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당시 조선에서 중국으로 파송한 3명의 선교사가 현지에 함께 모였다. 사진 왼쪽부터 박태로·김영훈·사병순 선교사다. 모두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성격책을 들고 있다.   ©선교타임즈

[기독일보] 1888년 평북 의주 부사 김유현의 장남으로 출생한 김영훈은 아버지의 관직에 누가 될까봐 망설이던 끝에 죽마고우 김관근의 인도로 기독교에 입문하고 마포삼열에게 세례를 받아 크리스챤이 되었다. 마포삼열의 사랑방에서 김관근, 한석진, 그리고 양전백과 함께 신학교육을 받은 김영훈은 마포삼열의 조사가 되었고, 1913년 6월에 장로교 신학교 6회로 졸업하면서 그해 9월 의산노회에서 목사가 되었다.

선배 박태로와 동기 사병순과 함께 김영훈이 중국 산동 선교사로 파송을 받는 데는 다음의 두 가지가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에 온 미국 선교사들이 미국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힘들고 불편한 조선에서 젊음을 바치는데 크게 감격했던 김영훈이 기도하면서 해외 선교사의 꿈을 키워나갔다는 사실이다. 한편 1912년 조선장로교회는 총회를 조직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해외선교를 계획했고, 조선 500년의 근간이 되었던 유교에 감사하여 유교를 창시한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에 기독교의 복음으로 빚을 갚는다는 목적을 세웠던 것이다. 중국 회화를 연수하면서 김영훈이 서둘러 전도에 뛰어 들어 필담으로 복음을 전하였다면 중국어에 능했던 은사도 은사지만 선교사로서의 뜨거운 소명이 확인되고 있다. 선교현지 (중국) 교회와 외부 (미북장로교) 선교부와의 협력, 그리고, 자치, 자립, 자전의 삼자운동에 덧붙여 팀 사역 등 약 100년 전에 그가 실천했던 산동 선교전략이 현대 한국선교가 외면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미감리교회의 파송으로 미주 한인교회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북가주 일대에 흩어진 한인들에게 복음으로 위로하고 소망을 일깨워주는 일로 동분서주했다면 선교사로서 두 번째 텀이 될 것이다. 1927년 김영훈이 여전도회 전국 연합회를 조직함으로 선교운동에 있어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킨 것은 조선예수교 장로교 제16대 총회장으로 할 수 있었다기 보다는 여성 사역을 중시하는 선교관 때문이었을 게다. 1937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까지 삼일운동과 독립운동에 관계하고 있었다는 점은 영혼구원뿐만 아니라 사회구원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손상웅 목사

중국의 공산화로 1957년 방지일선교사가 귀국할 때 40개 교회 설립, 3개 노회조직, 학교 설립 등의 쾌거를 거두었으나 중국의 공산화로 뒷짐 지고만 있을 수 없어 대만선교가 시작되었고 (1949년 파송된 정성원은 최초의 대만선교사로 중국산동선교의 대기 선교사였다), 중국 산동 선교가 언더우드가 조선을 찾은 지 28년 만에 조선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명확하게 자리 매김을 하였고, 또한, 동양인에 의한 동양 선교의 효시가 되었다면 이러한 업적 한 가운데 김영훈을 우뚝 세울 만하다.

글ㅣ시드선교회 연구실장 손상웅 목사(풀러신학교 선교역사 전공·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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