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선 박사   ©자료사진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교육훈련원이 주관하는 에큐메니칼 신대원연합 공동수업의 네 번째 시간에서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정치윤리와 한국교회의 과제'를 주제로 강연 했다. 경동교회 장공채플에서 지난달 27일부터 시작돼 종강을 한주 남긴 지난 17일 수업에는 특별히 구세군사관학교 학생들도 20여 명이 함께 했다.

예상보다 학생수가 많아져 질의와 응답 형식의 수업은 힘들 것 같다며 서광선 교수는 강의 형식으로 해야겠다며 같이 사는 초등학교 3학년, 5학년 손자 손녀를 재울 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같이 들어보라며 강연을 시작했다. 또 한마디 덧붙여 서 교수는 자신은 1931년생이니까 만 83세라고 했다. 그의 나이 숫자 '83'은 그저 많다는 의미로 끝나기엔 너무 부족한 질곡 깊은 역사의 피와 눈물을 머금은 숫자였다.

이날 서 교수의 강연 제목은 '정치와 신학: 교회와 정치 그리고 정치신학'이었다. '정치와 신학'에 대한 메세지를 스토리텔링으로 전달하는 것은 '보수 진영' 교회의 부흥회 때 간증에서나 들을법한데 하며 좀 생소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치와 신학'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있을 수가 있을까 싶은 '눈물'도 자아내는 강연이었다.

83세의 생애가 시작될 수 있었던 그의 장군 할어버지 이야기부터 일제 치하에서 공산 치하에서 '해방'을 설교하며 매를 맞고 핍박을 받아야했던 아버지 목사 이야기, 그가 미국에 가고 신학을 공부하게 된 이야기, 그가 기독인 교수로서 정치에 어떻게 참여했는지 크리스천의 정치참여는 어디까지여야 하는 지 등을 나누었다

서광선 교수는 전남 송단리 강예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이야기를 하며 "우리 아버지가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경찰서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는 것을 경찰서 밖에 서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들었다. 그런 일이 거의 한달에 한번 있었다. 그게 일제 시대 크리스천의 삶이었다"며 "친일하는 조선의 전도사, 목사들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매를 맞아가면서 주일날 교회 와서는 설교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서 나오듯이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해방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고 한다. 그러면 사복경찰이 뒤에 앉아 있다가 더 하지 말라고 손을 흔든다. 거의 매주일 와서 전도사 목사가 무슨 설교를 어떻게 하는가 감시를 했다. 특히 다니엘 얘기, 모세 얘기만 나오면 잡혀가서 혼나고 그렇게 일제 치하에서 저항하는 그런 설교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때 우리 아버지를 포함해서 목사, 전도사들은 그게 정치라고 생각한 적 없다. 나의 신앙, 나의 믿음이 조선민족과 연결이 되는 것이었고 조선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그런 신념 하나로 그런 설교를 매를 맞고 감옥에 가면서까지 전했다"고 말했다.

이어 서광선 교수는 "우리 아버지는 굉장한 근본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진짜 꼴통 보수 목사였다. 그래서 제가 성경에 대해서 물어보기만 하면 종아리를 때렸다. 그러면서 '이 마귀 새끼, 목사 집안에 내가 마귀새끼를 기르고 있다'시면서 '왜 그렇게 질문이 많아? 성경은 그냥 읽고 암기하고 기도하는 것이지 물어보는게 아니야' 하셨다. 그 정도로 근본주의 목사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라면서 목사가 안돼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또 아버지가 개척교회를 하시니까 하루에 두끼도 제대로 못먹을 정도로 가난해서 자라면서 내가 이 다음에 자라서 전도사 되나 봐라, 목사 되나 봐라 했다"고 말하며 "그래서 대학 가서 철학을 전공하며 학기말 논문을 쓸때마다 신의 존재 증명을 반대하는 논문을 써서 항상 A를 받았다. 우리 아버지랑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6.25때 남쪽으로 피난와 국군 해군에 지원해 미국에 가서 훈련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만난 미국 친구의 권유로 미국에 있는 대학에 가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올해로 50년째 함께 사는 아내도 만나게 됐다고 했다.

서광선 교수는 "사귀면서 (아버지의 근본주의 신앙을 못마땅히 여기는) 생각이 달라졌다. 사랑이라는 게 뭐다라는 걸 알고나서는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회개를 했다. 그리고 '철학공부하느라고 그랬는데 이제부터는 신학공부를 하겠습니다'하고 뉴욕에 있는 신학교에 갔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제가 아버지에게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다른,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다른 세계를 보았다. 아니 구약성서를 읽는데 모세오경을 문서설이라고 해가면서 JEPD 문서를 얘기를 하는데, 기독교라는 걸 이렇게도 믿을 수 있는거구나 알게 됐다"며 자신의 신앙이 완전히 뒤집혔다고 말했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앞에서 연설을 전하고 있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모습. ⓒTHE U.S. NATIONAL ARCHIVES.

그는 "그때가 어떤 때인가 하면 마틴 루터 킹이 흑인해방운동을 하던 때였다. 우리 신학교 친구들이 데모를 하고 경찰에 잡혀가기도 하고 교수들도 잡혀가는 그런 때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이게 기독교인가 하고 친구들과 토론을 하며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월남전이 터져 친구들이 월남전을 반대하며 군대에 안가겠다고 하던 그때, 학교에서 친구들이 많이 읽던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이 바로 본회퍼의 옥중서한이었다고 말했다.

"여학생들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그 책을 읽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크리스천이 정치에 관여하고 국가에 대해서 반대하고 저항하는 게 살인까지 계획했다는 것에 대해서 많이 놀랐다. 그리고 기독교의 정치참여, 사회참여, 교회와 국가에 대한 생각을 깊이 갖게 됐다. 그리고 그때 몰트만의 정치신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데모에 참여하기도 하고 이민국에 걸려서 쫓겨날뻔하기도 하면서 공부를 겨우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때가 1969년이었다"

서광선 교수는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 개헌을 하겠다고 했는데 경동교회를 시작한 김재준 목사님이 삼선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저는 4.19를 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4.19 경험도 없고 5.16 경험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미국의 신학교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부패한 정치, 독재정치에 대해서 싸우고 반대하고 말하고 행동해야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이 기독교의 진수라는 것을 배웠다"며 "김재준 목사님이 앞장서서 삼선개헌을 반대하는 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저는 기독교와 국가, 교회와 국가, 그리스도인의 정치참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김재준 목사님이 하시는 일을 보며 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하고 노동자들이 권익을 찾기 위해서 일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대학의 교수로서 강의만 해야 되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크리스천 교수로서 할일은 신학을 가르치고 성경만 읽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이 독재하는 것을 보면서 이북에서 공산당이 독재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싶었다. 우리 아버지가 공산 독재정권과 싸운 것을 생각하면서 미국의 친구들이 흑인차별하는 것에 대항해서 싸운 정치운동을 생각하면서 저도 NCC 그리고 기독자교수협의회와 학생들과 함께 데모도 하고 감옥에도 가고 그리고 성명서도 썼다. 그러면서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기독교인으로서의 투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저는 이론적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이래야겠다 저래야겠다, 기독교인들이 정치참여하는 것은 옳다 옳지 않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 그리고 나의 경험, 우리 목사 집안의 경험 이런것을 얘기함으로써 한국의 기독교에는 이러한 역사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며 "(조선 땅에서 기독교를 믿음으로 순교당한)한국 천주교의 역사, (일제 치하와 공산 치하에서 고난 당한)개신교의 역사, 최근에 와서는 똘똘 뭉쳐서 감옥에 가면서 직장을 잃으면서까지 민주주의를 위해서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발언하고 투쟁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역사, 이것이 정치윤리의 역사고 정치신학의 역사라고 생각해서 이 얘기를 여러분들에게 했다"고 말했다.

서광선 교수는 "교회와 국가는 분리됐으니 정교분리의 원칙에 입각해서 우리는 정치문제에 대해서 말하면 안된다 얘기를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 자체가 정치라는 것을 인식을 하는지 안하는지 모르겠다. 정치와 교회는 정치와 신앙은 분리된 것이니 정치문제에 대해서 발언을 하면 안된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고 했다.

▲에큐메니칼 신대원연합 공동수업의 네번째 시간에는 서광선 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에 '기독교인의 정치참여는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묻는 질문에 서광선 교수는 "영국 제국주의가 인도를 400년 이상 지배를 하는데 그때 간디가 한 저항운동이 비폭력 평화운동으로서의 저항운동을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참 많은 인도의 민중들이 죽었다"며 "흑인들이 1960년대 초부터 흑인저항운동을 할때 마틴 루터 킹이 모델로 삼은 것이 간디의 비폭력 평화저항운동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움직이지 말라고 하는데 움직이는 것, 시민저항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어긴 것이다. 범법행위라고 하지만 진짜 범법행위냐 생각해 봐야 한다. 그때 경찰이 말하는 법과 정의를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법과의 충돌이 일어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했을 때 하나님의 법을 택하겠다는 것이 저항운동이고 정치참여다"며 "이것은 탁상공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해봐야 안다. 그리고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다 하는 자기 실력이 있다"고 했다.

서광선 교수는 "고린도전서 12장을 면 성령의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했다. 거기에 9가지 은사가 있는데 저는 한 가지 더 있었으면 했다. 그게 '데모하는 은사', '정치하는 은사' 이런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없다. 정치하는 은사도 각각 다른데 제가 받은 은사는 성명서 쓰는 은사다.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친구들이 저한테 그렇게 말한다"며 "자기가 할 수 있을때까지 하면 된다. 부들부들 떨려서 도저히 못하겠다 하면 안하고 교회 가서 기도라도 하는거다. 나는 도저히 뛰어나갈 수 없다 하면 설교라도 제대로 하겠다 하고 하는거다"고 말한 후 '기도라도', '설교라도'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판단의 문제다. 대통령이 애들 잃어버린 부모들이 아우성 치는데 나 몰라라 하고 지나갈 수 있을까 왜 이렇게 됐냐 하는 판단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젊었을 때 어머니, 아버지가 총 맞아서돌아가실 때 온 국민이 울고 불쌍히 여겼는데 그때 생각만 하더라도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냐 판단하는 것, 이게 정치참여다. 그렇게 설교를 할 수 있어야만 정치참여다"며 "로마서 12장은 우는 사람들과 함게 울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라고 했다. 그런 이들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울음, 그런 마음가짐 이것은 영적인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정치참여라는 것은 일률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신앙의 한 가운데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마음가짐 그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우리 아버지에게 제대로 믿지 않는다고 매도 많이 맞았지만 역시 그 신앙이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 그것 없으면 정치참여 생각도 못하고 견뎌내기 참 어렵다. 그런 신앙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은 숨어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표현을 해야한다"며 '정치참여'도 구체적인 '신앙'의 표현임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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