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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6 (금)

[민영진 설교] 부활마을은 유령사회가 아니다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04. 16 06:45  |  수정 2018. 04. 16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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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 - 눅24:36b-48; 요일 3:1-7; 행 3:12-19; 시 4:1-8

함께하는예배>공동체 공동설교자
'함께하는예배' 공동체 공동설교자 민영진 박사

부활마을

"부활마을"은 "교회"를 달리 일컫는 이름으로 쓰고 싶어서 고안해 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세례를 설명하면서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벧전 3: 21)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란 바로 이런 이들,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이들의 모임"이라고 보아, "부활마을"이라고 불러 본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의 부활을 힘입어 사는 사람들, 부활마을의 구성원들은 뼈와 살을 지닌 사람들이지, 뼈와 살이 없는 유령들이 아니라는 점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문제가 많은 이 역사 속에서 그때그때마다 결단하며 사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임을 감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내일로서 우리는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여객선 세월호가 전복되어 침몰한 사고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해상 교통사고가 아님을 이제 우리 국민 다수는 알고 있습니다. 과연 이 참혹한 희생을 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했었던가를 반성하고 참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희생을 보면서 교회가 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했는가 하는 이 질문이 우리의 죄를 들추는 추상같은 호령으로 들립니다. 희생자의 부모들 중에 교인이었던 이들이 자기들의 교회를 떠나야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교회의 응답"에 대해서 우리는 연대책임을 면하지 못합니다.

부활 이후의 예수, 예수의 부활을 힘입어 사는 사람들

부활하신 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던 우리 주님이 바로 유령이 아니고, 살과 뼈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에서, 부활을 힘입어 사는 성도들도 유령의 상태에서 사는 아들이 아니라, 혈과 육을 가진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점을 고려하자는 것입니다.

먹을 것 좀 없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유령이 아닌 것을 제자들에게 확인시키실 때 "밥"을 찾으셨습니다. '뭐 좀 먹을 거 없냐'고. 그래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께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더니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것을 받아서, 당신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생선구이를 잡수셨다고 합니다. 유령은 밥을 안 먹어도, 예수의 부활을 힘입어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십니다. 한 가지 더 부언하자면, 교회가 막 시작될 때부터 예수신앙공동체는 역사적 예수에 관해서도 신학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한 편에서는 "오실 그 분"(히브리어 "메시아", 그리스어 "그리스도")이 사람이 되어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부활하신 예수가 육신을 가졌겠느냐 하는 것은, 역사적 예수가 가현(假現)일뿐이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전제부터가 "부활하신 예수", "뼈와 살을 가지고 밥을 먹는 예수"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요. 땅에서 떠난 그러한 신학은 사변적 사유로 발전합니다. 영지주의의 공과 과에 관해서는 언젠가 우리가 또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 용서에 대한 예언(?)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곧 지금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어 성경에 당신이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부활하실 것을 밝힌 기록이 있음을 말씀하셨음을 상기시키십니다. 복음서 기자도 덩달아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45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눅 24:45-46)고 말합니다.

성경만이 아니고, 예수께서도 친히 제자들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당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당신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47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눅 24:46-47).

그런데, 이런 기록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히브리어 성경)에는 없습니다. 메시아로 오시는 분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은 (구약)성경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고전 15:4)고 하지만. 여기 "성경대로"라고 했을 때 그 「성경」이라면 아직 「신약전서」는 없고 「구약전서」만 있었던 때였고, 이런 말은 「구약」에는 없습니다.

당신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신 말씀은 "성경 말씀"이 아니라, 예수께서 평소에 늘 하시던 그 말씀인데, 제자들이 그때까지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평소에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한다는 것을 예고한 바는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이 아니고 예수가 구두로 한 말씀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 16:21). 이것은 네 복음서가 다 증언하고 있습니다(마 17:23; 20:19; 28:6; 막 8:31; 10:34; 눅 9:22; 18:33; 24:6-7; 요 2:19-22).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떠나 "홀로 있어서는 안 된다"[신기독(愼其獨)]

오늘 성서일과 신약성서의 말씀 요일 3:1-7은 세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 첫째는 하나님과 성도는 부모자식 사이 같은 사랑의 관계라는 것이고, (2)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의 미래는 감추어져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자녀들도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고, (3) 셋째는 자녀의 죄, 그 불법행위 문제와 그리스도의 역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다는 것,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떠나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愼其獨]입니다.

성도가 "말씀"과 더불어 평생 살아왔다는 것은 그들이 의식하든 못하든 그들이 신성(神聖)의 영역과 관련을 맺고 살아온 것입니다. 성서적 표현을 빌린다면 말씀과 함께 사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하나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 안에서 일하고 하나님 안에서 존재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이 곧 신성(神聖)의 영역임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삶의 질과 품위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이 없다면 늘 성경 읽고 말씀과 함께 있고 말씀 안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신성 곧 하나님과 함께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 떠나 홀로 있는 것입니다. 신성, 혹은 성령과의 교감이 없는 것입니다.

'중용'(中庸) 첫 장과 '대학'(大學) 6장에 "신기독(愼其獨)"이란 말이 나옵니다. "홀로 있는 것을 삼가라"는 말입니다. 중용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말을 군자(君子)가 홀로 있을 때도 행동거지를 삼가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남이 안 본다고 몸가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주석가들은 중용 첫 장이 신성(神聖)의 영역에 속하는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의 "도(道)"를 다룬다는 점에 착안하여, "신기독(愼其獨)"을 "군자가 도를 떠나서 홀로 있는 것을 삼가야 한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이 후자, 이 소수의 견해에 최근에 부쩍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람과 도는 불가분리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어 성경들은 아직도 요한복음 1장 1절을 번역할 때 "말(씀)"을 "도(道)"라고 번역합니다. "태초에 도가 있었다. 도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도가 곧 하나님이다."元始有道, 道與上帝共在, 道卽上帝 1852 文理 요 1:1)

그리스도를 떠나 홀로 있으면 미혹을 받아 범죄에 노출되지만,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면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 때, "의를 행하는 사람은" 우리의 의로움이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 같이 의롭"게 되는 경지에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스스로 반성해 볼 때 교회가 "의를 행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저자는 참으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경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의를 행하는 사람은" 우리의 의로움이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 같이 의롭"게 된다는 이러한 격려는 우리의 열등감, 우리의 소외감을 치료해줄 수도 있습니다. 구러나 이런 치유는 단순한 "깨달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예고된 대속자의 오심, 대속자의 지상에서의 삶, 그의 대속적 고난과 대속적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실천을 통해서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믿음과 실천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교회는 일찍이 영지주의와 갈라섰습니다. "참여" 없이는 깨달음의 경지까지는 이를 수 있으나 변화되는 화육(化肉)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해도 "하나님의 자녀"가 당하는 고통을 외면하는 성도들을 억지로 끌고, 그 역사 현장을 방문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응답하지 않는 무감각한 교회를 끌고 고통의 현장에 화육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매년 4월만 되어도, 엘리엇의 "4월은 잔인한 달"이 아니고라도, 우리의 4월은 잔인했습니다. 제주도 4.3 사태, 진도군 조도면 부근의 세월호 참사, 1960년의 4.19 혁명 등, 교회가 회개하고 돌아와 죄 씻음 받을 기회는, 분단 70년의 역사에서도 많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할 기회를 교회는 번번이 놓쳤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와, 죄 씻음을 받는다 (행 3:12-19)

요한일서 저자의 교훈은 예수의 부활을 힘입어 사는 사람들에게, 집단적인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향해서 선포되지만, 이제 우리가 보려고 하는 베드로의 설교는 교회 밖의 사람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살해에 참여했던 이들, 그러나 여전히 같은 유대인 동포인 사람들,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 받고, 함께 예수의 부활을 힘입어 사는 사람들이 될 이들을 향한 설교입니다. 사도행전 본문을 요한일서 본문과 비교해 볼 때 일단은 청중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란 점이 대조가 됩니다.

베드로는 성전 구내 솔로몬 행각에 모인 그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 말합니다. 그 청중을 베드로는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이라고 부릅니다. 문자대로는 "이스라엘 사람 여러분!"입니다.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여기 이 일이란, 성전 입구 미문(美門)에서 구걸하던,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걷지 못하는 남자"가 된 사람을 베드로가 걷게 한 사건을 말합니다.

성전 입구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던 그 남자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 가는 걸 보고 구걸할 때 베드로가 그를 향해 말합니다. "돈은 내게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사역 행 3:6) 하고 선언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더니, 그가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걸어 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미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고서, 그에게 일어난 일로 몹시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던 겁니다.

이 사건을 목격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가 말합니다. 이 놀라운 치유가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람의 능력이나 경건과 무관하다는 점을 먼저 밝힙니다. 걷지 못하던 그 장애인의 치유에 관해서는 일단 언급을 중단합니다. 설교자는 이 치유 사건 말고, 최근에 있었던 다른 큰 사건으로 청중의 관심을 돌립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예수를 영광(榮光)스럽게 하셨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그들이 예수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밝힙니다. 그들이 일찍이 죄가 없는 예수를 극형에 처하도록 넘겨주었다는 것, 빌라도가 무죄한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다는 것, 그 때도 그들이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다는 것, 거룩하고 의로운 예수의 석방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사면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는 것,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죽였다는 것,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 부활하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자기들은 이 일련의 사건의 목격자일뿐 아니라 이 일의 "증인"이라는 점을 차례대로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이 장애인의 치유 사건을 조명합니다.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다고, 이 치유는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힘입어서 된 것이라고, 예수로 말미암은 그 믿음이 이 사람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청중을 위로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메시아 살해는 지도자들이나 일반 백성이 무지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자의 입을 빌어서 그리스도가/메시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사 52:13-53:12; 렘 11:19; 슥 12:10; 13:7; 시 22; 31; 34; 69)) 미리 선포하신 것을 상기시킵니다. 메시아 살해는 그들이 아니었어도 누군가가 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제 메시아 살해자가 할 일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아 예수의 부활을 힘입어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하고, 역사에 응답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마을의 믿음, 희망, 사랑 (새번역 시 4:1-8)

오늘 우리가 교독한 시편 4:1-8에서 우리는 "예수마을", "부활마을"에서 어떤 믿음 어떤 희망 어떤 사랑이 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 저는 "예수마을", "부활마을"을 동격(同格)으로 나란히 병렬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과 예수의 부활을 힘입어 사는 사람들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절은 예배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들에게도, 아니 우리에게도, 여전히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아니 우리에게도, 여전히 "곤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막다른 길목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에서 우리가 부르는 632 장 이보철 작사 "주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바로 "키리에, 엘레이손"입니다. 시편의 예배자는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시편 시인이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시 136편) 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부활 이전이든 이후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필요 없는 차원은 없을 것 같습니다.

2절은 하나님께서 친히 고관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욕되게 하지 말 것과, 거짓 신을 섬기지 말 것을 경고하신다. 십계 1,2,3 계명, (하나님 외에 다른 신 없다, 우상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는 계명의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로 요약하셨습니다.

3-5절은 예배자가 회중을 향해, 주님께 헌신할 것과,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점, 죄를 지었으면 눈물로 참회하고,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6-8절은 다시 예배자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주님께서 안겨주신 기쁨은 햇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자의 기쁨이 충일한 본문입니다. 기쁨은 예배의 극치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과 예수의 부활을 힘입어,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사람들이 함께 누릴 기쁨입니다. 부활을 힘입어 사는 사람들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확인하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민영진 박사는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로, 구약 신학학자로서 모두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성경번역가이다. 연세대신학대학을 거쳐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목사는 '표준새번역'과 '새번역'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등의 성경 개정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4월 15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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