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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8 (월)

"순수한 것, 신뢰라는 본래의 것 동경해 응답하라에 환호"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saoh@cdaily.co.kr)

입력 2016. 02. 16 15:36  |  수정 2016. 02. 17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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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조직신학회 회장 김재진 박사(6)

한국조직신학회 회장 김재진 박사
▲한국조직신학회 회장 김재진 박사 ©오상아 기자

 [기독일보=신학] 지난해 10월 한국조직신학회 신임회장으로 김재진 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원 원장)가 선임됐다.

김 박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1년 앞둔 올해, 1973년 스위스 '로이엔베르크 협정(Leuenberger Konkordie)'에 따라 집필된 『개혁된 유럽(Europa Reformata)』을 번역 출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책을 번역 출판하고자 하는 취지를 듣고자, 지난 3일 김재진 박사를 자택에서 만났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편집자 주 : 인터뷰 내용이 긴 관계로 주제별로 게재합니다>

- '응답하라' 시리즈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았습니다. 교수님이 경험했던 순수했던 한국교회 모습들, 다시 회복했으면 하는 모습들이 있으신가요?

인간에게는 세상의 사회가 험악하고 어렵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생존의 욕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어쩔 수 없이 경쟁사회 속에서 남보다 뒤쳐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 인간의 마음 구석에는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러한 경쟁을 하면서, 살지?'하는 질문도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삶의 의미와 관련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삶,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싶은 소원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러한 양심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R. Niebuhr)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사회는 비도덕적이고, 인간은 도덕적으로 살고픈, 혹은 살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특히 기독교인들은 예배 때 설교 말씀을 듣고, 하나님 말씀대로 성실하게 살고 싶은 것이 마음 구속에 있으면서, 세속적인 사회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갈등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용감하게 '삶의 순수성을 지켜가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동경하게 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1970년대 '러브 스토리'라고 하는 유명한 소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 사회 속에서는 부호의 아들과 이민 가정의 가난한 처녀 사이의 연애는 있을 수 없었고,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사회 계층을 뛰어넘어 남-여가 사랑하는 것이 참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고, '러브 스토리'라는 노래도 히트했습니다. 항상 비사실적인 환상적인 내용들이 서민들에게 공감대를 일으킨다는 것은, 역으로 보면 그 만큼 사회가 각박해 졌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응답하라' 드라마는 픽션(Fiction)이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 삶에 지쳐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삶'을 동경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해 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 결혼도 '사랑이 조건이 아니라', 결혼정보회사에서 속된 말로 짝짓기 식 결혼이 유행하지 않고 있습니까?

현대인들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모두 '돈', '명예', '권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탄 마귀에서 동일한 류(類)의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참조 마 4:1-11) 이는 역으로 모든 인간은 항상, 돈, 명예, 권세에 대한 유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순수한 것', '신뢰'라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것이 상실된 것이 바로 현대 한국사회의 문제입니다.

 - 이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신앙적으로 극복하도록 교회에서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이러한 말씀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설교'가 더 난무하고, 또 그러한 말씀을 평신도들이 좋아합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 마치 신앙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앙은 할 수 없음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할 수 있음으로 변화되는 것이지, 인간의 적극적인 사고가 신앙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삶의 목표를 두고 살지 않고, 모두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누리고, 권세를 부리고자 하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기 때문에, 삶의 괴리가 생기는 것이고, 불안감을 가지고,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고, 비교 속에서 상대적 빈곤과 심리적 패배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남들과 비교만 하지 않아도' 자신의 행복지수가 높아질 것입니다. 신앙은 이러한 세속적 가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느냐?'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의 사회문제는 참된 기독교 신앙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외쳤을 때, "아니요. 제가 보기엔 이 사람에게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분명히 예수가 옳다는 것을 외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죄가 없다'고 용기를 내어 외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비겁한 '양심'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거짓된 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도 그 예수와 한 패지?" 라고 베드로에게 여종이 물었을 때, "그래 나도 예수와 한 패다"라고 답변하지 못한 베드로의 비겁함과 같은 것이지요.

최근에 장로교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들이 국정교과서를 반대할 때, K 교수가 동료교수들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는 성명서를 냈습니다. 같은 조직사회 안에서 그렇게 하지 쉽지 않지요. "아니다. 그것 잘못된 거다. 내가 사회학과 출신인데 지금 여러 교과서들을 읽어보니 공산주의 이론들 가득하다"고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소신에 대한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이 신앙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분명 '옳은 것'에 대해서는 '옳다', '틀린 것'에 대해서는 '틀렸다'(마 5:7)라고 말하라고 하였는데, 옛날 사람이나 현대인들이나 이것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성경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고 기록되어 있듯이, 마음에 있는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신앙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것이지요. '옳다'고 생각하면서, '표현하지 않는 것은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을 인간의 '감정'으로 생각한 그릇된 신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를 칼 바르트(K. Barth)가 비난한 것도, 슐라이어마허가 '신앙'을 '의존의 감정'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본회퍼와 바르트는 '신앙'을 행동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본회퍼는 그 젊은 나이에 '틀린 것'은 '틀렸다'고 분명히 이야기하였기 때문에 히틀러 독재정권에서 옥살이를 하였고, 결국 처형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 세상에 대하여 '옳은 것'은 '옳다', '그릇된 것'은 '그르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당대의 집권자들에 의해서 순교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조직 속에서도 이렇게 살기란 '확고한 신앙'이 없는 한 어렵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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