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세상과 다른 길로 간 선지자들- 세상과 다른 하나님

악은 과연 무엇인가? 과연 무엇이 좋은 것인가? 유대인들조차 악의 구별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신탁(信託)의 사람들은 알았다. 그들이 선택한 곳은 이상하게도 세상과 늘 달랐다. 하나님의 신탁으로 아브라함으로부터 비롯된 이 이상한 선지자들의 선택지는 늘 세상과 반대였다. 그들은 세상의 중심에서 나와 변방의 좁은 길로 나아갔다. 출(出) 갈대아 우르, 출(出) 애굽이 그들에게는 출 마귀, 출 지옥의 길이었다. 이 투쟁에 나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렇게 스스로 외롭고 좁은 길로 들어가는 선봉장이 되었다. 이 진정한 출애굽은 이 세상으로부터 아버지 하나님께로 건너가는 파스카(Pascha, 해방절, 유월절)를 예표한다. 이 ‘파스카’는 히브리 말로 바로 ‘건너감’을 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릇 행하여 각기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 세상뿐 아니라 유대인들조차 하나님의 선지자들과는 늘 삶과 악의 문제에 있어 다른 관점에 있었다. 롯은 삼촌 아브라함보다 자기 보기에 좋은 곳으로 가버렸고, 모세도 출애굽 이후에도 여전히 애굽 땅을 그리워하던 자기 백성들에게 배척당하였다. 사람들은 모세보다 선전선동가 고라를 더 좋아했고 그에게 열광하였다. 심지어 모세는 믿음의 동지였던 자기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의 도전에 리더십의 심각한 위기를 체험하였다. 사사 시대 사사들도 희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사사 시대 사람들도 하나님의 지도자 사사보다 자기들 옳은 대로 행하기를 여전히 좋아하였다.

자기 복음, 자기 신정론을 가진 게 세상 인간의 본 모습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렇게 늘 세상과 대립하였다. 반대로 세상은 늘 세상과 벗하면서 악을 따르며 하나님과 대적하기를 즐겼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악을 주신 이상한 분이라고 의심하고 불평하였던 것이다.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죄와 악을 징계하나 악을 선으로 갚으시려는 하나님

포로 전 선지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두 나라에 속해 있었다. 분열의 중심 북이스라엘은 신앙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과 근본은 부인하는 나라였다. 제사장도 있고 절기도 있었으며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유서 깊은 벧엘에는 남북 국가 분열의 중심에 있던 여로보암 1세가 세운 금송아지도 있었다. 세상은 안정되었으며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와 평화는 모두 자신들 몫처럼 보였다. 즉 하나님께 제사만 적당히 잘 지내면 모든 번영과 축복은 자신들 것이었다. 그렇게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의 암소’같은 귀족들은 부유했다.

하지만 그들의 세상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늘 상 술을 마시며 사치하여 사회정의와 종교적 도덕성이 무너진 사회였다(암 4:1). 즉 겉으로만 멀쩡할 뿐 빚에 눌린 가난한 자들의 외투와 담요는 부자들이 가져갔고 법정은 돈이 좌우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세상은 ‘상아궁’을 짓고 사는 부자들의 노래 소리와 노예가 되어버린 민초들의 탄식과 한숨이 뒤섞인 사회였다. 마치 오늘날 우리 사회 양극화의 역할 모델을 찾는다면 바로 이 당시 북이스라엘 지역을 보면 되었다.

물론 이 나라에도 선지자는 있었다. 예루살렘 남쪽 16킬로미터 근방에 있던 작은 고을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고 그는 이 양극화가 극에 달한 북이스라엘에게 다가가 하나님의 경고를 발하기 시작했다. ‘축복’과 ‘번영’의 마술에 취해있던 이 북이스라엘이 학벌과 스펙도 시원찮던 이 남 유다 과수원 농사군 출신 선지자를 참선지자로 여길 리가 없었다. ‘그렇게 잘 났으면 당신네 나라 남 왕국 유다에나 가서 선지자 노릇하면 될 일 아닌가?’ 북측 거짓 선지자들은 ‘너나 잘 하세요’하면서 남측 출신 아모스 선지자를 빈정거렸다.

살리시려는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은 인간의 생각과 능력을 초월한다. 앗수르와 북이스라엘이란 얼마나 더럽고 음란하고 패악하고 사치하며 잔인한 사회였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나와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이 앗수르와 북이스라엘 사회를 살리려 한다.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한 당시 십 이만 여명이 살던 앗수르의 큰 성읍 니느웨(욘 1:2)를 아끼신다. 심지어는 이 이방 성읍 니느웨의 육축까지 아끼신다.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넘쳐나며 백성들이 지식이 없어 망해가는, 번성할수록 범죄하고 영화(榮華)가 변하여 욕(辱)이 되게 하는 이스라엘(호 4:1-7)을 치료하고 패역은 고치며 도로 낫게 하시며 즐거이 저를 사랑하여 진노를 물리치신다.

아니 어찌된 일인가!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은 어디로 사라지고 하나님은 마치 금방이라도 이 패역한 지역과 사람을 건지려 한다. 마치 무자비한 이방 앗수르의 큰 성읍 니느웨로 이스라엘 선지자 요나가 가듯, 경건한 호세아가 음란한 고멜과 강제로 살아가듯, 하나님은 묵묵히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 회복하여 세우고 사로잡혔던 백성들은 돌이켜 저들로 황무한 성읍을 건축하고 거하며 포도원들을 심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과실을 먹으며 풍성하게 살 것이다.

 ‘때가 차매’ 오실 주님은 이미 패악이 극에 달한 이 시대에 오실 준비를 이렇게 일찌감치 백성들에게 계시하고 있다. 아! 십자가 사랑이란 과연 어떤 사랑이란 말인가? 악도 녹이며 악의 심장, 악의 근본, 악의 본질, 악의 눈물조차 닦아주실 수 있는 능력인가? 그 사랑의 능력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렇게 신정론은 우주와 세상과 사람의 죄와 악을 녹여버릴듯 궁극의 십자가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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