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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화)

[김영주 설교] 내 혀의 재갈 물리기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09. 18 17:06  |  수정 2018. 09. 1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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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 시19, 잠1:20~33, 약3:1~12, 막8:27~38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前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오늘의 본문 말씀은 설교를 앞둔 목사에게는 무척 부담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특히 야고보서의 말씀은 더 그렇습니다.

본문은 '혀를 조심하라'의 제목으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 형제 여러분, 너도 나도 선생이 되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2 우리는 다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그는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첫 마디부터 부담스럽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읽어봅니다.

5 이와 같이 사람의 혀도 몸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a]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큰 손해를 가져옵니다. 작은 불씨가 큰 숲을 태우지 않습니까? 9 우리는 이 혀로 하나님을 찬송도 하고 그분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도 합니다.10 한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말하는 자리에 서기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후회됩니다. 잘 정리되지 않았던 말을 너무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내가 했던 말들을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나는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내 말은 내 삶과 일치했는지?' '말의 일관성은 있었는지?' '내 말은 찬송의 말이었는지 저주의 말이었는지?' 사무실 근처 식당 벽에 게시된 글을 소개합니다. (말 한마디)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은혜로운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합니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줍니다.

설교 제목을 "혀에 재갈 물리기"로 정한 것은 자기반성으로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생각해 보면 제 자신 목사가 된 후부터, 선생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려고 했고, 계몽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지혜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복종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가르치려는 생각이 앞서 성경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문 익환 목사님을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출옥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우리가 주최하는 강연회의 강사로 오셨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생각납니다. "김 목사, 감옥에서 성경을 읽으니까 성경 말씀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어. 설교를 해야 된다는 부담이 없었기 때문일 거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분은 구약학자입니다. 성경을 누구보다 더 매우 많이 읽었을 것이고 또 가르쳤던 분입니다. 그 분 조차도 설교의 부담 없이(즉 가르치려는 의도 없이) 읽는 것과 가르치기 위해 읽는 성경의 의미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말씀을 지혜의 말씀으로 여기고 삼가 조심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동안 했던 제 설교노트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면 제 설교문의 대부분 성경말씀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노력 보다는 설교를 위해 성경말씀을 사용했던 흔적이 많았습니다. 즉 성경 말씀에 내 자신을 내려놓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기 위해 연구하고 묵상했던 것 보다 내 생각과 주장을 위해 성경의 권위를 이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가르치려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말의 실수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좀 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러니 설교는 설교로 끝나게 되고 설교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했던 무수한 설교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혹자들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구약의 본문 잠언(지혜의 호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그 소리를 높이며, 21시끄러운 길머리에서 외치며, 성문 어귀와 성 안에서 말을 전한다. 23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아 서거라. 보아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보여 주고, 내 말을 깨닫게 해 주겠다

지혜는 길가는 사람들을 불러 세우고 광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높이고 성 어귀나 성문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부르고 외치며 전할 뿐 아니라, 깨달을 수 있도록 영을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22 "어수룩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어수룩한 것을 좋아하려느냐? 비웃는 사람들아, 언제까지 비웃기를 즐기려느냐? 미련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려느냐? 24 그러나 너희는, 내가 불러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손을 내밀어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29 이것은 너희가 깨닫기를 싫어하며, 주님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30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내 모든 책망을 업신여긴 탓이다.

지혜의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리석은 자로, 조롱하는 자로, 미련한 자가 되어 그 말씀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비추어 보니까 저도 어리석은 자였고, 시니컬하여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이었고, 미련한 자였다고 반성해 봅니다.

오늘 우리는 말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각종 오락물이나 TV 시사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 하나'하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말 못해서 죽은 귀신 없다.'라는 옛말이 생각났습니다. 말을 매끄럽게 잘 하지 못하는 저로서는 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보는 것을 보면 부럽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말은 절실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논리적으로 머리까지는 다가왔지만, 우리 마음에 까지는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머리와 가슴까지의 거리는 채 30센티미터가 안되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 옮기는 데에는 경우에 따라 한 평생이 걸리기도 합니다.'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스위스의 융 플라우에 올라갔던 적이 있습니다. 자연의 신비를 느꼈습니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한 외국인 부부가 나를 쳐다보면서 내 노래가 다 끝나자 '한 번 더 불러 줄 수 없냐?'고 정중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들의 요청에 약간은 당황하였지만, 저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드려 찬송을 조금 더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찬송을 들은 그들은 매우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들과 저는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저는 한국말로 찬송했고 그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말이었습니다. 단지 저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에 취해 감격하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을 들은 그들이 감동으로 화답했습니다. 그 때 저는 제 인생에 최고의 설교를 했던 것 같습니다. 설교는 가르치고,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19)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설교는 인간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지혜)를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읽습니다.

19 하늘이 하나님의/영광을 선포하고/창공이 그의 놀라운 솜씨를/나타내는구나!

2 낮이 이 사실을 낮에게 말하고/밤도 이 사실을 밤에게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4 그 전하는 소리가 온 세상에 퍼지고/

그 전하는 말이 땅 끝까지 미쳤다. 하나님이 해를 위해/하늘에 집을 지으셨구나.

8 여호와의 교훈은 정확하여/마음을 기쁘게 하고/여호와의 계명은 순수하여/눈을 밝 게 한다.

오늘의 복음서(막8:27-38)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의 장면를 보여 줍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의(rebuke)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자기 이해와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하니,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예수님을 비난했다고 생각됩니다. 즉시 예수님은 베드로를 나무라면서 사탄이라고 질책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질책하셨던 것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 베드로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항의했듯이 예수님이 세상 권력에 의해 무력하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의 일도 잘되게 하고 사후에도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고백은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다른 데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최고의 제자가 된 것은 그의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공동체에서도 지혜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공동체를 갈등의 와중에 빠지게 했던 것 같습니다.

설교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고, 자기가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고, 설교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1:.26-27)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제어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3:13,15-18)"여러분 가운데 지혜 있고 이해력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씨를 뿌려 거두는 열매입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9월 18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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