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말 바꾸기에 5년 허송세월… 원전 생태계 초토화

文, “60년간 원전을 주력 전원으로” 발언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5일 오전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현안 점검 회의에서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으로 부터 보고 받던 모습.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5일 "향후 60여년 동안 원전을 주력 기저전원으로서 활용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탈원전 정책 기조의 변화 가능성에 관심이 쏠렸다.

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 불안이 가속화한데다 대통령 선거 직전인 점을 고려할 때 '면피성 발언'으로 지적받고 있지만, 원전을 기저전원이라고 강조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업계·학계 등에서는 지난 5년간 쪼그라든 원전 생태계 회복을 위해서는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 등 실질적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탈원전 선언 이후… 건설 취소·수명 연장 중단

29일 정부에 따르면 지난 2017년 6월 19일 문 대통령은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탈원전을 선언했다. 현 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인 고리 1호기 영구 정지를 시작으로 탈원전 정책에 속도를 냈다.

정부는 그해 마련된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신한울 3·4호기를 제외하고, 건설을 중단했다. 경북 울진의 신한울 3·4호기는 지난 2015년 건설이 확정돼 2022년, 2023년 각각 준공될 예정이었다.

아울러 정부는 지난해 초 신한울 3·4호기 사업기간을 2023년 말까지 연장, 공사 재개 여부를 차기 정부로 넘겼다.

같은 해 3월에는 경북 영덕군에 건설 예정이던 천지 원자력발전소의 지정 철회가 확정됐다. 영덕군은 신규 원전 건설 취소에 따른 직·간접적 경제적 피해 규모가 3조7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정부가 지난 2020년 말 공개한 제9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는 오는 2034년까지 노후 원전 11기의 수명 연장(계속 운전)을 하지 않고 중단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돌연 원전 중요성 강조… 생태계는 이미 악화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임기 말 돌연 원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듯한 발언을 하며 파장이 일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현안 점검 회의'에서 "원전이 지속 운영되는 향후 60여년 동안은 원전을 주력 기저전원으로서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며 신한울 1·2호기, 신고리 5·6호기의 정상 가동 점검을 주문했다.

해당 발언을 두고 업계 안팎에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공급망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대선을 앞둔 상황 등이 맞물려 면피성 발언을 한 것이란 지적이 나왔다.

건설이 중단된 신한울 3·4호기, 기존 원전 수명 연장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아, 실질적인 변화에 대한 주문은 없었다는 것이다.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국내 관련 산업계와 인재 육성 기반 등은 크게 약화한 상황이다. 원전 부품 업체들은 이번 정부 들어 신고리 5·6호기 납품을 끝으로 관련 수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기업은 원전 외에 가스터빈 등 사업도 겸하고 있지만 중소기업은 원전 건설 중단으로 벼랑끝에 몰렸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한국원자력산업협회의 '2019년도 원자력 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원자력 산업 매출액은 지난 2016년 27조4513억원에서 2019년 20조7317억원으로 25% 가까이 감소했다. 전공 재학생 수도 지난 2017년 3095명에서 지난 2020년 3월 기준 2190명으로 10% 이상 감소했다.

◆공기업 재무 악화·수출 경쟁력 약화까지

탈원전 기조가 공기업의 재무 악화로 이어졌다는 비판도 나온다. 원유, 천연가스 등 연료비가 폭등했지만 탈원전 비판을 피하고, 국민 부담을 고려해 전기요금을 억누르며 한국전력의 적자가 심각해졌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탈원전 정책의 일환으로 신재생에너지의무공급(RPS) 비율이 늘어 원전보다 비싼 액화천연가스(LNG)의 발전 비중이 확대된 점도 한전의 비용 부담을 키웠다. 한전은 지난해 5조8601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는데, 이는 금융위기로 국제유가가 치솟았던 2008년(-2조7981억원)의 두 배 수준이다.

원전 수출 경쟁력이 약해졌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국내 생태계 기반이 약해지며 해외 수출 경쟁력도 타격받은 가운데, 지난해 말 정부가 발표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에는 원자력이 친환경 에너지에서 제외됐다. 이는 탈원전 기조에 따라 정책의 일관성을 위한 결정이다.

이를 두고 관련 업계와 학계 등에서는 정부가 국내에서 신규 원전 건설은 하지 않지만 수출은 지원한다고 밝혀왔는데, 수출 초기 자금 조달을 위한 금융 지원을 막았다고 비판했다.

노동석 서울대학교 원자력정책센터 연구위원은 최근 한국원자력산업협회의 월간 발간물에서 "국내기업이 엘바다 원전 건설에 참여할 때 자금을 동반해야 한다면 녹색분류체계에서 원자력이 배제된 것이 원전기업의 자금 조달에 장애가 되리라는 것은 당연하다"며 "국내 원전 건설은 안 하지만 수출은 적극 추진하겠다는 현 정부의 기조와도 어긋난다"고 짚었다.

◆탄소중립·에너지 위기 속 원전에 관심 커져

이런 가운데 탄소중립으로 가기 위한 에너지 전환 정책 추진 과정에서 재생에너지의 단점을 보완하려면 원자력 발전이 일정 부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원유, 천연가스 등 원자재 가격이 치솟으며 우크라이나 사태 등 지정학적 요인으로 수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단 우려까지 불거지며, 원전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더욱 힘이 실렸다.

유럽연합(EU) 등에서는 이미 '원전 회귀'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다. EU는 이달 초 녹색분류체계 최종안에 방사성 폐기물 처리를 위한 자금과 부지 확보를 조건으로 원전을 기후 친화적 발전에 포함시켰다.

앞서 지난해 말에는 에너지 정책을 이끌어가는 국내 공기업 사장들이 잇따라 탈원전 정책과 각을 세우는 듯한 발언을 보태며, 정책 기조 변화 여부에 더욱 관심이 모아졌다.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최고경영자(CEO)로서 신한울 3·4호기 건설을 재개해 원전 생태계의 숨통을 터줬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 정승일 한전 사장은 같은 해 11월 기자간담회에서 "더 많은 원전 비중이 바람직하다는 국민 의견이 대다수이고 국민적 공감대가 있다면 그때 다시 논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관련 업계 "이제라도 재검토해야… 신한울 3·4호기 재개해야"

관련 업계·학계 사이에서는 탈원전으로 인한 막대한 사회적, 경제적 손실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정책 기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진정한 생태계 회복을 위해서는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가 필요하다는 주문도 이어진다.

한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대통령의 원전에 대한 인식은 바뀐 것 같지만, 신규 원전을 추진한다거나 계속 운전을 한다는 내용은 없어 실질적 내용은 변한 게 없는 감언이설"이라고 말했다.

정동욱 한국원자력학회장(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은 "2030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는 원전의 계속 운전 없이는 달성이 어렵다"며 "대통령의 이번 발언과 정책 방향 간 정합성을 위해서는 차기 정부의 부담도 줄일 겸 신한울 3·4호기 재검토를 지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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