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전쟁 범죄자 편에 서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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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우크라이나를 전격 방문해 젤렌스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우크라이나의 안보·재건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자 야권은 윤 대통령이 나라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한복판으로 끌어들였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지난 주말 집중호우로 다수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지하차도 침수 사건에 빗대는 의원까지 있었다.

러시아의 침공에 속수무책 당해야 했던 우크라이나의 처지는 73년 전 북한이 일으킨 6·25 전쟁으로 초토화됐던 우리나라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우리는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젊은 군인뿐 아니라 수많은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힘들게 일군 모든 가산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됐다. 나라마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완전히 빼앗길 뻔했다. 미국과 유엔이 파병한 16개국 군인들이 목숨 걸고 싸워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과거에 우리가 당한 고통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나라에 우리 대통령이 찾아가 자유와 평화를 위한 연대를 표시하는 건 박수를 받을지언정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더구나 러시아의 심기를 의식해 대통령의 외교적 행보까지 걸고 넘어지는 건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 전쟁의 참화를 극복한 우리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야권에선 “러시아를 적대국 만들 거냐” “전쟁의 불씨를 한반도로 끌고 왔다”며 비판을 쏟아냈다. “직접 전쟁터까지 방문했으니 의도적으로 러시아를 적대국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러시아와 안보·경제적 이해관계를 감안해 신중히 접근할 필요는 있다. 그건 외교의 정석이다. 러시아는 과거 공산주의 국가의 맹주였으나 구 소련이 해체되면서도 우리나라와도 정식 수교를 맺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15번째 교역 상대국이란 관계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러시아의 눈치를 살피느라 자유 민주주의 질서를 훼손하는 전쟁과 반인륜적 폭력 행위에 대해 모른 체할 순 없다. 행여 러시아가 북한을 자극할까 봐 겁나서 주위만 빙빙 돌며 당당하게 처신하지 못한다면 자유·민주의 가치를 표방하는 중추 국가로서 책무를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아도 싸다.

자유 진영 국가수반들의 우크라이나 방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자유주의 진영 45개국 이상의 정상들이 한 번 이상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 아시아권에선 기시다 일본 총리가 지난 3월 방문한 바 있다. 모두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사회의 연대와 결속을 다지는 의미다.

G7과 나토 국가들 모두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경제 교역 규모도 우리나라 수준 이상이다. 그런데도 하나같이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고 재건하기 위한 국제 연대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그 어느 나라 야당도 이런 당연한 외교 행보에 어깃장을 놓은 일이 없다.

우리나라는 G7에 속한 나라는 아니지만 이미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더구나 과거 유엔 참전 16개국의 도움으로 잿더미 속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오늘의 경제 번영을 이뤘다. 그런 위치에서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하는 건 논란거리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우크라이나에 비전투 관련 지원만 하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무기 지원 문제는 일절 거론하지 않고 인도적인 지원만 약속했다. 무얼 근거로 “전쟁의 불씨를 한반도로 끌어들였다”고 하는지 납득이 안 된다. 이런 식의 비판은 자기 부정일 뿐이다.

야당의 비판은 수해로 여러 명이 목숨을 잃은 재난 참사로까지 이어졌다. 윤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이 충청권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수해 피해가 발생한 시점과 겹치면서 수해 방지와 복구에 힘써야 할 대통령이 무얼 한 것이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을 놓고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지하차도로 밀어 넣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은 건 분명 선을 넘은 것이다. 아무리 야당이라도 국가적인 재난까지 정쟁의 도구로 삼는 건 곤란하다. 침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국민과 유족까지 정쟁에 끌어들여서 어쩌자는 건가. 국민은 매번 이런 식의 정쟁에 신물이 날 지경이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의 수준이어선 이 정도여선 안 될 것이다.

야당의 존재감은 윤 대통령을 흠집내는 데서 드러나는 게 아니다. 대통령과 여당의 잘못을 지적하고 견제하되 딴지 걸어 넘어뜨리는 사명으로 여기면 안 된다. 특히 외교 문제는 초당적으로 협력할 때 국격과 함께 야당의 위상도 동반 상승한다.

러시아는 지금 남의 영토를 침략하고 민간인 살상도 서슴지 않는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지금 전 세계에서 러시아 편을 들고 있는 나라가 중국과 북한 외에 몇 나라나 되나. 이런 현실에서 야당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러시아, 중국 등의 눈치를 살피며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라고 요구할 순 없다. 그건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자유 민주주의를 포기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전쟁 범죄자 편에 서라고 등 떠미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의롭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