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대통령도 국민, 방어권 보장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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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지난 10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 방어권 보장을 권고하는 안건을 일부 수정해 의결했다. 탄핵 심리 시 엄격한 적법절차 준수와 수사기관의 불구속 수사 원칙을 강조한 게 핵심이다.

이날 열린 인권위 제2차 전원위원회에 가결된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적 위기 극복 대책 권고의 건’은 김용원 상임위원 등이 발의한 것으로, 헌법재판소가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 과정에서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김 상임위원 등이 이 안건을 상정한 건 윤 대통령이 구속 상태로 헌재 탄핵 심리와 재판에 임하는 것이 개인의 방어권을 현저히 침해한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일반 피의자도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해 불구속 수사가 원칙인데 하물며 대통령을 불법적으로 체포 구금 수사하는 것이 인권 침해의 요소가 있으니 방어권 보장 차원에서 불구속 심리를 진행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권고안건이 발의돼 수정 가결되기까지 한 달 가까이나 시간이 걸렸다. 당초 지난달 13일 제1차 전원위원회를 열고 해당 안건을 논의하려 했으나, 인권위 직원들과 진보 시민단체 회원들의 물리적 방해로 회의 소집 자체가 무산됐기 때문이다.

어렵게 회의를 재개한 이 날도 진통은 계속됐다. 회의 시작부터 찬반 의견이 팽팽히 맞서 3시간여 공전을 거듭하다 문안 일부를 수정한 후에야 겨우 통과됐다. 안건에 공동 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가 철회한 강정혜 비상임위원이 “주문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며 일부 문장의 삭제를 요청했고, 찬성 측 위원들이 이에 동의하면서 거수투표가 이뤄져 재적 위원 11명 중 찬성 6명, 반대 4명으로 가까스로 가결된 것이다.

그런데 이 건을 가결하는 데 무려 한 달이나 시간이 필요한 일인가 싶다. 성 소수자 등 다른 인권 문제에 있어선 일사불란하게 권고안을 낸 인권위가 대통령의 인권 침해 문제에 있어서만은 유독 다른 기준으로 대하는 건 역차별이 아닌가.

진보 시민단체가 회의장을 막아선 건 그들이 윤 대통령의 탄핵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인권 문제와 관련해 누구보다 공정하게 업무에 임해야 할 인권위 직원들은 다르다. 직무가 정지돼 누구보다 약자 신세가 된 대통령의 인권 침해와 관련한 사안을 다루기 위한 회의가 인권위 직원들의 물리적 방해로 한 달 가까이 공전하게 된 건 인권위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부끄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인권은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권리다. 그런데 피의자 신분의 대통령이 불법적으로 체포돼 구속 상태로 공수처 수사와 헌재 탄핵심리에 임하는 상황이 과연 인권 차원에서 온당한 처사인가. 일국의 대통령이 시정 잡범만도 못한 처우를 받는 비상식적인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지는 못할망정 회의 소집 자체를 힘으로 막아선 건 국민의 인권을 전담하는 독립된 행정기관으로서의 기본 의무를 망각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1조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한 목적에 대해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에 이바지한다고 돼 있다. 그러니 대통령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보호받아야 할 인권이 있고 인권위는 누구든 인권 침해에 해당하는 사안에 대해 얼마든지 시정 권고를 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가 그동안 사법 및 공권력에 관해 시정 권고를 내린 사례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고소인의 주장만으로 긴급체포를 결정하는 것이 개인의 신체 자유를 침해한다며 시정을 권고한 적이 있다. 이런 전례에 비쳐 볼 때 수사 권한이 없는 공수처가 윤 대통령을 불법 체포돼 구속한 건 개인의 신체 자유 침해에 해당하므로 인권위가 마땅히 시정 권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날 회의장 안에선 위원들 간에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통치행위로, 이를 탄핵 사유로 한 탄핵 재판은 국내는 물론 미국이나 독일 등 해외 선진국에서도 사례를 찾기 힘들다”는 찬성 측 주장과 “인권위가 정치적 사안에 대해 개입해선 안 되며 헌재의 탄핵 심리 결론이 나기 전에 인권위가 권고안을 내는 건 계엄을 옹호하는 행위”라는 반대측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회의장 밖에선 자유인권실천국민행동과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 등 보수단체와 진보단체 회원들이 모여 상반된 목소리를 냈다.

이처럼 민주사회에서 각자 찬반 의견을 개진하고 서로의 주장을 내놓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하며 심도 있는 토의 끝에 결과를 도출하기까지 무려 한 달여 시간을 허비했다는 게 문제다.

인권위 회의가 비민주적이고 돌출적인 방해 행위로 지연되는 바람에 이날 가결된 윤 대통령의 방어권 보장 권고안은 빛을 잃고 말았다. 헌재 탄핵심리가 이미 막바지에 이른 데다 윤 대통령이 인신 구속된 지 25일이나 지나 침해당한 기본권을 회복하기가 사실상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인권위의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리 방어권 보장 권고안은 남녀노소 지위 고하와 상관없이 누구도 차별·배제 없이 보호받아야 할 인권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다만 적기를 놓치는 바람에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