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NCCK 전 총무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주현절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고 예수의 변모를 기념하는 주일 아침입니다.

지난 주간 매우 의미 있는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3·1운동100주년을 맞이하여 100년 전 일제의 폭압에 맞서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선열들의 헌신적인 노력들을 기리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기사연도 한국교회의 여러 단체들과 함께 「31운동의 의미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반도 미래구상」이라는 주제로 「3·1운동 100주년기념 국제 컨퍼런스」를 열었습니다. 저로서는 젊은 시절 매우 감동 있게 읽었던 「희망의 신학」의 저자인 몰트만 박사를 강사로 모실 수 있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호텔에서 자주 마주치며 가벼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 또한 저의 작은 즐거움이었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92세 된 노신학자를 대하면서 문득 ‘이렇게 한 시대는 흘러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자신의 신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인지 몰라도, 우리 신학은 더욱 정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신학은 정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과거를 회상하며 과거의 신학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런 느낌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에서도 들었습니다. 과거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모두들 합의하지만, 3·1절이 백년을 지난 지금, 그 역사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오늘의 우리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그리고 내일의 우리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도 못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조차 3·1 운동 백주년을 기념하는 예배와 각종행사를 상당부분 규모 있게 진행했지만, 오늘의 교회현실에 대한 냉혹한 반성과 미래를 세우고자하는 치열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단지 교회의 지난 헌신을 내세우기에 급급했던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내가 그때 살았다면 나도 목숨을 건 만세 행진에 기꺼이 참여하였을까? 사족이지만 기대를 모았던 하노이 북미회담이 합의 없이 끝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매우 의미 있는 한 주간을 보냈지만, 위와 같은 아쉬움을 안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봅니다.

구약의 본문은 시내 산에서 40일 금식 후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들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빛나 이스라엘 공동체가 두려워했으며,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후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는 말씀입니다. 서신서는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모세의 수건에 대한 해석을 통해 복음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고,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변화 산에서 변모하시었고, 그 변모에 대한 세 제자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그를 그리스도로 맞이하는 제자들의 진용도 갖추어가는 시점에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변화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 중에서 바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추천장을 들고 다니면서 사도임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도됨은 추천장에 쓰여 있는 글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직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이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옛 언약으로(예레미야 31:31) 복음의 시대에 예수를 통해 맺은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옛 언약을 받은 모세의 직분에 대해서도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있었던 것처럼 영광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광채는 곧 없어질 것이어서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것은 곧 없어질 광채를 가리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은 그 종말을 고하였다.(롬10:4)’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옛 언약은 없어질 것으로서 새 언약은 사라지지 않고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그 마음에 수건을 덮어 쓰고 있어 복음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옛 언약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처럼 과거의 삶에 매여 과거의 화려했던 모세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예수의 변모를 본 제자들의 반응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눅 9: 33)

오늘 본문 말씀은 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날 때 수건을 벗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벗어 버려야 할 나의 수건은 무엇인가?

바울은 율법의 시대에는 수건이 필요했지만, 복음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수건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나는 아직도 어떤 수건을 쓰고 있지나 않은지?

나는 예수를 믿고 그 분을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데, 그 영광의 예수님께 세 제자들처럼 엉뚱한 제안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이 아침 제 자신을 살펴봅니다. 언제부터인지 지난 삶의 공과를 열심히 따져보는데 상당부분 집중하고 있으며,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는 약간은 관조하며 치열함 없이 살고 있으며, 내일을 위해 꿈꾸는 것조차 부담스러워 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저는 그동안 배웠던 알량한 지식, 짧은 경험, 그리고 과거의 경력이나 지위라는 수건을 쓰고 복음을 대하고 있으며 종이에 쓴 증서가 저의 목사 됨을 증명하는 것이라 자위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것에 머문다면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라는 바울의 지적처럼 현실을 외면하며 미래를 설계하지 못하는 과거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가 하나님을 만나 얼굴의 광채가 난 모세처럼 위대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새 언약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얼굴에 쓰고 있는 수건을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수건을 쓰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며 수건을 쓰고서는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그 수건을 벗어던지고 예수에게 나아가야합니다. 교만의 수건, 전통의 수건, 조직의 수건, 지식의 수건, 경험의 수건 등 벗어버려야 할 수건들은 도처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만난 감격으로 한국교회와 우리 신앙인들의 얼굴에 광채가 빛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다”(고후 3:18)

교부들은 사람이 하나님과 닮은 상태에 이르는 것을 ‘신화’라는 개념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본래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발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신화’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신화’는 현재의 삶에서부터 시작되고 발전하여 미래의 삶에서 완성됩니다. 그동안 우리 기독교인들은 물론 한국교회는 너무 쉽게 ‘신화’의 길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2:20)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교는 지난 2019년 3월 3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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