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인권위 파행사태, 인권의 反 인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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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방어권 보장 관련 안건 등을 다루기 위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전원위원회가 이에 반대하는 이들의 방해로 무산됐다. 인권위는 일부 위원이 발의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 방어권 보장을 포함한 국가 위기 극복 대책 권고 건을 의결 안건으로 상정, 13일 전원위에서 다루려 했으나 안건 상정에 반대하는 이들이 안창호 위원장과 일부 의원의 회의장 입장을 막아서면서 결국 회의가 파행되고 말았다.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 방어권 보장 관련 안건은 지난 9일 인권위 김용원 상임위원과 한석훈·김종민·이한별·강정혜 비상임위원이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의 위기 극복 대책 권고의 건’이란 이름으로 발의했고, 안창호 위원장이 전원위 상정을 최종 결정했다.

안건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장 등에게 계엄 관련 재판에서 체포·구속을 엄격히 심사하고 보석을 적극 허가할 것, 검찰·경찰·공수처 수장 등에게 불구속 수사를 할 것과 구속영장 청구를 남발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또 한덕수 국무총리에 대한 탄핵소추를 철회해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도록 하라고 국회의장에게 권고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인권위가 윤 대통령에 대한 방어권을 보장을 포함한 문제들을 정식 안건을 다루려던 건 기본권 보장 차원이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헌법에 보장된 인간의 권리를 지키라는 상식적인 선의 권고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걸 논의조차 하지 못하게 물리력으로 막은 건 납득하기 어렵다. 인권위 직원 100여 명이 회의 저지에 나섰다고 하는 데 인권위의 현주소를 말해 주는 부끄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이날 자유인권실천국민행동과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 등 보수 성향 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윤 대통령의 방어권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윤 대통령 방어권 관련 안건을 다루려던 인권위 전원위가 이에 반대하는 이들의 물리력 행사로 무산된 데 대해 “언제나 탄압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이들의 인권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온 이들이 막상 자신들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대통령에 대해서는 인권을 배제하는 야만적 모습”이라고 규탄했다.

이날 인권위 회의를 막아선 건 인권위 직원들과 일부 진보단체 회원들이다. 이들은 회의장 앞 복도에서 ‘내란동조 세력은 국가인권위를 당장 떠나라’ 등의 피켓을 들고 “안건을 철회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일부 진보시민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 옹호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 독립기관이 인권을 짓밟는 내란 세력을 옹호하는 편향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들이 인권위원장과 위원들을 “인권 편향적”이고 “내란동조”라고 주장한 근거가 무엇인지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날 인권위 전원위가 다루려던 안건은 헌법재판소장에게 탄핵심판 심리 과정에서 윤 대통령의 방어권을 철저히 보장하라는 게 핵심이다. 계엄 선포 관련 다수 형사소송 진행을 고려해 심판절차의 정지를 검토할 것, 훈시 규정인 180일의 심판 기간에 얽매이지 말 것 등을 권고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사법부를 상대로는 체포나 구속영장 청구를 엄격히 심사하라고 권고하고, 수사 당국에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기초해 불구속 수사할 것과 체포나 구속영장을 남발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이런 내용들은 기본 인권 수칙에서 벗어난 것으로 볼 수 없다. 대통령이 아니라 절도 강도범에게도 적용되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대통령에겐 적용되지 않는 기이한 상황에 대해 인권위가 문제를 제기하고 권고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회의장을 가로막은 이유가 이게 다는 아닐 것이다. 인권위가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대해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고유 권한인 만큼 대통령이 계엄 선포를 결심한 이상 세부적인 계획 수립은 잘못도, 비난받을 일도 아니”라고 한 부분과 “지금까지 국회가 야당의 의석 숫자를 무기 삼아 정당한 사유 없이 탄핵소추안 발의를 남용해 온 게 오히려 국헌문란”이라고 지적한 내용이 이들의 심기를 건드린 결정적인 요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문제는 안건을 발의한 위원들의 판단일 뿐이다. 회의 과정에서 논의를 통해 얼마든지 가다듬어질 수 있고 표현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으로 회의 자체를 틀어막은 건 비이성적인 폭압이다.

인권위는 정권이 바뀌고 위원장이 바뀌었음에도 지난 문재인 정부 때 인권위의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 증거가 지난해 11월 인권위 국정감사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다.

인권위 국정감사에서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인권위의 보고서에 ‘차별금지법’ 추진이 ‘22대 국회의 역사적 행보’로 규정된 것과 국회의 협조를 요청하는 표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반대 의견이 다수인 차별금지법에 대해 “국민 90%가 찬성 지지하는 법안”이라고 버젓이 기록된 것을 지적하며 “인권위원장 취임 후 첫 국회 업무 보고에 이런 내용이 걸러지지 않고 올라온 것이 과연 위원장 의사인지, 실무자 의견인지 확인하라”고 했다. 이에 대해 안 위원장은 본인도 모르는 내용이라며 당황해하는 모습이 그대로 영상에 비쳤다.

이 장면은 그동안 인권위가 인권활동가들의 독무대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의 하나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평택 미군기지 반대 운동, 용산 참사, 쌍용차 해고 투쟁, 세월호 참사 등 현장을 지휘하던 인권활동가를 사무총장에 앉힌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가 안 위원장 부임 후 지난해 10월 사임했다지만, 그동안 인권위가 다수의 인권을 역차별하고 성소수자 인권에 매몰되는 등 정상적인 인권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인권위 전원위 회의가 직원들의 물리력 행사로 파행된 건 역사에 남을 수치스러운 사건이다. 찬반 의견 표시는 할 수 있어도 회의 자체를 막는 행위는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오는 20일 예정된 전원위에서 상정안건과 함께 이 문제를 다뤄 반인권 행사에 휘둘리는 인권위의 오명을 반드시 씻어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