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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4 (수)

[민영진 설교] 예수의 이름, 예수의 시간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01. 02 06:54  |  수정 2018. 01. 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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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61:10-62:3, 시148, 갈4:4-7, 눅2:22-40

함께하는예배>공동체 공동설교자
'함께하는예배' 공동체 공동설교자 민영진 박사

시간을 계산하는 사람들

2017년 12월 31일 마지막 날을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면서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한 해가 끝나고 이제 곧 오늘 자정 이후부터는 2018년 새해가 시작됩니다. 서기(西紀) 2018년은 이 지구행성에서 제일 널리 쓰이고 있는 그레고리력을 따른 것입니다. 이것 외에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기년법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습니다.음력으로는 2월 16일 구정이 오기까지는 아직 정유년(丁酉年/닭)이고, 그 이후부터는 무술년(戊戌年/개)입니다. 단기(檀紀)로는 새해가 4,351년입니다. 불교종단에서는 불기(佛紀)를 씁니다. 새해가 불기 2562년입니다. 이슬람력으로는 1440/1441년입니다. 일본 달력 황기(皇基)로는 2678년이고, 히브리력으로는 5778/5779년입니다. 전세계적으로는 약 40 여개의 역법이 사용되고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밖에도 역법을 통일하여 인류가 한 역법을 쓰고자 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그레고리력의 역법을 개혁하여 세계력(世界曆)을 만들겠다는 것이고, 우주 시대를 맞이하여, 다른 천체에서의 역법, 곧 화성(火星)에서부터 사용하게 될 화성력(火星曆)도 고안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위키백과). 이것들이 모두 해, 달, 별들을 보고 만든 것들입니다. 이미 창세기는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서, 낮과 밤을 가르고, 계절과 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창 1:14)라고 했습니다. 이러니, 해와 달과 별을 보고 앞날의 운수·길흉·화복 따위를 미리 판단하는 점을 치는 점성학이나, 점성술사가 안 생기면 오히려 이상하지요. 해와 달과 별을 보고 계절의 흐름, 날과 해가 가는 것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인류는 일찍부터 시간을 나누고 정리하는 달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고유명사와 보통명사

"예수의 이름, 예수의 시간" 이것은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이미 여러분들 중에서는 오늘의 제 설교가 지난주일 서진한 목사님의 설교인 "예수 탄생의 현재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실 겁니다. 기억하십니까? 예수의 탄생인 성탄이 한 개인의 과거지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과거가 지금 여기에서 재현되고 있는 현재적 사건으로 체험되어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에서 "시간" 명상을 인용하면서, 예수와 관련된 시간은 시계나 달력이 알려주는 "크로노스"가 아니고, 과거가 현재가 되는 "카이로스"여야 한다고. 제가 설교자에게서 여기 까지 들었을 때는 저는 담담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갑자기 비약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이젠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되었다고, 되어야 한다고, 지난주일 우리공동체 설교자는 이렇게 화두(話頭)만 던졌습니다. "화두"라고 하는 이웃 종교 용어를 쓴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단순히 "이야기의 말머리만"이 아니고, 이웃 종교인 불교에서 "참선하는 이에게 도(道)를 깨닫게 하기 위해 내는 과제"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용어를 제가 지금 쓰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설교자는 우리가 "로고스"라고도 하는 "예수"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 중요한 한 과제를 우리에게 던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라고 하는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로 바뀌는 과정을 명상하다가 한 언어의 문법적 용어 "품사"만을 가지고 시를 지은 도한호 시인의 시 "언어유희"(27-28쪽), "라틴 명사들에게"(41-42쪽) (도한호 시집, '언어유희', 새미, 2013) 등을 떠올렸습니다. 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 이러한 품사 이름들은 시어라기보다는 딱딱한 문법 용어지요. 이런 문법 용어가 시어로 쓰일 뿐 아니라, 신학의 중요한 한 주제를 표현하는 용어로도 사용 될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제가 오늘 이 과제에 얼마나 접근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 작은 시도만이라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을 "예수의 이름, 예수의 시간"으로 잡아 보았습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148:1-14)은 우주의 온갖 피조물을, 멀리는 우주 끝에서부터, 가까이는 우리 지구에서 우리와 같이 사는 이웃 피조물까지 초청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합창단을, 오케스트라를 만들려고 합니다. 시인은 누구를 부릅니까? "하늘"을 부릅니다. "높은 곳"을 부릅니다. "모든 천사들", "주님의 모든 군대", "해", "달", "별들", "하늘 위의 하늘", "하늘 위에 있는 물", 하나하나 일일이 불러 창조주 주님을 찬양하자고 초청합니다. "온 땅"을 부릅니다. "바다의 괴물", "바다의 심연", "불", "우박", "눈", "서리", "세찬 바람", "모든 산", "언덕들", "모든 과일나무", "백향목", "모든 들짐승", "가축", "곤충", "온갖 새들", 하나하나 일일이 불러 창조주 주님을 찬양하자고 초청합니다. 하나하나 일일이 불러 창조주 주님을 찬양하자고 초청합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임금과 백성을 부릅니다. 세상의 "모든" 고관과 재판관들을 부릅니다. 총각도 부르고 처녀도 부릅니다. 노인도 부르고 아이도 부릅니다. 하나하나 일일이 불러 창조주 주님을 찬양하자고 초청합니다. 합창단의 규모가 얼마나 어마어마합니까? 가히 우주적이라 할 만합니다. 합창단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우주적 오케스트라일 수도 있습니다. 초청받은 피조물들마다 저마다 독특한 몸의 악기를 저마다 다 가지고 있을 터이니까요. 단순한 관현악단과는 다를 겁니다. 여기 시인에게 초청받은 피조물들은 제각기 독특한 음색을 지녔기 때문에, 그것들이 모이면 수 천만가지 악기가 동원된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본문(이사야서 61:10-62:3)은 구원받는 이들이 마치 신랑 신부가 화려하게 단장하는 "구원의 옷"을 입게 될 것이라는 은유를 써서 그 날의 기쁨을 묘사합니다. 이 구원의 날이 이루어지기까지 하나님의 수고가 얼마나 컸는가를 함께 진술합니다.

신약본문(갈라디아서 4:4-7)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女子)에게서 나게" 하셨다는 점을 독자에게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면서 하나님의 자식으로 입양(入養)이 되었다는 바울의 말을 상기시킵니다.

복음서 본문(누가복음 2:22-40)은 평생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므온과 역시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리던 나이 많은 여자 예언자 안나의 첫 번 성탄 무렵을 전해주는 기록, 그리고 아이 예수가 나사렛에서 튼튼하게 잘 자란 것에 관한 기록입니다.

눅 2:22-35은 시므온의 축복과 고지(告知)가 주된 내용입니다. 아기 예수는 "모든 백성의 구원자"로 보냄 받은 분으로서, 이방인에게는 계시의 빛이 되고, 이스라엘에겐 영광이 될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만은 아들 예수가 받을 고난이 곧 어머니 마리아가 받을 고난임을 미리 알립니다. 아기 예수가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할 것이라고, 많은 이들에게 비방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아들의 그러한 삶 때문에 어머니는 칼에 찔리듯 할 것이라고....

눅 2:36-38은 예언자 안나를 소개합니다. 안나는 아셀 지파에 속하는 바누엘의 딸입니다. 예언자였다고 합니다. 처녀 시절에 혼인하여 일곱 해를 남편과 함께 살고, 그후 홀로 되어 여든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겨온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성전에 온 아기 예수를 만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눅 2:39-40은, 아기가 부모와 함께 율법에 규정된 모든 일을 마친 뒤에, 갈리의 자기네 고향 동네 나사렛으로 돌아왔고, 아기 예수는 자라나면서 튼튼해지고, 지혜로 가득 차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함께 하였다는 것을 전달해 줍니다. 나사렛으로 돌아 온 어린 예수는 튼튼하게, 영특하게 잘 자랐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그의 탄생 전후의 이야기, 이집트 피난길, 그리고 열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부모와 잠시 헤어졌던 것밖에 더 알지 못합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해 우리의 관심을 단순한 역사적 사료보다, 육신을 입고 태어난 아기들의 공통적인 성장배경 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하는 한 화가의 그림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가 그린 건데요,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발가벗겨 무릎에 엎드리게 하고 아이의 볼기가 시뻘게지도록 호되게 때리는 그림(1926)입니다. 볼기만 맞았을까요? 아버지 요셉에게 종아리도 맞았겠지요. 개구쟁이가 아니었다면 애가 아니었겠지요.

이름 "예수"

성탄에 태어난 아기는 이름이 "예수"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천사에게서 따로따로 아들 이름을 미리 전달 받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요셉에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마 1:21a).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게 말합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눅 1:31).

이제 우리도 안나 처럼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아기 예수에 대하여" 말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서진한 목사님은 지난주일 대림절마지막주일 설교에서 "예수"라는 이름은 이제 고유명사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보통명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설명이 충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상상은 더 확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이전부터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는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정확을 기할 필요가 있을 때는 구별하는 말이 덧붙곤 합니다. 예를 들면, "나사렛 사람 예수"(막 10:47), "목수, 마리아의 아들,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예수)(막 6:3), "목수의 아들"(예수)(마 13:55), "요셉의 아들"(예수)(눅 4:22),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요 1:45) 등이 그러합니다.

다음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기독교역사에서 교회가 일찍부터 고유명사 "예수"를 보통명사로 바꾼 역사가 있다는 것과, 역사적으로 이러한 보통명사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줄곧 축적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묘사한 메시아를 기독교가 예수와 일치시킨 것이 그 시작인 것 같습니다. 이사야서 9장 절6의 메시아를 바로 예수에 대한 예형론적(豫型論的 typological), 혹은 유형론적(類型論的) 예언으로 이해한 것이 그것입니다. 거기에 언급된 한 아기의 이름은 "기묘자"(奇妙者 Wonderful), "모사"(謀士 Counsellor), "전능하신 하나님"(Mighty God), "영존하시는 아버지"(Everlasting Father), "평강의 왕"(Prince of Peace) 등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다른 이름, 곧 보통명사가 된 예수의 기능적 이름들입니다.

생물학적인 고유명사 "예수"라는 이름이 그 이름으로 불리는 당사자의 어떤 "기능"을 고려하여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현상을, 우리는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로 바뀌는 과정에서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이름들이 신약성서에 와서 더 축적됩니다. 축적된 그 이름들은 당연히 보통명사입니다.

2004년 12월 스리랑카 실론성서공회의 창립기념행사에 초청을 받아 한 주간 동안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의 한 기념품점에서 인조목으로 만든 나무 십자가를 사온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눈길을 끈 것은 십자가 위에 JESUS라고 하는 고유명사를 중심으로 그 이름의 소유자가 지닌 다양한 기능을 가리키는 약 30여 개의 보통명사들이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생명의 양식", "빛나는 새벽별", "위로자", "모퉁잇돌", "구원자", "임마누엘", "친구", "선한 목자", "대제사장", "거룩한 구속자", "길" "왕중 왕", "도우시는 분", "하나님의 어린 양", "만유의 주", "메시아", "평강의 왕", "반석", "구주", "종", "하나님의 아들", "빛", "진리", "하나님의 말씀", "기묘자", "모사" 등입니다. 거꾸로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사유화 되는 현상도 발생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메시아", "그리스도", "로고스", "도(道)" 같은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내신 <당신>

미드라쉬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사람을 인도할 당신 자신을 대신할 존재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호크마'(지혜, 그리스어 '소피아')였다는 것입니다(욥 28:25-28, 특히 27절; 잠언 8:22-30). 다음으로 보내신 것이 '토라' 곧 "율법"입니다. 또 다음으로 보내신 것이 '다바르' 곧 '말씀'입니다. 또 그 다음으로 보내신 것이 "외아들"입니다. 요한은 그를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내신 것이 "보혜사" 성령입니다. 지혜로부터 성령에 이르기까지는, 한 실체의 다양한 이름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의 "시간"

"예수"라는 이름이 보통명사로 확대될 때, 그 사건은 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창조자" 혹은 "창조의 명공"(잠 8:22-30)은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그 때의 히브리어 이름은 '아몬'입니다. 시공간의 창조, 인간 창조 이후에는 '아몬'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상에 보냄을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호크마, 소피아)입니다. 지혜자들(욥 28:27)이 지혜전승을 담지(擔持)하고, 운반하는 이들입니다. "율법"(토라, 노모스)이 의사소통이 되는 언어일 때는 하나님은 당신을 율법에 담아 당신을 사람에게 보내십니다. 율법 전승의 전달자들은 제사장들입니다. "율법"이 오용될 때, 토라(가르침)가 노모스(법)로 오용될 때, 하나님은 당신을 "말씀(다바르)"에 담아 당신을 사람에게 보내십니다. 말씀의 전달자들은 예언자(나비)들입니다. 지혜와 율법과 말씀을 완성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그 임무를 로고스가 맡습니다. 로고스는 요한 당시 그리스철학의 최고의 가치입니다. 한문 권에서는 그것을 도(道)로 대치합니다.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께서는 당신의 빈 자리에 "영/성령/보혜사"(루악흐/프뉴마/파라클레토스)를 앉히십니다.

시간이 있기 이전부터 공간이 있기 이전부터 계셨던 분, 부활의 시간, 승천의 시간, 재림의 시간을 넘어,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영원무궁하신 분, 그 숱한 보통명사들이 바로 "예수"에게로 수렴(收斂)되고, 그 이름들이 "예수"에게서 발산(發散)되기 때문에, 이름 "예수"는 수렴과 발산 운동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높이는 "마리아의 노래"를 우리의 입술에도 올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가랴의 노래"도 함께 부르고, 이 세상을 떠날 때는 구속을 친히 목도한 시므온처럼 "이제는 주님께서 저를 평안히 돌아가게 하신다"고 기뻐하는 "시므온의 노래"를 부르며 삶을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직 제가 살아서 대화가 가능하고 의사전달이 가능한 동안은 예언자 안나 처럼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 이야기"를 잘 전달해줄 수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져 보기도 합니다. 첫 성탄에 아기 예수를 맞이했던 대열에 우리도 다 같이 참여하자고, 여러분들을 감히 초청하고 싶습니다.

■ 민영진 박사는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로, 구약 신학학자로서 모두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성경번역가이다. 연세대신학대학을 거쳐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목사는 '표준새번역'과 '새번역'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등의 성경 개정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 설교는 지난 2017년 12월 31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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