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란인교회 이만석 목사

[기독일보] 매스컴은 순식간에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역할을 손쉽게 할 수 있으며 이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대중을 속여 큰 피해를 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가장 가까운 예를 들어보면 세월호가 중심을 잃고 기울었을 때 선내 방송을 통해서 "당황하지 말고 방에서 기다리라"는 방송을 여러 차례 했다는데 이 때 "선실에 있으면 위험하니 모두 갑판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을 했다면 한 명의 피해자도 없이 모두 구출될 수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슬람에 관한 정보도 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이슬람의 테러 사건들이 온 세계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데도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가르치고 있으면 세월호 참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규모의 국가적인 재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혹자는 이슬람에는 온건한 이슬람도 있고 급진적이거나 폭력적인 이슬람도 있기 때문에 모두 같은 기준으로 봐서는 안 되며 온건한 무슬림들은 우리가 사회복지를 통해서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혜택을 주고 그들의 권리와 활동을 보장해주면 전혀 문제없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조지 부시 대통령도 선량한 미국시민 3000 여 명이 목숨을 잃는 9.11 테러라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을 때 19명의 테러범들이 모두 무슬림들이었으며 이것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철저히 계획된 의도적인 테러였다는 것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과의 전쟁"이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온건하고 선량한 무슬림들은 우리의 친구요 이웃이지만 테러를 저지르는 무리들은 철저히 응징하고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온건하고 선량한 무슬림이라는 말이 과연 제대로 된 표현인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 주변에 소위 온건한 무슬림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오히려 온건한 무슬림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슬람의 교리에 의하면 진정한 무슬림은 온건할 수 없으며 온건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얼마나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네 이웃의 불신자들과 싸우라.(꾸란9:123)

여기서 싸우라는 말은 아랍어 원문에는 까틸루(Qatiloo)인데 그 어원은 까탈라(Qatala)이며 이는 "죽이다, 자르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웃의 불신자들과 싸우라는 말은 서로 얼굴을 붉히며 욕설을 하거나 뺨을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 이웃을 죽이도록 노력하는 싸움을 말하는 것이다. 싸워야 할 이유는 그들이 이슬람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꾸란의 명령이며 모든 무슬림들의 행동지침이라면 그런 지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비무슬림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겠는가? 이슬람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은 꾸란의 그 구절은 전쟁 시의 지침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꾸란 9장은 전쟁 시의 지침이 아니다. 1절에 이웃과의 평화조약을 취소하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하며 2절에는 4개월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준다. 그런데 4개월이 지났어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불신자들은 어디서 발견하든지 살해하라는 것이 5절의 내용이다. 즉 여행 중인 비무슬림들을 보이는대로 죽이라는 명령이다.

이슬람은 불신자들을 죽이는 전쟁을 지하드라고 하며 이는 알라(Allah)의 뜻을 수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거룩한 전쟁(聖戰)이라고 부른다.

무함마드가 메디나의 통치자가 되어 군사적인 힘이 생기자 주후624년부터 평화롭게 공존하던 이웃 마을 사람들이라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격하여 남자들은 잔인하게 죽이고 그 아내들과 자녀들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이용하든지 팔거나 물물교환을 했다는 것은 이슬람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은 이슬람이 뭔지도 모르고 자신들이 "귀의했다"고 했는데 무함마드는 이들이 무슬림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꾸란49:14) 진정한 무슬림의 정의를 내려주었다. 진정한 무슬림이란 아래 3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꾸란49:15)

첫째: 알라와 무함마드를 믿어야 한다.

둘째: 절대로 의심하지 말하야 한다.

셋째: 생명과 재산을 바쳐 지하드(전쟁)해야 한다.

그런데 이웃 사람들은 거부하면 죽이겠다고 하니 이슬람을 받아들이긴 했는데, 다른 이웃 이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죽이러 가자는 전쟁에는 참여를 꺼려했다. 그랬더니 이웃과의 전쟁은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하는 의무사항이라는 계시가 내려왔단다.(꾸란2:216) 그러면서 전쟁을 해본 일도 없고 싸우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자 이들을 위선자라고 정죄하면서 이들은 신자인체 하는 자들일 뿐 사실은 불신자(Kafir)들이라고 선언했다.(꾸란3:167) 무함마드가 불신자라고 불렀다는 것은 살해해야 할 이슬람의 적으로 취급하겠다는 무서운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은 평화를 말하고 있고 그들과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이슬람의 실체를 숨기고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또는 속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꾸란이 폭력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테러나 폭력을 의무사항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매스컴을 통해서 왜곡된 정보일 뿐 사실은 온 세상이 이슬람으로 통일될 때까지 비무슬림들과 싸워 세상을 이슬람화 시키는 것이 저들의 지상목표다. 그것은 아래 꾸란 구절을 보면 확인해 볼 수 있다.

소동이 사라지고 종교가 오직 알라의 것이 될 때까지 싸우라. 그러나 그들이 단념한다면 알라는 그들의 모든 행위를 보고 계시느니라.(꾸란8:39)

이슬람 신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서 "세상에 무슬림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 싸우라"고 설명한다. 한국의 최영길 역 꾸란 각주에도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헌신된 무슬림이라면 비무슬림들을 향해 테러를 가하는 것은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것이다.

서양에서는 공영방송을 통해서 이슬람이 얼마나 평화스런 종교인지를 소개하는 프로를 방영한다. 어떤 나라에서는 독자적인 이슬람 방송국을 설립해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기존의 방송망의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 방송을 들어보면 이슬람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인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그 방송의 담당자는 물론 가장 헌신된 무슬림이며 인류 최고의 행복의 비결은 모두 이슬람을 믿어야 하는 것인 양 아름다운 말로 이슬람을 소개한다.

그런데 얼마 전 독일 뮌헨 모스크의 이맘 쉐이크 아부 아담이 아내 구타 혐의로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항상 이슬람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인지를 설교했으며 모든 폭력을 반대하는 독일의 대표적인 이슬람 지도자이다. 그는 독일 정부와 함께 종교 간의 화해 문제를 위해 사역도 하고 있다. 그러던 그가 자기 아내를 구타해 코와 어깨뼈를 부러뜨렸으며 그녀의 온몸이 군데군데 멍들고 여러 군데 잘라져 나갔다. 그가 자신의 아내를 구타한 이유는 31세 된 아내가 감히 서양사람 스타일로 산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슬람 성직자답게 자신의 아내를 구타할 때 꾸란의 구절을 암송했다고 한다. 황당하게도 이 사건이 발생되기 일 주일 전에도 그는 뮌헨의 카톨릭 대학에서 '폭력과는 거리가 먼 이슬람'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어쩌다 한 사람 정도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기도 하겠지만 이슬람의 율법은 아내 구타를 정당화 한다.(꾸란4:34)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아랍어 공영방송을 통해서 이슬람 성직자들이 아내를 구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설교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서 이슬람은 폭력을 반대하는 평화의 종교라고 설교한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보면 9.11 테러 이후 이슬람의 폭력적 이미지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고 평화로운 이슬람을 소개하여 미국과 이슬람의 가교 역할을 해 보겠다는 각오로 2004년 뉴욕의 버팔로에 "Bridges TV"라는 방송국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던 파키스탄 출신의 무슬림 '무자밀 모 하산(46)'이라는 사람은 2009년 2월, 4살과 6살 되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며 방송국의 공동 설립자인 자기 아내의 목을 잘라 살해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고 신고했으나 방송국 CCTV를 통해서 아내를 칼로 찌르고 목을 자르는 장면이 녹화된 것이 발견되어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두 사건은 서양에서 발생했기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을 뿐이다. 이슬람권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지만 주변에서 쉬쉬하면서 화제를 삼지 않고 언론에서 다루어주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묻혀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넘쳐나는 오일 달러를 이용하여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방송을 통해서 설득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별 관심 없이 방송 내용을 수용한 결과 지금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이슬람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가 만일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매스컴의 주장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믿어버리면 우리 후손들에게 평화로운 미래를 물려줄 수 없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급격히 늘어나는 무슬림들의 투표권에 눈독을 들이며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거짓말을 대변해 주고 있고 매스컴에서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거액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오일머니가 필요하기에 유럽에서 이미 이슬람 때문에 실패했다고 공언한 다문화 정책 등이 선진국 국민으로서의 성숙한 자세라고 홍보해주며 아첨할 뿐이다.

실제로 온건한 이슬람은 없는 것이다. 비무슬림과의 전쟁을 거부하는 무슬림은 위선자로 분류되는 것이 꾸란의 가르침이며(꾸란3:167) 비무슬림들은 사악한 짐승들이기에(꾸란8:55) 절대로 친구로 사귀어서는 안 된다(꾸란3:28)고 하는 것이 이슬람의 경전 꾸란의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무슬림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고 싶어 하는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하는 헌신된 무슬림들의 명예살인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비무슬림들과의 평화 공존이란 개념은 꾸란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고자 하는 무슬림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아래 꾸란 구절을 통해서 확인해 보자.

한편 너희로 부터 안전함을 꾀하고 그들의 부족을 안전케 하려는 또 다른 위선자의 무리를 발견하리니 그들이 돌아가 불신한 때마다 패배할 것이라. 만일 그들이 너희로 부터 물러서지 아니하고 또 평화를 제안하지 아니할 때는 너희가 어디서 그들을 발견하던 그들을 포획하여 살해하라. 이는 알라께서 너희를 위해 그 권한을 부여하였노라.(꾸란4: 91)

사실 온건한 무슬림은 꾸란의 정의에 의하면 이미 무슬림이 아니고 무슬림인 척하는 위선자다. 생명과 재산을 바쳐 지하드 하는 자만 진정한 무슬림이라고 꾸란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꾸란49:15) 온건한 무슬림들은 오히려 준비된 기독교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의 눈을 떠서 참 주님이신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만나게 함으로 그들도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함께 천국에서 영광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것이다.

글ㅣ한국이란인교회 이만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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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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