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살기에서 ‘충만하게’ 살기

오피니언·칼럼
칼럼
이경애 원장(목회상담전문가)
이경애 박사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는 아마도 ‘구원’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영혼 구원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왔고, 근래에는 몸과 정신의 구원을 포함하는 ‘전인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원은 죄와 죽음을 주관하며 공중의 권세를 잡은 채 인생들을 향해 악하게 역사하는 세력으로부터 (엡 2장 2절), 완전하고 안정된 아버지의 나라로 믿음과 삶이 이양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독교인에게 구원받는다는 것,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가장 우선으로 요구되는 기본적인 신앙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이 구원은 단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출되어 생명과 삶이 연장되고 보호받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신학자들이 언급한 소위 말하는 ‘소극적 구원’만으로 기독교의 구원을 설명하는 것은, 구원의 의미를 축소 시킨 것이다. 소극적 구원이란 일반적으로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는 것, 죄로부터의 탈출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믿음으로 받는 구원, 이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입는 구원, 다시 말하면 ‘칭의(稱義)’와 유사한 의미인 것이다. 이 구원은 신앙의 출발이지만 심리 치료적 관점에서 은유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마이너스에서 제로에 이른, 다시 말해서 죽음의 상태를 벗어난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과 영혼이 얼어붙어 기능할 수 없는 인생들이 심리치료를 통해 얼어붙은 마음이 녹고, 자신을 총체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자존감 형성에 필수적인 시작점이 된다. 인생들에게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필요하듯이, 심리적 상태가 결핍 상태에서 기본적 충족 상태에 이르는 것은 성장 과정의 필수적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이러한 소위 소극적 구원에 이르렀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적극적 구원’이 필요하다. ‘성화(聖化)’와 유사한 의미를 갖는 이 적극적 구원은 단지 ‘결핍의 충족’에서 끝나지 않는 ‘성장을 향한 지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은유적 표현을 빌린다면 제로에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받은 존재라는 신분 변화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정성스럽게 행하여 가는 일생의 삶의 과정 말이다. 단지 구원의 은혜에의 자족이 아닌, 적극적 선을 행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향한 주체적 존재로서의 성장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당면한 문제들 앞에서 이 모든 문제 해결을 원하고 상황의 개선을 간절히 원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성장은 단지 문제 해결이 된 상태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의 확인, 선한 존재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적극적인 헌신, 나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파되는 거룩한 삶의 여정,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할 뿐 아니라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요10장 10절). 간신히 겨우겨우 살기 위해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풍성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성탄을 기다리는 이 때 여러 외적 내적 상황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 인간적 결핍을 보게 하고 이 때문에 우리는 위축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되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다시 한번 기대하며 묵상해 보자. 퍽퍽한 마음으로 겨우겨우 보내는 행사로서의 성탄절이 아닌, 아기로 오셔서 전 인생을 구원하시고 장차 만왕의 왕으로 오실 풍성한 우리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말이다. 그리고 이 안에서 나의 인생을 풍성함으로 기대해 보자. 예수님은 우리가 이러한 기대를 하고 기뻐하도록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이경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