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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예배' 공동체 공동설교자 민영진 박사

마가복음서 10장에는 다섯 가지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1) 예수께서 이혼을 비판하신 이야기(1-12절),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축복하신 이야기(10:13-16절), 예수께서 영생을 얻는 방법에 관한 부자 젊은이의 질문에 대답하신 이야기(10:17-31절),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신 이야기(32-45절), 예수께서 눈먼 바디매오를 고치신 이야기(10:46-52절)

구도자의 질문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축복하신 다음에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예수에게 "달려옵니다". 그러더니 예수께 이르러 우리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여쭙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이 남자의 행동이 눈에 보이듯 선합니다. 우리 주님께 달려 와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이 사람. 이 사람의 질문에 여러 가지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그가 예수를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리스어 '디다스칼레 아가테'의 문자적 의미는 여기 번역에서 보듯이 "선한 선생님!"입니다. 신기하게도 우리말 하고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선하다"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아가토스'는 달리, "친절한", "이해심이 많은", "관대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좋은 선생님" "착한 선생님"은 교사로서 지닌 지적 능력과는 무관한 표현입니다. "좋은 선생"이라는 말은 교사로서의 "실력"이나 "능력"에 경의를 표하는 그런 표현은 아닙니다(UBS 주석).

이 남자가 제기한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 17절의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죽지 않고 오래 오래 끝없이 사는 것"일까요? 아니면 마가복음 10장 26절에서 제자들이 말한 "구원"의 다른 표현일까요? 적어도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죽지 않고 끝없이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이 사람이 그런 것을 구할 까닭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죽기 마련인데, 이 남자가 그런 것을 부정하고, 다른 사람 다 주어진 목숨만큼 살다가는 다 죽는데 자기 혼자서만 "죽지 않고 오래 오래 사는 것"을 바랄 까닭이 없지요.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당신을 부르는 호칭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으십니다. "선하신 선생님"이라는 명사구에서 당신을 그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그 칭호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시고, 다만 당신을 "선하다" 라고 하는, "선생님"을 수식하는 이 형용사 를 문제 삼으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에게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고 가볍게 나무라십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 젊은이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수사적 질문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그 남자에게 일러주십니다(18절).

이제 예수께서는 비로소 본론으로 들어가십니다. 영생을 얻는 것과 계명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예수께서 친히 열 가지 계명 중에서 특히 여섯 가지를 열거하십니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19절). 그러자 이 사람은 예수께 아룁니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20절). 그러자 우리 주님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寶貨)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계명 플러스[계명+]

율법서에는, 곧 <토라>에는, 예수께서 이미 열거하신 계명은 있지만 지금 여기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계명 플러스" [계명에다가 무엇인가 더 보태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는 계명을 잘 지켰다고 하는 이 구도자에게 [이제부터 영생의 길을 우리 주님께 여쭌 이 사람을 다른 이들과 구별하여 '구도자'라고 부르겠습니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계명 플러스"[계명+]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계명을 다 지키기도 어려운데 거기에 또 이 사람으로서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재산 포기"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구도자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니까요. 복음서 기자는 이 순간의 장면을 놓치지 않고 보도해 줍니다. 영생의 길로 들어서 보려던 그 구도자가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22절)

이것은 대단히 예외적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평소에 이런 말씀 안 하셨습니다. 산상설교에도 이런 "계명 플러스" 같은 내용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서 5, 6, 7 장에 나오는 그 많은 말씀에도 자선과 관련된 재산포기는 없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은 있어도(마 6:19-20),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는 말씀은 있어도(마 6:24) 재산포기를 전제한 자선행위가 당위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왜 이 구도자에게 그러한 엄청난 부담을 지우신 것일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그 구도자에게서 무엇을 보신 걸까요? 재산을 정리하여 자선을 베푼 예가 흔한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해야만 영생을 얻느냐고 물었던 그 구도자와 비교할 다른 인물이 혹시 지금쯤 생각나지 않습니까? (삭개오?) 맞습니다. 삭개옵니다(눅 19:1-10).

구도자와 삭개오

부자라는 점에서는 두 사람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말고는 두 사람은 너무나도 다릅니다. 한 사람은 계명을 잘 지킨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계명을 잘 지키기는커녕, 죄인으로 평판이 나 있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께 달려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께 말을 걸어 온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감히 예수 앞에 나서지는 못하고 예수로부터 멀리 떨어져 뽕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서 예수를 바라보다가 예수께서 내려오라고 하셔서 나무에서 내려 와 그의 집에 묵으시겠다고 하신 예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영생을 얻는 길을 예수께 물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다만 예수를 한 번 뵙고 싶은 사람입니다. (아마도 자기의 삶을 바꾸고 싶어 했고, 그러려면 예수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나 죄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알기에 예수를 환영하는 열광적인 무리에는 감히 끼지 못하고 뽕나무 위에 올라가 멀찌감치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가 주님께서 자기 이름을 불러주시니까 새 사람이 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믿음을 인정받은 무리 중에 섞여 한 무리를 이루고 싶었던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를 따르는 군중과는 감히 어울릴 수도 없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고, 숨어있는 소외자입니다. 한 사람은 재산을 다 팔아 그 수익금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우리 주님의 요청을 받고,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예수를 떠났던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께서 재산 포기 요청도 하지 않으셨는데, 자기가 먼저 자기 소유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하고, 또 자기가 누구에게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하니까, 예수께서는 지금 당장 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렀다고 하신 사람입니다(눅 19:8).

수술칼보다 예리한 말씀의 위력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예수께서 집도하신 수술"로 잡아 보았습니다. 그 계기는 오늘의 서신서 본문 히브리서 4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에 대한 묘사의 실재를 우리 주님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13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히 4:12-13)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한 구도자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달려 온 그 부자의 마음을 해부하십니다. 영생의 길을 묻는 부자 구도자는 비록 경건하고 신실하고 모범적인 믿음을 지녔다고 해도, 그래서 그러한 태도가 존경스럽고 기특하기까지 해서 우리 주님께서 그 사람을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막 10:21)고 합니다. 복음서가 우리 주님의 이런 밝고 환한 모습, 상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 이러한 예외적인 모습을 묘사한 것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해부의 칼을 대보십니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칼,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내는 칼입니다(히 4:12). 우리 주님께서 집도하신 수술에서 이 사람의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맙니다. 이 부자 구도자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것이 밝혀지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 6:24)는 말씀입니다.

계명을 잘 지킨 그 구도자가 울상을 짓고 근심하며 돌아간 다음에, 예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고, 어안이 벙벙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23절). 제자들도 구도자인 그 부자 남자나 다름없이 놀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놀라고 있는 제자들에게 같은 뜻을 표현을 달리해서 또 거듭 거듭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4절).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25절).

영생의 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

영생을 얻는 것과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것이 같은 의미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富者)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25절)면 재물이 많은 부자는 하나님 나라 들어갈 생각, 영생을 물려받을 생각을 아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던 것입니다(26절).

"예수께서 그들을 눈여겨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27절). 제자들을 건성으로 바라보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눈여겨보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당신이 하신 말씀을 듣고 놀라고 기막혀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들의 심정을 넉넉히 이해하시는 심정으로 보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27절).

그래도 베드로가 걱정이 되어 제자들을 대표해서 제자들이 받아야 할 하나님 나라 들어 갈 보증을 확인해야겠기에 자기들이야 말로 재산을 다 버리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 것과는 좀 다릅니다만) 이런 희생을 감수하고 예수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께 확인시켜 드립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28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리송하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29절),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30절)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서열이 바뀐다

영생의 길을 묻던 아까 그 구도자에게는 계명 준수에다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재산 포기만 첨가하셨는데, 지금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재산포기에 가족 포기[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를 버려야 하는 것]까지 첨가하여 말씀하십니다. 더 가혹합니다! 제자들은 할 말을 잃습니다. 유구무언입니다. 자기들의 태도가 이 경지까지 이르렀는지 스스로 살펴보고 있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은 말씀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31절) 이 말씀이 현재의 맥락에 맞는 말인지 아닌지는 저도 헷갈립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 18:1-5; 마 9:33-37; 눅 9:46-48)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길에서 다투던 제자들에게 한 번 하신 말씀인데, 거기에서는 문맥에 맞지만 여기에서 이 같은 말이 왜 다시 언급되는지는 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서열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구약에서는 탄식하는 욥이 등장합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욥 1:5). 그러나 우리가 다 알다시피 하나님과 사탄의 협약 아래 욥이 온갖 고난을 받게 됩니다. 우리 독자들은 욥이 왜 고난을 당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만 정작 욥 자신은 자기가 왜 고난을 당하는지를 모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람들은 욥이 겉으로는 성인 같아 보여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우습게보고 온갖 중한 죄를 범해온 죄인이라고 규탄합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은 당연한 말, 올바른 말처럼 들립니다. 엘리바스가 욥을 규탄하는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욥기 22장입니다.

"2 사람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을 끼쳐드릴 수 있느냐? 아무리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분께 아무런 유익을 끼쳐드릴 수가 없다. 3 네가 올바르다고 하여 그것이 전능하신 분께 무슨 기쁨이 되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하다고 하여 그것이 그분께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실제로는 그렇지도 못하면서]. 4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판하시겠느냐? 5 오히려 네 죄가 많고, 네 죄악이 끝이 없으니, 그러한 것이 아니냐? [지금 당하는 심판과 고통은 죄의 결과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6 네가 까닭 없이 친족의 재산을 압류하고, 옷을 빼앗아 헐벗게 하고, 7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물 한 모금도 주지 않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8 너는 권세를 이용하여 땅을 차지하고, 지위를 이용하여 이 땅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살았다. 9 너는 과부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고아들을 혹사하고 학대하였다. 10 그러기에 이제 네가 온갖 올무에 걸려들고,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다. 11 어둠이 덮쳐서 네가 앞을 볼 수 없고, 홍수가 너를 뒤덮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네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기라도 했느냐!] "12 하나님이 하늘 높은 곳에 계시지 않느냐? 저 공중에 높이 떠 있는 별들까지도, 하나님이 내려다보고 계시지 않느냐? 13 그런데도 너는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겠으며, 검은 구름 속에 숨어 계시면서 어떻게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겠느냐? 14 짙은 구름에 그가 둘러싸여 어떻게 보실 수 있겠느냐? 다만 하늘에서만 왔다갔다 하실 뿐이겠지!' 하는구나...." 13-14절은 우리의 신관 아닌가요! 엘리바스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21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지 말아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욥 22:2-13, 21)

얼마나 건전한 신학입니까? 어디 틀린 말이 있습니까? 그러나 욥은 엘리바스의 말이 다 오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직접 하나님을 뵙고 자기변호를 하고 싶고, 하나님이야 말로 자기의 변명을 들으시고 나면 자기에게 무죄를 선언하실 거라고 하면서 하나님 뵙기를 원합니다.

"2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 3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4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 6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7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욥 23:2-7)

마침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은 22편입니다. 우리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면서 암송하신 바로 그 구절입니다. "1a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욥도, 시편 시인도, 예수께서도,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대인들도 경험한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절망입니다. 이 구절은 더 이어집니다.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2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부르짖어도 모르는 체하십니다."

하나님을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욥과 예수(시편 22편 시인)의 응답이 서로 다릅니다. 욥은 하나님이 멀리 계셔서 자기 사정을 모르니 찾아가서 직접 뵙고 호소하겠다는 것이고, 시편 22편 시인이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나 시편 22편 시인이나 우리 주님의 공통된 경험은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일 겁니다. 그것은 시편 22편의 시인이 잘 표현합니다.

"6 그러나 나는 사람도 아닌 벌레요, 사람들의 비방거리, 백성의 모욕거리일 뿐입니다. 7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얄밉게 빈정댑니다."(시 22:6-7)

욥은 자기가 직접 하나님과 독대하여 자신의 결백을 변명하고자 합니다. 히브리서를 쓴 사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능히 이해하시고 변호해 주실 대제사장에게서 우리의 구원의 길을 찾습니다.

"14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히 4:14-16)

예수께 달려 온 부자 구도자, 예수의 제자들, 이 잘난 이들 대열에는 도저히 들어 갈 염치가 없는 돈 많고 재산 많은 부자 삭개오, 그리고 이들 세 종류의 신앙적 전통을 따로 따로, 혹은 복합적으로 물려받은 오늘의 우리들은 모두 영생 얻기를 구원받기를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구도자들입니다. 유대교는 계명의 길을 제시하고, 예수께서는 계명 플러스[계명+]를 제시하시고, 사도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에 의존하여 구원 받는 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양날가진 수술 칼과 같이 우리를 해부하는 말씀에 비추어, 수술실 모니터에 나타난 우리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민영진 박사는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로, 구약 신학학자로서 모두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성경번역가이다. 연세대신학대학을 거쳐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목사는 '표준새번역'과 '새번역'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등의 성경 개정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10월 14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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