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대 웨슬리신학연구소 소장 황덕형 교수가 연구소 비전을 소개하고 있다.   ©서울신대 웨슬리신학연구소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서울신학대학교(총장 유석성 박사) 웨슬리신학연구소(소장 황덕형 교수)가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신대 백주년기념관 채플에서 창립감사예배를 드리며 공식적으로 개소를 알렸다. 

연구소 측은 "우리 성결교회의 가장 중요한 전통을 연구하는 웨슬리신학연구소가 개소하게 되었다"며 "특히 사중복음을 가능하게 한 웨슬리의 신학과 그 전통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 교단이 지켜온 지금까지의 역사를 더욱 빛나게 하는 일임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이날 연구소 개소를 기념해 예배 이후 진행된 강연에서 '웨슬리의 성만찬에 대한 소고'란 주제로 설교한 김영선 교수(협성대 웨슬리신학연구소 소장)는 "성만찬 예식이 감리교회의 신앙부흥운동의 균형을 지탱하고 분파적인 열광주의를 예방했고 웨슬리가 성만찬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를 중요시하지 않았다면 웨슬리의 부흥운동의 기반은 상실되었을 것이다"며 "말씀 중심에 사로잡혀 있는 오늘의 교회는 성례전을 통한 은혜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먼저 "웨슬리는 1784년 미국 감리교회를 위하여 제정한 25개 신조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한 바에 따라 성례전이 정당하게 집행'되는 믿음의 공동체로 정의했다"며 "이를 통해 웨슬리가 성례전을 교회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고 했다.

▲김영선 교수   ©협성대

이어 "웨슬리가 영국 국교회의 고교회 전통으로부터 뿌리 깊게 영향을 받은 것 가운데 하나는 성만찬이다.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 고교회 성직자로서 열성적인 성만찬주의자였다"며 "웨슬리는 8세 때부터 성찬상에 나갔고 그 때부터 성만찬은 그에게 거룩한 습관이 되었으며 일생동안 성만찬 경건주의자로 살았다"고 소개했다.

또 "라텐베리(J.E. Rattenbury)는 웨슬리의 성찬론은 고교회 전통에 근거를 두면서도 복음주의적 입장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웨슬리의 성찬론을 복음적 예전주의(Evangelical Sacramentalism) 또는 예전적 복음주의(Sacramental Evangelism)라고 불렀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특히 조지아에서 선교할 당시에는 다음과 같은 영국 국교회의 규정에 따라 성만찬을 집행했다"며 ▲영국 국교회 성직자에게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찬을 주지 않는다 ▲성찬을 받기 원하는 자는 미리 예고해야 한다 ▲ 한번 성찬에 적합치 않은 자로 인정된 후로는 회개, 고행, 금식, 고백, 기도회 출석 등을 통하여 훈련 받은 후에 성찬을 받게 하고, 이런 훈련의 증거가 없으면 '성찬을 거절한다'는 내용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위와 같은 엄격한 성찬 규칙 적용은 웨슬리로 하여금 조지아에서의 선교 실패를 가져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며 조지아 선교 이후인 "1747년에도 속회출석표나 특별한 증서가 있어야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이 성만찬에 참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했다.

『존 웨슬리와 감리교의 부흥』을 저술한 헨리 D. 랙은 "웨슬리는 성만찬을 효과적으로 받게 하기 위하여 신자들에게 금식할 것을 권장하였는데 초기 감리교 신자들은 주로 성찬 받기 전 6시간 동안 금식하였다"고도 기술했다.

김영선 교수는 "회심 후에 웨슬리는 의식중심의(ritualistic) 성례전을 버리고 복음적 성례전을 택하고 성만찬의 수찬자의 자격을 완화했다"며 "감리교의 성만찬은 복음 전도의 수단이며 회심케 하는 예식으로,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부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에게 수찬의 자격을 부여하였다"고 했다.

이어 김 교수는 "물론 수찬자는 믿음이 있는 자라야 했지만 루터, 칼빈, 모라비아 교도가 말하는 완전한 믿음이 아니어도 하나님을 찾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성찬은 열려 있다. 단 하나의 조건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것, 죄를 억제하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그의 영혼을 새롭게 하려고 은혜를 갈망하는 자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며 "세례 받은 자,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깨끗한 생애를 보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 성찬을 베풀었다"고 말했다.

그는 "혹자는 웨슬리가 성찬을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베푸는 실수를 범했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웨슬리가 성찬에 대하여 무차별적으로 자격을 부여한 것은 아니다"며 "은혜를 구하는 믿음이 성찬을 받을 본질적 조건과 자격이라고 믿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성찬을 집행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성직자만이 그 자격이 있었다"며 "웨슬리 당시 평신도 설교자들 가운데 성만찬 집행을 원하는 자들이 있었다. 더군다나 영국 국교회 목사들이 감리교인들에게 성만찬을 베풀어 주는 것을 거부하는 지역에서 봉사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은 더욱 그러한 마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18세기의 영국 국교회 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성찬 예배를 등한시했다"며 영국 감리교회의 웨슬리 신학자인 라텐베리(John Earnest Rattenbury)가 든 이유를 소개했다. 첫째는 이신론의 영향을 받은 합리주의자들이 기독교의 성찬이 신비성과 초자연성을 조장한다고 여겼으므로, 둘째로 영국의 정치적 상황과 연관하여서 영국 국교회가 천주교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성례전을 자주 시행하면 천주교도로 몰리게 될 것을 염려해서, 셋째로는 성찬을 자주 행하면 성찬의 존엄성이 상실될 것을 두려워하여 자주 시행하는 것을 꺼렸다고 전했다.

그는 "헨리 랙(Henry D. Rack)은 그의 저서 『존 웨슬리와 감리교의 부흥』에서 많은 감리교도들은 영국 국교회 성직자들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그들에게서 받는 성만찬은 효험이 없다고 생각하고 감리교 성만찬을 원하였지만 쉽지 않았음을 말하였다. 어쩌다 감리교 성만찬이 거행되면 수 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성만찬에 참석하였다"며 "형편이 이러하다 보니 많은 설교자들이 성직이 없이 성만찬을 집례하려고 하였고 또한 웨슬리에게 정기적으로 성직에 임명해 달라는 압력을 넣었다. 이는 성만찬을 더 많이 받고자 하는 강한 욕구에서 기인된 것이다"고 다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 교수는 "웨슬리는 예언자적 직능과 제사장적 직능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고 평신도 설교자들에게는 예언자적 직능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지 교회에서 주어지는 권위와 안수식이 요구되는 제사장적 직능을 위해서는 부름받지 않았다고 하여 이들의 성례 집행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며 "웨슬리가 평신도에게 설교를 허락한 것은 영혼들을 구원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영혼을 구원할 필요성이 있다고 해서 성만찬을 베풀 성직들까지 임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웨슬리는 은총의 성장은 은총의 모든 수단에 정기적으로 참여할 때 가능하다고 보고, 예배에 참석하는 자들에게 성찬식에 자주 참석하라고 강조했다"며 "웨슬리는 평균 4-5일에 한 번씩 자기의 목회 생활을 통해 성찬을 베풀었다. 그 자신도 평균 2일에 1회 정도로 성만찬에 참석했고 노년의 마지막 몇 년간은 3일에 1회, 1791년 죽기 전 6주 동안은 15회 성찬을 받았다. 그는 가끔 집에서나 채플에서 개인성찬을 행하였다. 또 전도를 위하여 야외에서 성만찬을 거행하기도 했고 병든 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집에까지 가서 성례전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고 했다.

김 교수는 "웨슬리는 18세기의 영국 국교회는 일반적으로 도시지역에서는 매월 한 번, 시골지역에서는 매 분기에 한 번 정도 성찬 예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는 초대 교회 이후 신자들은 거의 매일 또는 매 주간 네 번의 성만찬을 받은 것에 비하여 아주 적은 것이라고 하였다"며 "웨슬리는 1733년 설교에서 '빈번한'성만찬(frequent communion)이 아니라 '지속적인 성만찬(Constant Communion)'을 말하였다. 왜냐하면 성찬의 의무를 지속적으로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의 완전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또 "웨슬리는 미 개척지에서 새로 안수 받는 지도자들에게 '주일마다 주님의 성만찬을 거행하라'고 권고하였다"며 "우리가 성찬에 자주 참여해야 될 이유는 그리스도의 명령(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신자들에게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받고 우리 영혼을 강하게 하는 은혜를 받는다"고 했다.

덧붙여 김 교수는 "웨슬리는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real presence)를 확신하였다. 그러나 신체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그래서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이 성만찬의 외적 물질에 실제로 현존한다고 보는 화체설과 공재설은 거부되고,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는 인격적인 현존으로 포착된다"며 "웨슬리도 고교회주의자로 영국 국교회(영국 국교회의 39개조 종교강령은 화채설을 거부) 따라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는 하늘에 계신다고 하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늘날 감리교회는 웨슬리가 그렇게 강조한 지속적 성만찬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며 "그 이유의 첫째는 성만찬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미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현대 교회가 말씀 위주의 예배를 드리다보니 성만찬을 매주 실행하는데는 시간 조절이 어렵고 그 준비에 번거로움을 느낀다. 셋째, 현대교회는 리터지(liturgy)나 성만찬보다는 자유로운 예배 방식을 선호한다. 넷째, 빈번한 성찬은 성찬의 깊은 의미를 경시할 수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현대 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같이 너무 의식적이고 의례적인 것들을 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고 분석했다.

이날 논찬자로 나선 서울신대 박창훈 교수는 " 웨슬리의 성만찬신학에 대한 연구는 주로 예배학을 전공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연구가 되고 있을 뿐, 한국의 웨슬리신학계에서는 그리 자주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를 소개한 필자의 노고를 감사하면서, 궁금한 점 몇 가지를 제기한다"며 "첫째, 웨슬리가 모라비안과의 갈등 속에서, 1740년 6월 27일 일지에서 아직 '회개하지 않은(unconverted) 사람'에게도 성찬을 허락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고 했다.

박 교수는 "이점에서 웨슬리가 '수찬자의 내적 믿음'을 성찬의 조건으로 보았다고 필자는 분명히 지적하지만, 웨슬리가 혹시 'ex opere operato'(성례전이 집행자나 참여자의 인격이나 상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도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효과가 나타난다는 도나투스 논쟁에서 제기된 주장)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며 "물론 이를 인정할 경우 필자의 우려처럼, 모든 사람에게 성찬을 무차별로 베푸는 실수를 베풀 위험이 있음을 목회적 측면에서 제기할 수 있지만, 그 정도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하게 신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또 "평신도 설교자들에게 성찬집행을 허락하지 않은 모습은 자신과 메소디스트 부흥운동이 국교회로부터 분열주의자라고 의심을 받고 있었던 상황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며 "그만큼 분명히 웨슬리는 메소디스트 운동이 국교회 내부에서 진행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웨슬리의 메소디스트 운동의 목적이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기보다는, 국교회를 바로 세우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를 교회개혁을 주도한 인물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점이 궁금하다"고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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