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제 4.

하나님의 행위는 언제나 매력 없고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위는 참으로 영원한 공적 (eternal merits)이다.

▲정진오 목사(미국 시온루터교회 한인 담당목사)

[기독일보=정진오 목사] 하나님의 행위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이사야 53장과 사무엘상 2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다'(사 53:2), '여호와는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 이것은 다음의 사실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은 율법과 우리의 죄된 모습을 통해 우리를 낮추기도 하고 두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 결과 인간의 눈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찮고, 어리석고, 사악한 존재로 본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존재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고백하는 한, 우리 안에는 형상(form)이나 아름다움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계시된 신뢰 등)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죄, 어리석음, 죽음, 지옥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고린도후서 6장 9-10절에서 사도 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사야 28장은 하나님의 낯선 사역이라 불리는 것들을 통해 그의 본래적 사역을 행한다고 말한다. 즉 그는 먼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므로 우리를 완전히 낮춘다. 그 후에 하나님은 그의 자비 안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심으로 우리를 높이신다. 이는 마치 하박국 선자자가 말하는 '진노 중에라도 자비를 잊지 마옵소서'(합 3:2)와 같다. 따라서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행위들을 불쾌하게 여기므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단지 그의 악한 것으로 본다. 실제로, 그는 사람들에게 어리석고 지겹게 보이는 것들을 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타락은 하나님이 우리를 처벌하실 때, 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난할 때 우리 안에서 생겨난다. 고린도전서 11장 31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참되게 심판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신명기 32장 36절은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고, 그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니'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우리(겸손하고 신실한 자들) 안에서 행하시는 매력 없는 사역들은 실제로 영원하다. 왜냐하면 겸손함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영원한 공적이기 때문이다."(LW 31. 44)

앞서 다루었던 논제 3에서 인간의 행위들은 "죽음에 이르는 죄 (mortal sins)와 같을 뿐"이라고 단언한 루터는 논제 4에서 인간의 행위와 반대되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논한다. 사실 논제 3과 논제 4는 평행 구조로 서로 대조를 이루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러한 대조는 루터 신학의 핵심인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의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논제 3과 4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이델베르크 논제 3과 4 비교표>

그렇다면 인간의 행위와 반대되는 하나님의 행위는 무엇인가? 언제나 매력 없고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행위가 어떻게 영원한 공적이 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루터가 말하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루터는 이사야 28장 21절에 대한 주해에서 하나님의 '낯선 행위' (opus alienum Dei) 와 '본래적 행위'(opus proprium Dei)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전자가 율법에 의한 인간의 심판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은혜를 통한 인간의 구원과 연관된다.

하나님은 죄된 인간을 의로운 자들로 변화시키는 '본래적 사역'을 행하기에 앞서, 자신의 본성과는 명백하게 모순되는 심판과 진노의 낯선 사역을 행하신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게 하기 위해서 먼저 율법을 통해 인간을 심판하고 파멸시킨다. 죄된 인간은 하나님의 이러한 낯선 행위로 인해 절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스스로 저주받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앞에 설 수 없다고 인정하게 된다. 자신의 약함과 절망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죄된 모습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계시된 참된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에게 자신의 본래적 행위, 곧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의 본래적 사역을 행하신다. 이렇게 함으로서 인간은 의롭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낯선 행위'가 인간의 눈에는 언제나 매력 없고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지혜롭고 선하시기 때문에 그것은 도리어 인간에게 유익하다. 곧 절망과 고난은 인간을 회개시키고 하나님의 구원하는 본래적 사역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영원한 공적'이다. 이에 대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너무 악에 빠져 있어서 하나님의 본래적 사역에 의해서는 구원 받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의 낯선 사역, 곧 우리의 불신앙을 파멸시키는 방식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다"(LW 16: 233-234).

루터가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두 가지 행위는 인간의 칭의(Justification)와도 연관된다. '십자가의 신학'는 죄된 인간이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영광의 신학'은 자신의 업적을 통해 하나님께 심판 받기를 원하고 의롭다 함을 얻기를 원한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누가복음 18장 10-14절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율법을 다 지켰고, 의로운 일을 했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냈고, 남들이 안 하는 금식도 일주일에 두 번씩 했다고 기도한다. 반대로 옆에 있던 세리는 너무나 죄된 자신의 모습에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눈도 들지 못하고 기도한다. 자신은 죄인이니 다만 주님이 오셔서 은혜를 주시면 살 수 있다는 것이 세리의 기도였다.

여기서 예수는 바리새인의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스럽게 보고하고 당당하게 구원을 요구하는 바리새인의 태도를 비난하시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세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말 밖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떨까? 바리새인의 모습일까? 세리와 같은 모습일까? 필자가 보기에 오늘의 한국 교회의 모습은 둘 다가 아니다. 도리어 명백한 범죄와 악행을 저지르고도 회개와 고백은커녕 화려하고 현란한 언변술로 자신을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위장한 거짓 선지자들로 넘쳐난다.

수 십억에 이르는 교회 돈을 횡령하고 징역형을 선고 받고도 박해 받는 순교자의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미화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승리인양 강단으로 돌아오는 자, 수년간 여교인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하고도 그 어떤 사과의 한마디 없이 다시금 버젓이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는 자, 선교 헌금을 가로채고도 이를 덥기 위해 위조 문서를 법원에 제출한 자, 불법 세습과 횡령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 한국 교회의 모습은 아닌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선포되는 메시지는 어떠한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겸손한 자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축복, 폭발적인 교회 성장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들의 메시지로 가득하다. 세리와 같은 기도는 기독교인들을 패배주의자로, 비관주의자로 만들어 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된 인간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심판과 고난의 '낯선 사역'을 우리에게 행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가 언제나 기이하고 매력 없어 보이지만, 그것은 인간을 겸손하게 하고 회개함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로 만든다.

루터는 이것을 '즐거운 절망'(delicious despair)이라고 부른다. 즉 하나님은 이러한 '낯선 사역'을 통해서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그의 본래적 사역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시험 또는 절망 - 하나님의 낯선 사역: 필자 주)이 우리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남겨둔다: 그것이 우리로부터 하나님을 빼앗아갈 수는 없으며, 실제로는 오히려 그분을 우리에게 더 가까이 데려온다."(WA 5.165, 39-166, 1)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낯선 사역을 경험한 자만이 '십자가의 신학자'가 된다. 참된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십자가의 고난을 경험함으로써 나온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어둡고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심판과 율법으로 우리를 완전히 낮추신 하나님이 이제 그의 자비 안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심으로 우리를 높여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바울이 말하듯,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다."(고후 6:9-10)

인간의 사역과 하나님의 사역의 근본적인 차이를 아는 것이 '십자가의 길'로 가는 또 다른 중요한 길임을 잊지 말자.

필자인 정진오 목사는 루터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Research Fellow와 예일 신학대학원 Visiting Scholar를 거쳐 현재 미국 시온루터교회 (LCMS) 한인부 담임목사로 재직중이다. 연락은 전화 618-920-9311 또는 jjeong@zionbelleville.org 로 하면 된다.

■ 정진오 목사는...

루터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Research Fellow와 예일 신학대학원 Visiting Scholar를 거쳐 현재 미국 시온루터교회 (LCMS) 한인부 담임목사로 재직중이다. 연락은 전화 618-920-9311 또는 jjeong@zionbelleville.org 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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