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최근(4월 19일) 예수의 장례식에 사용된 수의라고 알려져 온, 소위 '토리노(Torino)의 성의(聖衣)'라고 불려지는 고대 유물이 이탈리아 토리노 성 요한 세례자 대성당에서 5년 만에 기자들에게 재공개됐다. 일반인을 위한 이번 전시는 4월 19일부터 6월 24일까지 이어진다는 소식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이가 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들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언젠가는 우리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사망의 날을 맞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많은 연구를 하여왔다. 그러나 사망을 이길 수 있는 조그만 희망이라도 발견했다고 전해주는 과학자는 그 누구도 세상에 없었다. 오히려 세상에는 갈수록 고치기 어려운, 이상하고 생소한 질병들이 많아지고 있을 뿐이다. 과학자들은 그런 질병들이 왜 생겨나는 것인지를 규명하기에도 벅찬 형편이다. 이렇게 죽음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많은 성인들과 학자들이 노력하였지만, 이 세상에 살다 간 어느 누구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었다.

■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런데 성경에 보면 바로 이 죽음을 이긴 역사상 단 한 분에 관한 놀라운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은 바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아리마대의 요셉이라는 부자는,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당시 유대인의 풍습대로 세마포로 단단히 싸서 분명히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그리고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장례에 사용하였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조롱과 고난을 받고 못 박혀 돌아가신 동산에는 한 무덤이 있었는데 아직 사람을 장사한 적이 없었기에, 그곳에다 예수님을 장사 지냈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 이렇게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가 예수님의 무덤에 와 보았는데, 그는 여기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어디론가 굴러가 버렸고,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리아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또 다른 한 제자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여서, 무덤으로 달려가 보니 정말로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두 제자가 무덤에 이르러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여 있었으며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놓여 있더라>

즉 예수님을 단단히 쌌던 세마포만 그대로 그곳에 남아 있었고, 예수님은 어디론가 없어져 버리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자신이 부활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기독교 신앙이 영생과 천국과 부활의 소망을 확신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셨으며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누구든지 그와 같은 부활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우리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 예수님 세마포의 행방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언젠가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신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부활의 증거가 되는 세마포를 잘 보관하여 오지 않았겠느냐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 같다. 어쩌면 정말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경은 그 이후 세마포의 행방에 관하여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있은 후 600여 년 동안 이 세마포의 행방에 대하여 알려 주는 책은 오늘날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후 유럽의 여러 지방에서는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라고 주장하는 천조각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세기에는 그런 천들이 많이 나돌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천이 바로 우리가 집중적으로 자세히 알아보려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는 수의(세마포)이다.

그런데 왜 이 수의만 그렇게 유명해진 것일까? 도대체 이 세마포는 어떻게 이 성당에까지 오게 되었을까? 이 세마포는 정말로 예수님을 쌌던 바로 그 수의였을까? 또 이것이 진품이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렇지 않고 가짜라면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 성경은 왜 이 귀중한 예수님의 세마포의 행방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아무런 실마리도 전해주지 않는 것일까? 이런 여러 가지 질문들이, 앞으로 글쓴이가 여러분들과 함께 알아볼 내용이다.

1357년,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약 150km 가량 떨어져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던 릴레라는 곳의 조그만 통나무 교회당에서는 한 전시회가 열리게 되었다. 전시회를 개최한 사람은 쟌느 드 베르기라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백년전쟁에 병사로 참가하였다가 그만 1356년 전사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릴레 마을의 영주이며 기사였던 지오프레이 드 샤르니라는 사람이었다. 졸지에 미망인이 되어 생활이 어려워진 베르기 여사는 사람들의 관심도 불러일으키고 돈도 조금 기부받기 위해서 남편이 소유하고 있던, 예수님의 세마포라고 알려진 이 수의를 공개한 것이다.

"이게 바로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란 말입니까?"

그 세마포에는 머리와 팔 부분에 흘러내린 핏자국이 보였으며 옆구리와 손목과 발 부분에도 얼룩진 핏자국과 채찍 맞은 흔적으로 추정되는 많은 점들이 보였다.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천여 년 전에 십자가에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이 세마포를 통하여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착각과 감격을 느끼게 했다. 이 작은 마을은 온통 이 전시물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큰 소동이 벌어졌고, 갑자기 유명해지게 되었다.

"도대체 이 수의가 어디서 난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베르기 여사에게 질문하였지만, 그녀는 남편이 이미 사망하여 이 땅에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그것을 자기 남편이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그것이 분명 예수님의 세마포라고 알려져 오던 것이라고밖에는 더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호기심에 놀란, 당시 트로이의 가톨릭 주교였던 앙리는 이 전시를 그만두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1389년 이 성의는 다시 한 번 전시되었다. 그러자 앙리 주교의 후임이었던 아르시스 주교는 이것을 1355년 화가가 위조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교황에게 전시 중단을 청원하였다. 이렇게 해서 성의에 대한 관심은 조금 누그러지는 듯하였다. 하지만 교황 클레망 7세는 샤르니 일가와 절친하였으므로, 이 문제에 대하여 위조품이라고 단정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 토리노 성당으로 넘어간 세마포 수의

▲지난달 18일 이탈리아 토리노 성당에서 공개된 '예수의 수의'. 프란치스코 교황도 6월21일 친견할 예정이다. '지구 최고의 보물'로 통하는 토리노 수의는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후 시체를 싼 옷감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얼굴인 듯한 모습이 그린 듯 나타나 있다. 이 천은 세로 4m, 가로 1m 크기다. 이마의 가시관 상처와 휘어진 코, 찢어진 오른쪽 눈꺼풀, 다섯 째와 여섯 째 늑골 사이를 찌른 창살 자국, 손목에 못박힌 자리까지 드러나 있다. 심지어 채찍으로 맞은 자국마저 선명하다.   ©토리노=AP/뉴시스

1400년, 샤르니의 손녀딸 마거리트에게 상속권이 넘어간 이 세마포는, 한 교회에 보관되면서 매년 강가의 들판에서 전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후 이 성의는 샤르니의 손녀였던 마거리트에 의하여 당시의 세력가였던 사보이의 영주 루이 공작의 손에 넘어갔다. 이 때부터 다시 이 세마포는 예수님을 쌌던 진품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루이 공작은 이 세마포를 얻게 된 것을 기념하여 교회를 건축하고, 그곳에 이 세마포를 잘 보관하였다. 이 수의가 바로 훗날 토리노 성당으로 옮겨가게 된 그 수의였다.

"토리노 성당의 수의는 어떤 화가가 그린 가짜이다. 특수한 방법으로 그것을 분석하면 원래의 물감이 무엇인지도 알아낼 수 있다."

중세의 율리스 슈발리에 신부는 이 같이 말했었다. 가톨릭에서는 대체로 이 수의에 대하여 이렇게 부정적이었다. 영국 런던의 예수회 신부인 서스턴도 그가 쓴 <가톨릭 백과사전>에서 "성 수의로 알려진 토리노 성당의 수의는 14세기 성직자가 그린 것으로 예수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저 신앙의 참고로 삼을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인지 아니면 위조품인지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미국의 물리학자 존 잭슨과 그의 친구인 육군 대위 에릭 점퍼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현대의 사진 기법을 세마포 분석에 사용하였다. 1974년, 이들은 알아보고자 하는 물질의 진하고 여린 정도를 분석하여 물체의 형상을 알아내었다. 이 방법에 의하면 거리에 대한 정보도 탐색이 가능하였다. 즉, 평면적인 사진을 굴곡과 명암이 있는 입체적인 3차원의 화면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우주 탐험 계획에 종종 사용되어 오던 VP-8이라고 하는 영상분석기도 사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들 과학자들은 수의에 나타난 얼굴의 상을 정확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 수의의 주인공은 현대의 인물 사진보다도 분명한 모습을 나타내었다. 정확한 얼굴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토리노 성당의 수의는 예수님을 쌌던 진품이 분명합니다."

이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1977년, 유럽과 미국의 세마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미국의 뉴멕시코에 모였다.

"세마포가 토리노 성당에 보관된 지 400년이 되는 내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마포의 신비를 우리들이 밝혀내도록 합시다."

이곳에 모인 학자들은 이렇게 결의하였다. 세마포의 본래 소유주이던 사보이 가문의 움베르토 2세도 자신이 망명하고 있던 포르투갈에서 죽기 전 세마포에 대한 조사를 허락하였다. 1978년, 토리노 성당의 아나스타시오 발레스트레로 대주교는 마침내 세마포 공개를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세마포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연구를 위한 조사단을 만들었다. 이 연구를 위해 수백만 불을 기부한 사람도 있었다. 여기에는 미국과 유럽에 있는 수십 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하였다.

■ 토리노 성당의 역사적 세마포 공개

1978년 10월 8일, 드디어 역사적인 세마포 공개가 토리노 성당 안에서 거행되었다. 여러 전문가들과 과학자들이 산 조반니 바티스타의 토리노 성당에 숨을 죽이고 모여 들었다. 그곳 홀에는 방탄 유리로 둘러싸인 제단 위에 낡은 상아 빛깔의 천이 하나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키가 180cm 가량 되는 남자가 상처와 핏자국이 가득한 형상으로 누워 있었다. 머리와 팔에는 피가 흘러내린 흔적이 있었고, 옆구리와 손목과 발에도 얼룩진 핏자국이 보였다. 그러나 즉석에서 이것이 피라고 확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몸체에는 수많은 작은 점들이 있었다. 이것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만들어진, 플라그럼이라고 하는 로마 시대의 채찍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로마 시대의 채찍은 가죽 끈에 끝에는 납이나 뼈로 만든 덩어리가 달려, 때리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세마포에 새겨진 주인공은 바로 이런 고통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정말 이것은 2000년 전의 플라그럼 채찍의 자국이었을까? 500장 이상의 사진이 촬영되고 연구를 위하여 세마포의 표면에 있는 꽃가루, 먼지, 섬유의 일부도 채집되었다. 주일에 시작된 이 작업은 5박 6일간 계속되어 금요일 밤에야 끝이 났다. 이제 사람들은 곧 세마포의 신비를 벗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은 빗나가기 시작했다.

■ 세마포에 나타난 흔적은 과연 언제, 누구의 것인가? 그 진위에 대한 논쟁

로스앨라모스국립과학연구소의 화학자 레이 로저스는 세마포에 새겨진 형상은 물감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시카고의 월터 맥크론박사는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분석해본 결과 물감 같다고 주장했다. 미국 예일대학의 생물학과 조지 맥크롤 교수는 피가 분명하다고 또 다른 반론을 폈다. 그런가 하면 사진 전문가인 미국 산타 바바라의 사무엘 펠리코리는 세마포의 형상이 시체에서 나온 기름, 땀, 향료 등이 합쳐져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면서 생긴 것이라는 색다른 주장을 폈다. 이처럼 어느 누구도 그것이 정말로 1세기 것이고 예수님의 것인지 확답은 주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 가짜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이탈리아 동남부 바리시에 있는 바리대학교 인류학과 빅토리오 페쉐 교수였다.

"토리노 성당의 수의는 14세기 한 무명 화가가 그린 것이 분명합니다."

1982년 그는 <인류는 예수의 수의를 발명했다>는 책을 써서 토리도 성당의 수의가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페쉐 교수는 컴퓨터로 형상을 분석한 다음, 탁본을 만들기 위하여 조각가 갈리아르디를 시켜 금속판을 조각하였다. 그런 다음 조각된 금속판에 적당한 열을 가하여 금속판의 조각이 탁본되는 실험을 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토리노 수의의 모습은 너무도 사실적이고 입체적이어서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토리노 성당의 수의는 14세기의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십자군 원정 시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군기로 사용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영국의 고고학자 존 니켈도 동조하고 나섰다.

"세마포의 피가 정말 피라면 빨간색보다는 검은색이 더 뚜렷해야 합니다. 그런데 수의에 나타난 색은 그렇지를 않지요. 그것은 중세의 미술가들이 즐겨 사용했던 황적색의 물감이 분명합니다."

이에 힘을 얻은 페쉐 교수는 "예수의 수의를 만들라고 하면 나는 당장이라도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세마포가 자세히 공개된 이후에도 이렇게 논란이 끊이지 않자, 마침내 로마 교황청은 1988년 6월 이 세마포의 진품 여부를 가리기 위하여 또 다른 실험을 계획하였다. 즉, 세계의 유명한 연구기관에 세마포의 정확한 연대 측정을 의뢰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 연구소는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과 스위스의 취리히대학, 그리고 미국의 애리조나대학 연구소였다. 이들 세 연구소에 수의의 핏자국으로 보이는 부분을 각각 세로 7cm 가로 1cm 크기로 떼어 보냈다. 세 연구기관은 방사성 탄소 동위원소 실험 등을 통하여 이 천이 언제 것인지를 실험하였다. 세 기관의 연구 결과 약 200여 년의 오차가 있기는 하나 이 세마포는 대체로 14세기 전후의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과학을 절대적으로 믿으려고 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은 그대로 공표되었다.

"토리노 성당의 세마포는 예수님 당시의 것이 아니라 중세 시대의 것이 분명하다."

로마 교황청은 이렇게 정식 발표하였다. 그렇다면 세마포를 예수님의 것으로 긍정적으로 보던 그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는 어떻게 된 것일까? 미 국립항공우주국의 존 잭슨과 에릭 점퍼는 "수의에 나타난 형상은 강력한 열과 압력에 의하여 분해된 인체의 형적이 분명하다"는 주장을 편 적이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무덤 속에서 부활하면서 순간적으로 아주 강력한 방사선이 나와서, 수의에 상이 새겨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즉 일본의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탄이 폭발할 때 사망한 사람들의 신체 자국이 담벼락에 새겨진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부활 기적에 굳이 방사선을 동원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세마포에 새겨진 형상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과학자들끼리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듯이, 우리들의 궁금증도 끝이 없고 풀리지 않는다.

프랑스 소르본대학의 유명 동물학자 이브 들라쥬는 성경에 나타난 장례식과 수의에 나타난 형상을 연구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한 적이 있다.

"세마포에 새겨진 형상이 예수님의 것이 아닐 확률은 백억 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당시 예수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백했다. 물론 이들의 연구는 1988년의 방사성 탄소에 의한 실험 결과 이전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럼 도대체 어느 쪽의 말이 맞는 것일까? 어쩌면 이것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는지도 모른다. 이제 세마포 소동에 대해 과학적인 것을 참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마지막 결론을 내려 보고자 한다.

■ 토리노 성당의 수의, 과연 그 정체는?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먼저 시체를 씻은 후에 여러 가지 향료와 함께 기름을 바르는 풍습이 있었다. 사실 그 기름은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성경에도 보면 마리아가 향유를 불필요하게 낭비했다고,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에게 책망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가룟 유다는 훗날 예수님을 배반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했다. 또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라고 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가는 장면이 복음서에 나온다. 영생과 진리의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물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고 요한복음은 전하고 있다. 이때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과 침향은 지금의 미터법으로 계산하면 약 45킬로그램이나 되는 꽤 많은 양이었다.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잘 개어져 있었다. 아무튼 결례 의식을 행하고 나면 시체는 때 묻지 않은 세마포에 싸여졌다. 이런 일은 주로 여인들이 했는데 천조각은 함께 이은 것으로 매듭이 없어야 했다. 유대인의 장례 습관과 성경이 전하는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예수님의 시체를 싸매는 데에도 당시의 풍습대로 여러 조각의 천을 이은 세마포를 사용하였음이 분명하다. 토리노 성당에 있는 문제의 수의처럼,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는 길이 4.5m, 폭 1.2,짜리 통베를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는 이보다 훨씬 길었을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5-7절에 보면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을 쌌던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다른 곳에 개켜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토리노 성당의 수의에는 몸의 다른 부분과 얼굴의 모습이 같은 천에 나타나 있다.

성경 원문을 자세히 살펴 보면 예수님의 몸을 여러 조각으로 된 천으로 쌌을 뿐 아니라, 미라를 만들 때 쌌던 것 같고 좁고 기다란 붕대 같은 것으로 쌌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게 볼 때에 토리노 성당의 수의는 아무래도 예수님 당시의 풍습이나 성경의 기록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또 한 가지의 문제는,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매기 전에 과연 시신을 씻었는가다. 왜냐하면, 토리노 성당의 수의가 예수님의 것이 되려면, 먼저 예수님의 시신을 씻지 않았다는 가정이 성립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의 시신에 정말로 결례를 행했다면 그럴 시간이 과연 있겠는가 하는 문제도 생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안식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즉,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유대인들이 이 때 결례를 행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소식을 전하는 유대인의 계간지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안식일에도 시체에 향유를 바르는 일은 가능하다. 단지 그러려면 반드시 다리가 꺾이지 않아야 한다. 머리 밑에는 베개를 넣어 둘 수도 있다. 또한 턱을 묶어 둘 수도 있는데, 그것은 턱을 서로 맞붙여 두려는 것보다는 더 이상 아래로 처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신이 씻겨서 장사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만약 예수님의 시체가 결례 의식을 치르지 않고 장사되었다면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시체를 유대인의 장례법 대로 했다는 표현은 결코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니고데모가 가지고 온 향품을 분명히 사용했다면, 그 시체를 먼저 깨끗이 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을 것이다. 시체를 가져다가 씻지도 않고 향품을 바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시신을 씻었다면 핏자국을 거의 제거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토리노 성당의 수의에는 너무나 많은 핏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리노 성당의 수의는 분명 예수님의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반론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새벽,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려고 시도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쩌면 이 내용은 예수님의 시신이 결례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장사되었으며, 부활하였음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진품의 여부에 대하여 말썽이 끊이지 않던 토리노 성당의 수의는, 지난 1988년 연대 측정 결과가 발표된 이후 예수님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또 그렇게 귀중하게 성의를 보관해 오던 성당과 바티칸 측도, 과학적 결과를 존중하여 이 수의가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고 발표를 해버렸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수의의 진품 여부에 대한 결론은 이제 나 버린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스페인 예수회의 코에로 보르고 신부는 "수의의 신비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수의에 관심을 갖도록 계획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과학의 힘을 빌어 성의의 신비에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일 뿐"이라고 말했다. 또 프랑스 베르나르대학 방사성탄소연구소장 자크 에벵 교수는 파리마치라는 잡지와의 회견에서 "과학자들의 끝없는 도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수의의 신비를 완전히 해명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마포 논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 성물 숭배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은

그러면 도대체 세마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과거 1990년대 국내 신문들은 해외 토픽 란을 통해 모세의 시체가 발굴되었다고 보도하여 큰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보다도 약 1500년 전에 살았던 이 모세의 시신도, 예수님의 세마포 못지 않은 기독교의 유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과거 이 문제를 자세히 추적·조사해 보았다. 그랬더니 모세의 시체를 찍은 것이라고 주장했던 그 사진은 꼭 1년 전에 노아의 시체를 찍은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과 동일한 사진이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 기사의 출처는 선정적이거나 황당한 기사를 주로 보도하는 영국의 황색신문 <선>지였다. 도대체 이렇게 이런 터무니없는 내용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런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사람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 같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고난당하셨던 십자가도 치우셨다. 예수님이 쓰셨던 가시 면류관도 보관되어 있지 않다. 모세가 하나님께 직접 받은 십계명을 새긴 돌판도 없애버리셨다. 그 귀중한 법궤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는 사실 다른 종교와 달리 성물을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구약 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조금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께서 이런 모든 물건들을 필요 없게 하셨다. 바로 예수님만이 우리 인류의 찬양과 경배와 기도의 대상이신 주님이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오히려 이상하거나 신기하게 생긴 물건을 섬기는 행위를 경고하고 있다. 특히 칼뱅은 가톨릭의 이런 성물 숭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중세 가톨릭교회들은 세마포 뿐 아니라 십자가, 마리아의 머리카락, 예수님의 배내옷, 심지어 어디서 구했는지 마리아의 내의까지 성물로 섬길 정도였다. 이런 성물들을 신기하게 여기고 섬기다가는, 오히려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변질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영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둔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좀 더 깨달을 수 있도록 계시하여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그 어떤 보이는 것도 이제는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성경은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와 인격적으로 만나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사실 어떤 피조물의 형상도 필요치 않다.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였지만 토리노 성당의 세마포가 예수님의 것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밝혀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과학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것을 명확하게 규명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세마포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의 그 어떤 이야기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 성물을 중요하게 여긴 적도 없다. 이제 우리들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세마포의 진품 여부는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세마포가 기독교 믿음의 중심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세마포의 존재보다는, 단지 죽음과 죄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해 주고 있을 뿐이다. 즉 기독교 신앙의 신비요 핵심은 세마포가 아닌, 부활하신 예수 그분 자신이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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