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아버지! 분산된 마음을 모아 주께 나아갑니다. 온 맘으로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세상도, 사람도, 상황도 아닌 주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이 날되기를 소원합니다. 종을 받아주소서. 아멘"

시편 95~99편은 제왕즉위시로 불리운다.
이 시들은 세계 창조의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세상은 그의 것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신다.
그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고 모든 신들을 초월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제왕즉위시들은 주로 장막절 축제에 불리워졌다.
이스라엘에게 장막절은 일곱 번째 달에 속한다.
그들에게 일곱 번 째 달은 한 해가 시작되는 달이다.
그들은 새해가 시작되면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의 행동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노래하였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1절).

하나님을 왕으로 믿는 자는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이다.
그는 즐거이 외치며, 감사함으로 노래하며, 시를 지어 즐거이 나아간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다(엡 3:12).
이것은 일상의 규례이이며, 실제적인 규례이다. 즉 매일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실제인 것이다.
장님으로서 수천 곡의 찬송시를 쓴 크로스비 여사는 아침마다 즐거이 하나님께 나아갔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찌 아니 기쁠까. 주의 얼굴을 항상 뵈오니 더욱 친근합니다.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보배 피로써 나를 정케 하소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지으셨다.
땅의 깊은 곳이 그 분의 것이며 가장 높은 산들도 그 분의 것이다(4절).
바다도 그 분의 것이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다(5절).
무엇보다 우리를 그 분이 지으셨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6절).
그 분은 우리를 지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기르시고 돌보신다(7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에게 무릎 꿇어 경배하는 것은 마땅하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둔 백성은 진실로 복되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르시며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되,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살도록 지으셨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 분 목장의 백성이 되고, 그 분이 돌보시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의미는 말씀으로 교제하는 "언약적 교제"에 있다(칼 바르트).

오늘 시인은 구원의 반석 되시는 하나님께 노래하며 외치자고 말한다.
구원은 언약적 교제의 회복이다. 시인이 외치는 구원의 기쁨은 하나님께 복종하여 그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주어진다.
말씀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은 그를 기르시고 돌보신다.
구원은 하나님 편의 일방적 은혜이나, 구원받은 자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빌 2:12).
두렵고 떨림은 하나님 앞에 머무는 우리의 실존이며, 온당한 태도이다.

그래서 시인은 구원의 실제를 다시 증거한다.
"'오늘'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7절).
여기서 오늘은 "항상 현재"를 뜻하며, 구원의 실제는 "오늘"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음에 있다.
이 시대 값싸고 허망한 구원의 교리가 난무하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지 않는 이들, "오늘"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는 이들이 구원받았다고 떠벌린다.
말씀으로 살지 않으면서 대체 무엇으로 자신들의 구원을 증거한다는 말인가?
그들은 구원받아야 할 종교인이거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고한 자이가나 둘 중 하나이다.
"너희 조상들이 므리바에서 그랬던 것처럼, 광야의 맛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집부리지 마라. 그 곳에서 그들은 나를 시험하였다. 내가 행한 일을 두 눈으로 보고서도 나를 시험한 것이다"(8-9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런데 이들은 광야를 지났어야 했다.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식"이셨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다(10절).
"그들은 마음을 다른 곳에 두고 있다. 나의 길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백성이다"(10절, 쉬운성경).
40년 동안 하나님이 그들에게 분노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여 일하신다.
사랑하는 자녀라도 하나님의 길을 다 알 수 없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현재를 사는 것이 그 분이 기르시고 돌보시는 자녀의 본분이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경배받으며, 사랑하는 주님이 되시며, 미래적 존재가 아니라 현재적 존재가 된다"(도로테 죌레).

어떻게 누가 그렇게 현재를 살 수 있는가?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상실한 자만이 현재를 하나님의 뜻으로 복종하게 된다.
"저는 저의 존재가 제 안에서 해체되고 하나님 안에서 산다고 말합니다...
제가 찾는 모든 것은 그 분 안에서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라비아).
하지만 광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길 앞에서 자기를 상실하지 않았다.
끝까지 자기의 길, 자기의 생각,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였다.

그들은 므리바와 맛사에서 완고하게 악을 행하였다(8절).
그들은 광야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물이 없다고 하면서 모세와 다투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을 주셨으나,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칭하였다.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출 17:7).

광야에서 물은 절박한 필요이다. 사치스런 필요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더 잘 아신다.
그러나 자기 생각을 내세운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이 안계신 듯 모세와 다툰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완악함이다.
나의 필요가 절박할 때 나를 외면하는 듯 보이시는 하나님, 우리도 그로 인해 원망하고 다툰다.
그것이 하나님께 완악한 것이라니! 나는 백번 죽어도 합당한 완악한 자가 아니던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필요를 구하지 않았으나, 속으로 얼마나 다투고 원망했던가!

거룩한 성녀로 추앙받는 라비아는 외형적으로 아주 가난하게 살았다.
가난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친척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라는 주변 사람들의 설득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세상이 그들에서 속하여 있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것을 달라고 요구한다면, 저는 부끄러운 자입니다. 어떻게 제가 그들에게 속하여 있지 않은 것을 그들에게서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돈이 그들에게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돈에 속해있다. 돈의 지배를 받는 자는 돈의 노예이다. 그런데 어떻게 노예에게 주인(돈)을 달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내내 하나님보다 필요를 갈망하였다. 완악한 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이스라엘은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시험하고 조사하였다(9절).

이스라엘의 40년 광야는 신자의 신앙여정에 비유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스라엘과 하나가 되었다(엡 2:10).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이며 곧 나의 역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가장 놀라운 일은 구원이다. 우리를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자녀를 기르시고 돌보신다. 자녀의 필요는 아버지가 채우신다.
그런데 우리 역시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필요에 안달하고 필요에 집착한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다른 곳을 향해 있다(10절).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다. 말씀 앞에 머물지 않는다.
광야의 백성들처럼 필요가 채워지지 않음으로 인해 원망하고 다툰다.
그러다 필요를 채워주는 거짓 목자들에게 영혼을 팔아 넘기까지 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하여 맹세하신다.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11절).

이 시대 교회 안에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필요에 목마른 자들이 있다. 그들은 설령 40년을 신앙생활을 해도 여전히 맛사와 므리바에서 지내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바라는 희망사항의 노예가 되어 현재를 살지 못한다. 현재의 만족이 없다.
그들의 일상은 분망하며 그들의 내면은 갈등, 원망, 불평이 그치지 않는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모든 상황에서 안식을 얻지 못함이다.

다른 한편 말씀에 목마른 자들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필요(존재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존재)만을 갈망한다.
그들은 맛사와 므리바를 지나 안식에 이른 자들이다. 그들의 일상은 말씀으로 시작되며 그들의 내면에는 거룩한 중심점이 자리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기르시고 돌보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안식한다.

♦묵상 기도

아버지...
저는 오랫동안 맛사와 므리바에서 보낸 자입니다.
늘 필요에 갈급했고, 필요로 인해 원망과 불평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평신도 때에는 세상의 필요를 목사가 되어서는 목회적 필요에 붙들렸습니다.
저는 매일 말씀 앞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분망했습니다.
제 영혼은 안식이 없었고, 지쳐갔습니다.
오, 아버지.. 저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자였습니다.

아버지...
나의 주님이 제가 받을 진노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매일 말씀 앞에,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나의 옛 사람을 필요에 목마르게 합니다.
자족하지 못하고 안식이 없고 오늘을 살지 못합니다.
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십자가로 갑니다. 나를 못박으소서.

아버지...
말씀 안에서 나를 확정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를 확인합니다.
이제 나의 목마름은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수입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오늘도 말씀 안에서 저의 미련함을 보게 하시고, 구속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의 입술의 찬양을 받으소서. 마음의 찬양을 받으소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서 목사는 하나님의 검증을 마친 영적지도자다.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와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말씀묵상선교회 #서형섭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