. 이런 기록은 매우 터무니없지만 고대 사회는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과 미신들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여인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라. 소망이 없는 날들이 계속되는 그 때에 그녀에게 한줄기 빛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예수라는 한 랍비가 여러 기적들을 통해서 병들은 자들을 치유한다는 것이다.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도 고치셨다는 소문은 그녀를 매우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분이라면 반드시 날 고치실 수 있으실 거야"라는 확신 속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곳을 달려가보지만 뜻밖에도 어려움을 만났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대부분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자칫 발각이라도 되면 돌에 맞기 십상이었다. 인파 속에 갇힌 예수님을 만나려면 사람들을 헤집고 가야 하는데 그녀가 만지는 사람마다 모두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그 일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사람들이 길을 비켜준다 할지라도 예수님도 그녀를 만지는 순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마을의 큰 손님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여성의 마음은 매우 절박했다. 많은 두려움과 장애물들이 놓여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삶에 대한 강한 의지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계획을 세웠다. 일단 천으로 머리를 둘러쓰고 인파를 헤집고 들어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짝 잡고 나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그녀를 살짝만 닿아도 자신이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그녀는 자신이 예수님을 살짝만 닿아도 정결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마디로 인식의 전환이었다.

유대인의 탈릿(네 귀퉁이에 달린 길게 달린 술이 바로 '찌찟'이다)   ©원솜니 목사

유대인들은 탈릿이라는 겉옷을 두르고 다녔는데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준수하고 그것을 통하여 거룩함을 얻는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치 담요로 보이는 그 겉옷은 남자들의 의복이었다. 하지만 이 의복이 중요한 것은 네 귀퉁이에 달린 찌찟이라는 술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민 15:37-41)

옷을 만지는 것은 옷이 그 주인의 권능을 지니고 있다는 당시의 일반적인 믿음과 관련되어 있었다(행 19:12). 이 여성은 예수님이 실제적으로 권능을 가지신 분이라 생각하였고 그 권능을 자신이 입기 위해선 그 술을 잠깐 터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여인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그녀는 예수님이 실제적으로 엄청난 권능을 소유하신 분이라고 믿었다.

그녀의 믿음은 예수님의 실제적인 영향력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28절) 이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에서 터치를 하면 어플이 실행되는 것처럼 단순한 터치만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입을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터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원솜니 목사

오늘 혈루증을 앓은 여인과 함께 눈여겨보아야 할 인물은 다름아닌 회당장 아이로이다. 그는 사랑하는 딸이 병에 걸렸고 공교롭게도 그 딸은 12살이었다(42절). 혈루증 여인은 12년동안 병을 앓아왔다. 성경은 열 둘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이 둘을 비교해서 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야이로는 예수께서 자기의 어린 딸에게 손을 얹어주기를 원하였다. 그렇게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야이로처럼 예수님께 떳떳하게 요청할 수도 없고 다가설 수조차 없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손을 얹어주시지는 못해도 자신이 그 옷깃을 건들기만 하면 예수님의 권능을 힘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대로 되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 미는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고 만졌지만 그들에게는 권능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직 이 여인에게만 권능이 나타났다. 그것은 다름아닌 예수님의 실제적 힘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똑같은 터치를 우리는 구별할 수 없지만 심령을 감찰하시는 주님은(잠 16:2) 그 수많은 터치 중에서 어떤 터치가 자신을 믿고 내뻗는 믿음의 터치인지를 구별하신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이 물음은 그 분을 향해있던 수많은 터치를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오늘 여러분이 주님을 향해 뻗는 터치의 손길은 과연 무엇을 위해 내뻗는 것인가? 대한민국은 과거에 비해 수많은 교인들로 가득하지만 실제적인 주님의 역사는 점점 줄어간다. 이는 다름아닌 주님의 권능을 믿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주님은 나의 삶을 이끌어가시고 변화시키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분이지만 현대의 수많은 자들이 그 분의 권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과연 예수님은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존재이신가? 여러분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물질적, 사회적, 신변적인 어려움에 예수님이 미치실 영향력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예배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이 단지 마음의 위로만을 주는가 아니면 당장 내일의 삶에 강한 영향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가?

주님의 놀라운 권능은 오로지 그 힘을 믿는 자에게만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배경도 필요 없고 신앙의 연륜도 필요 없다. 회당장이 됐든 모든 사람이 피하는 사회의 왕따가 됐든 우리 주님에게는 그런 구분이 없다. 이전 삶의 자격이 충분치 못해도 누구든 주님의 권능을 맛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오로지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믿음을 갖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군중으로 둘러싸인 예수님께 다가서고자 했던 여인의 선택은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다. 여전히 그녀가 "그러다 잡히면 어쩌지?"하고 고민하고 있었다면 그녀는 결코 예수님께 다가설 수 없었다. 그녀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계획을 실행에 옮겼고 그 계획은 제대로 성공하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드신 분도 예수님이셨다. 자신을 치료해주신 분께서 자신을 더 심한 곤경에 빠뜨리신 것이다. 누가 그를 의도적으로 만졌다고 하시면서 행렬을 멈추시고 그 사람을 찾으신 것이다(30절). 그냥 모른체하는 것이 오히려 그 여인에게 더 나은 일인데도 말이다. 순간 그 시끄럽던 행렬이 조용해졌다. 계속 두리번거리는 예수님의 시선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도 옮겨졌다. 몸이 치유된 것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그 여인은 매우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혼자 움직여 그곳을 빠져나갈 수도 없었고 자칫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나오면 낭패였다. 두려움에 휩싸인 그녀는 예수님께 자진해서 나가 엎드려 자신이 한 짓을 모두 고백했다. 자신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와 그 일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를 구했다. 또 한번 죽음을 각오한 선택을 내린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주님께 자신의 두려움을 모두 내어놓고 고백했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이다.

뜻밖에도 주님께서는 그녀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완전하게 치유하신다. 이미 터치를 했을 때 몸이 나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완치되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몰래 했다는 두려움으로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그녀가 주님 앞에 두려운 가운데서도 용기를 내어 나왔을 때 주님의 완전한 치유가 이루어졌다. 구원, 평안, 병에서 놓임. 그야말로 그녀가 바라던 모든 것이 완전하게 예수님의 선언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 야이로는 어땠는가? 딸이 죽었다는 소식에 절망감이 몰려들었고 딸을 잃은 슬픔은 곧 두려움으로 몰려왔다.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예수님이 옆에 계시고 지금 자신의 집으로 친히 손을 얹기 위해서 가시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두려워하고 그것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예수님이라면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지금 그에게 들이닥친 두려움은 그 믿음을 좌절시키고 있다.

이처럼 우리 신앙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삶에 대한 어려움과 그로 인해 생기는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곁에 계신 예수님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막 4장 40절 에서도 예수님은 풍랑으로 인한 두려움이 그들이 믿음이 없음을 드러냈다고 책망하셨다. 때때로 삶에 불어 닥치는 위기는 우리를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들고 오감을 마비시킨다. 앞에 닥친 문제들로 인해 당황하고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주저앉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암담한 현실이 눈앞에 닥쳤을지라도 해결책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주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가장 두려움이 엄습할 때 오로지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모든 것을 아뢰면 주님의 완전한 치유와 권능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주님께서 곁에 계심에도 좌절했던 야이로는 좀 전에 보았던 혈루증 앓던 여인의 담대함을 보고 배워야만 했다. 예수님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자신에게 나왔던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셨는데 그 여인을 대하는 마음은 야이로가 자신의 딸을 위해 품은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공원에서 부모님을 잃어버려 두려움에 울고 있던 아이가 다시 부모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느끼는 안도와 평안함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안에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선 우리 주님 앞에 엎드려 모든 것을 고할 때 가능한 것이기에 우리는 당장 문제를 기도로서 아뢰고 그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리고 그 결과로 찾아오는 평안함은 그야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셋째, 예수님은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만드시는 분이시다.

서두에도 이야기했듯이 본문에서 대두되는 이 여인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율법에 의해 그녀가 부정하다고 규정된 것이었다. 야이로의 딸은 또 어떠한가? 아픈 상태에서는 괜찮았지만 딸이 숨을 거두었으므로 싸늘한 시체로 남은 야이로의 딸은 완전히 부정한 상태가 돼버리고 말았다. 당시의 모든 자들은 그런 부정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 부정함이 자신에게 옮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부정함에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인간의 부정함으로 인해 자신의 거룩함과 순결함이 결코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원래 율법은 부정한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으로부터 부정한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제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종교적 예식과 형식들은 사람을 지키기 보다는 하나님의 거룩성 만을 드러내는데 더 집중했다. 혹시나 자신들의 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성이 손상될까봐 율법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격리하고 추방시킴으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전하려고 노력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율법은 종교적인 규정과 형식으로만 남아 사람들을 구분하고 배척하는데 이용되었다.

오늘날의 교회도 점점 이런 유혹에 빠지고 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안에 구원이 있으며 그분으로 인해 부정한 인생들이 정결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아주 형식적인 것에 둘러싸여 사람들을 구별하고, 각종 예식과 복잡한 교리들로 타공동체와 다른 정체성과 구별됨만을 강조하려고 노력한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이 창궐하게 되자 혹시나 교회가 무너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과연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선 교회를 죽일 수 있을까? 인간들이 스스로 세운 교회라면 그것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는 결코 악에 의해서 멸망되거나 부정하게 되지 않는다. 거짓세력들은 결코 진실한 교회를 더럽히지 못한다. 하나님의 거룩성 또한 우리의 복잡한 예식과 교리 등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체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거룩을 지켜낼 수도 없다. 그런 일은 우리의 능력 밖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중요시 해야 할 것은 거짓세력에 두려워하며 지내는 것도, 복잡한 교리를 앞세우는 것도 아닌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그분과 함께 깨끗함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하나라도 더 실천하는 것이다. 점점 구별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삶의 끝자락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이 생겨났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그런 사람들에게 가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당연히 그런 자들에게 다가가야만 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위대하신 권능으로 부정한 것을 깨끗게 하시고 사람들을 해방시키시며 모든 상황과 관계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셨다. 그러한 승리의 길은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위험을 무릅쓰며 그분과 함께 날마다 죽기를 각오하는 담대한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이런 주님을 닮은 삶이 모든 한국 크리스천들의 삶 속에 실현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원솜니목사 #혈루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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