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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월)

"종교개혁자들에게 포용적 연합과 협력, 일치 배워야"

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7. 10. 16 04:24  |  수정 2017. 10. 16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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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회 '2017년 가을 학술대회' 김명혁 목사 주제발표 전해

개혁신학회 '2017년 가을 학술대회'를 마치고.
개혁신학회 '2017년 가을 학술대회'를 마치고. ©개혁신학회

[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종교개혁500주년을 맞아 개혁신학회가 '2017년 가을 학술대회'를 개최한 가운데,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가 주제발표를 통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봤다.

김명혁 목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또한 배타적인 독선이 아닌 '포용적인' '연합'과 '협력'과 '일치'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덧붙여 "종교개혁자들은 물론 오늘의 세계교회가 지향하는 '종교개혁'은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에로의 회복' 이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 했다.

김 목사는 "세속화와 인간화와 물질화와 분열과 분쟁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했던 '종교개혁'의 이념들과 그리고 무엇보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이 추구했던 '십자가 복음'의 특성들을 몸에 지니고 새로운 '복음적인 삶'을 조금이라도 살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한다"고 전했다. 다음은 그가 발표한 주제발표 전문을 소개한다.

제목: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본문: 고전 2:2, 빌 3:7-12
일시: 2017.10.14 오전 11시 총신대 개혁신학회 학술대회
발표: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복협회장)

김명혁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 기독일보DB

부족한 사람을 "종교개혁과 한국교회" 라는 주제로 개최되는 개혁신학회 가을학술대회에 초청해주시고 발표를 할 수 있게 해 주신 이상규 회장님과 회원님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인간화 되고 제도화 되고 물질화 되고 있던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개혁하여 “복음”의 본질과 핵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모든 정성을 다 쏟아 바치면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모토들을 내 세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직 성경”보다 “오직 믿음”보다 “오직 은혜”보다 “오직 그리스도”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보다 귀중한 모토들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물려받아 몸과 마음과 삶에 지녀야 할 너무너무 귀중한 모토들과 고백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귀중한 모토들과 고백들이라고 해도 “오직”을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강조하면서 “다른” 면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배타적인 입장은 조심하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성경”을 관념적으로만 고백할 뿐 영적이고 생활적인 면에서 무시하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성경”을 너무 강조하면서 성경 말씀을 글로 써서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못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믿음”을 말로만 고백할 뿐 자신과 명예와 돈과 세상을 의지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의 “믿음”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착함”의 삶에 있다고 가르치는데 “착함”을 무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무시하는 “믿음”은 아무 쓸 데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2). “오직 은혜”는 너무 귀중한 모토이지만 “오직 은혜”를 강조하면서 인간의 책임을 간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강조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자기의 “책임”을 너무 강조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오직 그리스도”는 사도 바울이 강조한 너무 귀중한 모토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성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일반 은총을 무시하고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론으로 치우치는 소위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 monism)이 생기게도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은 아무리 강조해도 잘못이 없는 너무 귀중한 신앙의 모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언제나 잘못을 범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교황이나 유명한 목회자가 영광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잘못 가르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손양원 목사님처럼 자기가 높임이나 영광을 받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또한 배타적인 독선이 아닌 “포용적인” “연합”과 “협력”과 “일치”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죄인들의 구원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엡 2:13-18). 종교개혁자들은 과거의 역사를 전적으로 배타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올바른 신앙적인 전통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사실 “종교개혁” 이란 말은 “부정을 통한 형성” 이라는 의미보다는 본질을 “다시 형성”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루터는 버나드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칼빈은 어거스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종교개혁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소신을 분명하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다른 종교개혁주의자들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면서 배타적으로 투쟁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조금씩 다른 주장을 했던 종교개혁자들을 각각 다른 입장에서 존중하며 배우려고 하되 “쏠라 루터” “쏠라 칼빈” “쏠라 웨슬레” “쏠라 쯔윙글리” 라는 모토를 내 세우면서 서로 싸울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전적인 인간의 책임”을 각각 강조하면서 서로 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연합”과 “협력”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포용적인” “연합”과 “협력”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수고를 많이 하고 있는 손인웅 목사님은 지난 2017년 4월 14일 “종교개혁의 모토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이해” 라는 주제로 모인 한복협 월례모임에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에 대한 평가와 이해” 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면서 교회의 일치와 평화와 하나됨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고의 방법이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라는 개혁자들의 명제는 교회의 분열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의 회복과 교회의 일치에 의한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을 위해 항상 자기를 개혁해야 한다는 의미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지 못하는 분열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케 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만들기 때문에 장차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책망 받을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일치를 이루어 교회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한 마디 더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물론 오늘의 세계교회가 지향하는 “종교개혁”은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에로의 회복”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십자가 복음에로의 회복”을 사도 바울이 시도했고 평생토록 추구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7-12).

사실 루터와 칼빈은 “오직 성경”의 모토를 내 세우면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즉 “십자가 중심적인” 성경관을 내 세웠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고백한다. 내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덜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더 많이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결코 빈곤해지지 않는다. 참된 사도의 직무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그의 직무를 전파하는 일이다.” 요한 칼빈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요컨대 전체 성경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아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자기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매우 적절한 말이다. 성경을 읽는 우리의 최대의 목표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본질과 핵심은 “십자가 복음에로의 귀환” 이요 “십자가 복음에로의 귀의” 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의 특성을 세 가지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래서 “복음 삼도”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즉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몸에 지니는 삶과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성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극도의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몸에 지니고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에로의 회복”인데 그것은 주님께서 지니셨던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몸에 지니고, 세상의 부요함과 지혜로움과 강함과 악함과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모두 벗어버리고, 땅끝의 모든 죄인들 사랑과 모든 죄인들 구원에 전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주님께서 몸에 지니셨던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몸에 지니고 그리고 주님께서 몸에 지니셨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을 몸에 지니고 땅끝의 모든 죄인들 사랑과 죄인들 구원에 전력하는 삶과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의 특성들을 몸에 지니고 살다가 죽으신 분들이 스데반 집사와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와 폴리캅 감독과 성 프랜시스와 토마스 선교사와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최권능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속화와 인간화와 물질화와 분열과 분쟁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했던 “종교개혁”의 이념들과 그리고 무엇보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이 추구했던 “십자가 복음”의 특성들을 몸에 지니고 새로운 “복음적인 삶”을 조금이라도 살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조금이라도 몸에 지니고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여!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셔서 엎드려 울면서 회개하게 하시고 서로 끌어 안고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게 하시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몸에 지니셨던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조금이라도 몸에 지니고 땅끝에서 살고 있는 모든 종류의 죄인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구원”과 “화해”의 손길을 펴는데 전력을 다하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

시간이 좀 남았다고 생각해서 제가 자주 이야기하는 “복음 삼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복음 삼도” 라는 말은 “복음”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세 가지 길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십자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다가 십자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모습과 그리고 십자가 복음에 미쳐서 살다가 죽은 사도 바울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을 지니고 살다가 죽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십자가 복음의 특성은 “약함”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조롱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일보다 더 “약해진” 일은 이 세상과 우주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역설적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인 존 스토트 박사는 2000년 7월 영국 케직사경회에서 “약함을 통한 능력”(Power through weaknesses) 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적 진리의 하나는 약함과 어리석음에 있다.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복음 전도자의 특성도 약함과 어리석음이다.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자격도 약함과 어리석음이다.” 저는 그 때 너무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의 특성을 묘사하면서 사람들의 눈에는 미련한 것이고 약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3,25). 사도 바울은 그 다음 복음 전도자의 특성도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깊이 인식하고 인정하고 지니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비하하며 약함을 예찬했습니다. “바울은 무슨 물건이며 아볼로는 무슨 물건이냐?”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4:13). “나는 나에 대해서 약한 것들과 부족한 것들을 자랑하노라 그 이유는 내가 약할 때에만 강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약할 때에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고후12:5,10). 사도 바울은 그 다음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자격도 “약함”과 “어리석음” 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초기의 한국교회는 참으로 약했고 가난했고 어리석었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겸손히 땅에 엎드려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만 의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 너무 커지고 너무 강해지고 너무 지혜로워졌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특성은 “약함” 입니다. 이제 우리들도 “약함”을 통해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도 “어리석음”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를 체험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둘째로, 십자가 복음의 특성은 “착함” 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는 말씀이시고 하나님이셨었지만 우리들을 위해서 “착함”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착함” 이란 자기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의 특성을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라는 말씀은 하나님이신 말씀이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죄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어느 정도 포기하시고 “착함”의 사람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눅2:11) 라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했는데 이 보다 놀라운 “착함”은 이 세상과 우주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롬8:3) 세상에 오셨다고까지 지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사셨고, 문둥병자들을 어루만지시며 병을 고쳐주셨고,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간음 현장에서 집힌 죄인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일곱 귀신들렸던 인간 쓰레기를 불쌍히 여기시고 너무너무 사랑하셨습니다. 이보다 놀라운 “착함”은 이 세상과 우주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10:38) 라고 지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로마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까지 하셨습니다(눅23:34). 이 보다 놀라운 “착함”은 이 세상과 우주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특성은 “착함”입니다. 성경은 “착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사도 행전은 사도들을 통해서 십자가의 복음이 세상에 전파된 것을 기록하지만 사실 그 길을 미리 예비한 것은 이름없는 사람들의 “착한” 삶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도르가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복음 전파의 준비가 욥바에 마련되었고, 고넬료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복음 전파의 준비가 가이사랴에 마련되었습니다. 바나바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안디옥의 복음화와 선교 사역이 이루어졌고, 루디아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복음화의 역사가 빌립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디모데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전도와 선교와 섬김의 귀중한 사역이 계승되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유창한 설교보다 정통 신학보다 뜨거운 체험보다 화려한 프로그램보다 상처 입은 자를 품을 수 있는 따뜻하고 착하고 선한 인정과 사랑을 지닌 “착함”의 목회와 선교와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옛날에는 “착함”을 강조하는 것은 인본주의요 자유주의라고 무식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착하신” 분이셨다는 사실을 저는 나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면서 “착함”을 흉내 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강조해왔습니다. 세 가지 모토가 기독교 복음의 중심과 기초가 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세가지 모토에 약점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경만을 강조한 나머지 말과 지식에 치우치게 되었고,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행함을 등한시 하게 되었고, 은혜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소홀이 하며 감정만 강조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교회에 설교와 신학과 은혜 체험이 풍성하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너무 풍성하고 신학이 너무 풍성하고 은혜 체험이 너무 풍성한 나머지 말만 잘 하게 되었고 감정만이 풍부하게 되었고 비판만 잘 하는 무정한 이기주의자들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한동안 은혜로운 설교를 너무 사모해왔고 깊은 신학을 너무 동경해왔고 은혜 체험을 너무 사모해왔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저는 설교는 은이고 신학은 동이고 이적은 철이고 프로그램은 흙이고 주님 닮으려는 “착한” 삶만이 금이란 말을 중얼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 프랜시스와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을 존경하게 되었고 이성봉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을 존경하게 되었고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둘째 특성은 “착함” 입니다.

셋째로, 십자가 복음의 특성은 “주변성” 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특성 중의 하나는 자기 중심 또는 민족 중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 민족은 한 반도라는 지형적 특성과 유교라는 사회 문화 종교적 전통의 영향을 받아 개인 중심적이고 가문 중심적이고 지역 중심적이고 민족 중심적이고 국가 중심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복음은 이미 “주변 지향적”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축복하실 때 그의 관심을 자기 본토나 아비 집에 두지 않고 “땅의 모든 족속”(창12:3)에 두도록 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그의 사명을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는 이스라엘 회복에 머물지 않고 “이방의 빛을 삼아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사49:6) 하는데 두도록 했습니다. 요나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그의 관심이 이스라엘만이 아닌 앗수르의 구원에도 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욘4:11). 니느웨는 그 당시 “악의 축”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교류하고 또 하나의 “악의 축” 이었던 애굽과도 교류하게 될 것이고 셋이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고 셋이 함께 세상의 복이 되는 날이 온다고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하셨습니다(사19:23-25). 저는 오래 전에 이 말씀을 읽으면서 놀라는 충격을 받게 되었고 이 말씀을 너무너무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신약의 복음도 분명히 “주변 지향적” 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을 떠나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실 때 지역적으로는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욥바와 가이사랴와 안디옥을 통해 소 아시아와 마게도냐 등 주변과 이방으로 퍼져나가게 하셨고, 사회적으로는 중심에서 소외된 버림 받은 죄인들과 병자들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와서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하신 사람은 저주 받았던 병자들과 이방인 죄인들이었습니다.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8:3).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마8:16). 결국 베드로도 바울도 주변 세계로 향해 달려간 이방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

하나님의 마음과 눈은 물론 그의 자녀들을 향하고 계시지만 그보다는 “주변”과 “땅끝”과 “이방”을 바라보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인종적 정치적 불의와 죄악이 가득한 주변에서 신음하는 잃은 양들을 향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사회, 인권 개혁도 중요하지만 복음과 사랑을 지니고 그저 주변과 이방으로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주변 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분부들로 “주변 지향적”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23:11). 십자가 복음은 물론 부활 복음의 특성도 “주변 지향적” 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십자가 복음의 특성 세 가지에 대해서 즉 “복음 삼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특성은 “약함”과 “착함”과 “주변성” 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십자가 복음적인 삶”을 즉 “복음 삼도의 삶”을 가장 모범적으로 산 사람들 중의 대표적인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와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와 폴리캅 감독과 성 프랜시스와 토마스 선교사와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최권능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은 너무 높은 수준의 “십자가 복음적인 삶”을 살았는데 우리는 지금 너무 낮은 수준의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은 너무나 주님 닮은 “복음 삼도의 삶”을 살았는데 우리는 지금 너무 세상을 닮은 “세속 삼도”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하트라 간디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백 년마다 한번씩 만 프랜시스와 같은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난다면 인류의 구원은 보장되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너무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들이지만 십자가에 달라신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스데반 집사와 사도 바울과 폴리캅 감독과 성 프랜시스와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최봉석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들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약해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착함”의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땅끝의 누군가를 위해서 가난과 고통이 되는 “주변성”의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스데반 집사와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와 폴리캅 감독과 성 프랜시스와 토마스 선교사와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최권능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몇 십 분의 일이라도 아니 백분의 일이라도 임하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하며 기원합니다. 그래서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인 우리 죄인들도 주님 닮은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을 닮은 “복음 삼도의 삶”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몇 십 분의 일이나 백분의 일이라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하면 간구합니다. 종교개혁자들과 교회 역사에 나타난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로부터 “십자가 복음의 본질과 핵심들”을 조금씩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배워서 몸에 지니고 살다가 죽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하며 기원합니다. /자료=김명혁 목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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