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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화)

[서진한 설교] “존재와 당위 사이에서”

기독일보 김규진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08. 24 15:51  |  수정 2018. 08. 2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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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 : 왕상 2:10-12, 3:3-14, 엡 5:15-20 요 6:51-58

대한기독교서회 서진한 사장
대한기독교서회 사장 서진한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1.
오늘 성서일과의 구약 본문은 열왕기상 2장 10-12절 그리고 3장 3-14절까지입니다. 이 두 단락을 연결해 놓은 의도는 아주 단순하고 분명해 보입니다. ‘다윗이 죽었다. 그리고 솔로몬이 아버지 뒤를 이어서 왕국을 차지했다. 그리고 솔로몬은 그 왕국을 튼튼하게 세웠다. 어떻게? 지혜를 통해서!’

그 말을 하려고 이 두 본문을 붙여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솔로몬은 이른바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린 날 밤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무얼 주기를 바라느냐고 묻고, 솔로몬은 자신이 부족하고 어리니 백성을 재판하고 선악을 분별하게, 지혜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어렸을 적에, 주일학교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라고 하는 좋은 것을 구했고, 그래서 다른 모든 것도 받게 되었다고,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준비하려고 성서를 읽다 보니까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윗이 죽었다는 구절과,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는 단락 사이에 굉장히 긴 얘기가 있습니다. 무려 36절에 이르는 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긴 이야기는 모두 다 학살과 숙청에 관한 것입니다.

왕이 된 솔로몬은, 이전에 왕위를 차지하려 했던 이복형 ‘아도니아’를 죽입니다. 아우가 왕이 되자, 아도니아는 무서워서, 죽음을 면하려고 성막으로 가서 그 제단의 뿔을 잡습니다. 뿔을 잡는 사람은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솔로몬은 잠시 그를 살려둔 뒤에, 다른 핑계를 들어 죽였습니다.

동생의 칼을 피한 아도니아가, 밧세바에게 아비삭을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비삭은 다윗이 늙어 몸이 차가웠을 때 잠자리에서 그의 몸을 체온으로 따듯하게 했던 처녀입니다. 아도니아, 철없습니다. 솔로몬은 아비의 여자를 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아도니아를 쳐죽입니다.

아도니아를 살해한 뒤에 솔로몬은 당시 제사장 아비아달을 파면합니다. 아비아달은 아버지 다윗과 함께 이스라엘을 지탱해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2인자, 군의 최고 실세 요압을 처형합니다. 요압은 그야말로 그가 없었으면 다윗도 없었다고 할 만큼, 다윗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오랜 심복입니다. 요압 역시 주님의 장막으로 도망가서 성막 제단 뿔을 잡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그 신성한 제단에서 요압을 척살합니다.

이스라엘은 신앙과 군사력으로 유지되었는데 이 둘을 좌우하던 사람들이 파면되고 살해당한 것입니다. 이어서 사울 가문의 시므이가 처형당합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아들 얍살롬의 반란을 피해 도망갈 때,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일에 관련해서 죽게 됩니다만, 어쨌든 사울 가문의 대표적인 사람을 본보기로 처형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러면 힘을 쓸 세력이 없어졌고, 그래서 평정됐다고 볼 수 있지요.

열왕기상 2장 46절은 이렇습니다. “왕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니야에게 명하니, 그가 바깥으로 나가서 시므이를 쳐죽였다. 솔로몬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런 이후에, 솔로몬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지혜를 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 전개가 실제로 그러했든, 아니면 후대의 기자들의 편집과정에서 그렇게 배치했든, 어쨌든 솔로몬은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 살해와 숙청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성서는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2.
어쨌든 우리가 칭송하는 솔로몬의 지혜는 피의 숙청 위에서 시작됐습니다. 다윗은 전쟁과 살육으로 왕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적들을 쳐부수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경쟁자와 위협분자들을 숙청하고, 그렇게 하여 확고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왕국을 풍요롭게 했습니다. 우리 역사만 아니라, 세계의 고대 역사에서, 위대한 왕이 출현하면, 그는 전쟁을 통해 주변 강대국의 세력을 격파하여 영토를 넓히고, 그의 아들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나라를 풍요롭게 만듭니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가도 이런 역사적 패턴을 따라갑니다.

‘정적의 잔인한 제거’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 이 둘은 어색하고 잘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을 위해 변명해 본다면, 우리는 이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도니아가 왕이 되었다면 솔로몬의 처지가 아도니아와 같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아도니아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두었다면, 그는 언젠가 솔로몬에게 화근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솔로몬이 잘못하거나 주위에 불평이 생겨날 때,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결국 아도니아를 앞세우고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 많은 집단 학살이 있었는데, 다윗의 학살을 피했던 사람들이 솔로몬 시대에 반란을 일으키고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니 아도니아를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요압이 만일 건재했다면, 그 노회한 군 실세가 건재했다면, 솔로몬은 아마도 그에게 휘둘리는 허수아비 왕이 되었을 겁니다. 제사장 아비아달이 계속 자리를 지켰다면, 아마도 솔로몬은 그의 눈치를 엄청 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제사장이라는 자리는 백성을 선동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기름을 부을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인간사회에서 사는 한,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일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은’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친형과 고모부를 죽였습니다. 노회한 군인들을 숙청하고, 서열을 뒤바꿨습니다. 선대로부터 큰 역할을 해 온 사람들을 갈아치웠습니다. 어찌 보면 솔로몬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싶기도 합니다. 고모부 장성택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기 권력을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정남이 살아 있는 한, 새 지도자를 세우려는 시도는 언제나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사람은 사회를 이루고 권력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 권력을 잡아야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꿈을 이룹니다. 이것이 인간존재의 현실입니다. 솔로몬처럼 한 나라의 왕권을 다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 한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정한 조직과 제도 안에서 살고, 그 조직과 제도 안에서 자기 위치를 확보해야 하며, 그것이 어려워질 때는 상대방과 맞서기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결국 솔로몬의 지혜로운 통치도, 그의 놀라운 성공과 업적도, 다 상대의 세력을 평정한 위에서 가능했습니다. 이 ‘평정’이라는 것은 ‘정직’과 ‘도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힘, 권력, 계략, 타이밍 등 모든 것이 다 있고, 그것이 맞아 떨어져야, 그래야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의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는 ‘도덕’과 ‘선’과 ‘대의명분’만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력을 모으고 세력을 관리하며, 경쟁세력을 설득할 수 없으면 제압하고, 제거하고, 축출하고, 숙청합니다. 그럴 힘이 부족하면 갈라서고, 분립합니다.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힘과 권력이 있으면 잘못한 것도 덮고 넘어갈 수 있고, 그럴 듯한 명분으로 포장할 수도 있습니다. 한 것도 안했다고 우깁니다.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경멸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인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았고, 또 보고 있습니다. 하고서도 안했다는 말, 무수히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정치인만 아니라, 심지어 사법부의 수장이었던 사람까지도, 뻔히 한 것 같은데 안했다고 잡아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되면 누구나 ‘정치적 탄압’이라 주장합니다.

이것이 정치판이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간현실의 모습입니다. 저 같은 소시민도 이 같은 현실과 무관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정치판의 삶이나 소시민의 삶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자기가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위치와 생존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그런데 왜, ‘노회찬’은 왜 그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하는 정치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버렸을까요?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좀 버텨보지! 아니면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지! 아니면 탄압이라고 대들어보던지!

그는 명문대를 나왔습니다. 앞길이 보장된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버렸고 고통당한 노동자들과 함께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세계에 들어간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노회찬은 용접공이 되었습니다. 노동의 강도가 더 쌔고 험한 일이죠.

노동운동의 끝은 정치입니다. 왜? 이 현실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노동문제는 온전히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온 삶을 거기에 바쳤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의 삶이 온전히 순수했든, 아니었든, 어쨌든 그의 삶은 타인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한 삶이었다면, 그렇게 힘든 길을 좇아 살지 않았겠죠.

그가 겪은 진보 정치의 현실은, 아마도 그가 오래 힘겹게 견뎌왔던 노동현장의 현실보다 더 험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치는 돈이 돌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는 지인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 도움 받은 사실을 한번 부인했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부끄러움이 되었습니다. 그 돈은 어떻게 보면 일반적으로 받을 수 있는 돈이었겠지만, 현행 선거법상 불법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참 지혜로운데, 노회찬은 참 우둔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자기 목숨으로 막을 일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노회찬은 자신의 도덕적 부끄러움 때문에 자기 목숨을 버렸다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부끄러움이야, 진정하게 사죄하고, 모든 자리를 버리고, 정치를 떠나, 낙향하면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더 깊이 고민한 지점은 다른 데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뿐 아니라, 노동현장에서 고생한 자기 선배나 후배들이 혼신의 힘으로 쌓아온 노동운동, 그리고 그 뜻을 정치현실에서 실현하자는 지난한 진보 정당 운동의 순수성이 훼손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을 것입니다.

결국 노회찬은 자기가 죽어, 자기가 몸담았던 그 길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는 유서를 썼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 외에, 원망 한 줄 없습니다. 이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원망이 있을 만도 하련만… 노무현의 유서를 봐도 그렇습니다. 누구 탓하지 말라며, 원망 한 마디 없었습니다. 노회찬은 단지 당에 대한 걱정, 자신과 함께 걸어왔던 동지들에 대해 걱정할 뿐이었습니다.

아마 그의 죽음은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일정한 효과를 낸 것 같습니다. 그가 죽은 지 25일만에 당원에 가입한 사람이 82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가입서에 추천인을 노회찬으로 적었다고 합니다. 자유한국당에서 넘어온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의 빈소에는 정치인이거나 유명인이 아닌 숱한 서민들의 눈물, 특히 중년 아주머니들이 와서 눈시울을 붉히거나 통곡하는 장면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습니다.

4.
요한복음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기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합니다. 그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자신이 하늘에서 온 빵이라며, “내 살을 먹으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 등의 공관복음서와 많이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문장서술 구조로 말한다면, 아예 두괄식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결론이 딱 서두에 나와 있습니다. ‘로고스가, 하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을 주는 본체이자, 영생의 빵’이라는 것을 미리 선언해놓고, 이를 계속 증명해가는 방식입니다.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의 성장과정, 혹은 메시아로 나서는 과정과 그 길의 고뇌를 보여주면서, 십자가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요한복음은 그러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이고, 영생의 떡임을 미리 선포해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간절한 기도가 없습니다.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신 모습,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옮겨달라는 고뇌의 기도, 제자들에게 ‘내가 힘드니 함께 깨어 기도하라’는 부탁이 없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십자가상의 울부짖음이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는 최후의 만찬 장면도 없습니다. 복음서의 시작에서부터 예수께서는 속죄양입니다. 시작부터 살과 피를 주어, 사람들을 살리는 분입니다.

살과 피를 나누는 일, 이 성만찬 때문에 로마제국 치하에서, 기독교는 식인(食人)종교라는 오해를 받았던 것 같았습니다. 은밀하게 모여 제의 과정에서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 매우 의아스러웠을 법합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는 참 이상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 앞에 경배하거나 제사할 때, 사람들이 제물을 바칩니다. 사람은 바치고 신은 받습니다. 심지어 구약의 종교인 유대교조차도 양이나 비둘기를 잡아서 제물로 바칩니다. 그런데 제가 모든 종교를 다 조사한 것이 아니니 아마도, 유일하게 기독교만이 신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칩니다. 신이 자기 아들을 제물로 내놓습니다. 그 아들이 신과 동일한 본체라니, 신이 스스로를 내놓은 것입니다. 신이 바치고 인간이 받습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입니다. 이성적으로 모순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신비한 일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내 살을 먹으라’고 할 때, 살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 ‘사륵스’라는 말입니다. 그 ‘사륵스’는 몸, ‘소마’ 곧 전인적인 몸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고깃덩어리를 의미합니다. 이 ‘사륵스’는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할 때 그 ‘육신’이라는 말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같은 단어를 ‘살’로, ‘육신’으로 번역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는 1장 프롤로그에서부터 예수님께서는 살이 되셔서, 자기 살을 나누어 주는 분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례전을 통해서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되는 것일까요? 성만찬의 빵을 그분의 살로 여기고 먹으면 되는 것인가요?

요한복음은 6장에서 쭉 빵과 살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오늘 본문 뒤에 바로 뒤,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빵’과 ‘살’에 대한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자기 살을 먹으라는 스승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수군거리니까,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듣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63절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사륵스)은 아무 소용이 없다.’ ‘사륵스’를 먹으라고 했다가, 곧바로 ‘사륵스’는 필요 없다고 합니다. 무슨 변덕입니까.

요한복음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을 먹는 것은, 고깃덩어리를 먹는 일이 아니고, 실제 빵을 먹는 일도 아닙니다. 예수의 살을 먹는 것은 그분의 영을 받는 것입니다. 그분의 삶을 따르는 것이고, 그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제자들이 와서 음식을 드시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의아해 하자, ‘나의 양식은 나의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십니다(4:34). 오늘 본문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분의 뜻, 그분의 일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이미 밝혀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사랑 때문에 자기를 제물로 내어주신 그 지극한 일입니다. 거기에 이어서 예수님은 자기처럼 살 것을, 자기처럼 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7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6.
우리는 몸을 입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삽니다. 피치 못할 대립과 경쟁, 전쟁과 살육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 남을 베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베어내는 그 지극한 사랑의 명령 앞에 서 있습니다. 모순입니다.

우리가 인간존재인 한, 우리의 신앙은 ‘현실(現實)’과 ‘이상(理想)’에서 부침합니다. ‘존재(存在)’와 ‘당위(當爲)’ 사이에서 떠돕니다. 인간(人間)은 거꾸로 간인(間人)이라고 읽어야 할지 모릅니다. 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間)에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늘 존재의 현실과 이상 사이(間)에서 떠돕니다. 우리의 선(善)이라는 것은 대개 솔로몬이 처한 현실에 가깝습니다. 그렇고 그런, 고만고만한 선입니다. 자기 위치, 자기 존재가 확립된 뒤에 구하는 지혜와 같습니다.

그런데 노회찬은 자기 아닌 것을 위해 죽었습니다. 물론 자기 잘못이 있었지만, 다른 이를 염두에 두고 자기 목숨을 마감했습니다. 노동운동의 고단함도 견뎠고, 이념 노선 투쟁의 지긋지긋함도 견뎠고, 가난의 어려움도 견뎠는데, 기득권세력의 탄압에서도 끄떡 없어보였는데, 노회찬은 이 지점에서 죽었습니다. 무릇 죽음이라는 것은 삶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그분의 사랑의 삶의 압축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노회찬의 자사(自死)는 그의 헌신의 삶을 압축합니다.

유시민 말대로, 노회찬은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참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존재와 당위 사이에 부침하는 우리에게, 우리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시대는 오랫동안 그를 기억해야 한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남은 자들은 그의 꿈을 더 끝내 더 굳건히 실현되기를 염원해야 한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둘 사이에, 당위와 존재 사이에 있습니다. 노회찬은 그런 우리에게 한 자락 빛을 비춥니다.

에베소서 오늘 본문에 있는 바울의 권면처럼, 우리는 어찌 살아야 할지 지혜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서로 신앙으로 화답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삶의 당위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늘 그렇게 되도록 애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순간 이 경지에 이른다 해도, 그것은 곧 여지없이 깨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숱한 부침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에게 당위에 머무르는 시간은 ‘순간’일 것이고, 존재에 묶인 시간은 긴 ‘일상’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늘의 빵을 먹기도 하지만, 내내 땅의 빵을 구할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살을 베어내는 그 사랑에 이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길고 긴 시간을, 내 자리 내 가족, 내 세계의 구축에 묶여 있을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바울의 한탄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래서 오히려 우리 삶은 하나님의 은총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은총 없이는 우리 삶은 불가능합니다.

노회찬과 그 가족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머물기를 바랍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8월 19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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