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 목사   ©기장총회

신학적 목회자 전경연 박사에 대한 회상

2014년, 10주기 추모의 글

전경연 박사님을 회상하면, 당시 1950년대와 '60년대에 신약성서 연구분야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셨고, 장로교의 뿌리와 개혁교회 신학전통의 위치에 서서, 근본주의적이고 교권다툼으로 어려운 한국교계에 신학적으로 크게 공헌하신 분들 중의 한 분으로 회상 됩니다.

내가 한신대에 들어가 만났던 당시에 전 박사님 서재 책상 위에는 칼빈의 초상화가 놓여 있었고, 그의 <칼빈의 생애와 그 신학사상>(1959년판)은 장공 선생님의 <십자군>지에 5년여 동안에 연재하셨던 내용들과 그 외에 칼빈의 논문들을 묶은 책입니다.

그 책 첫 장에 '칼빈의 초상화'와 "인간의 개조는 창조보다 곤란하다"는 칼빈의 짧은 글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전 박사님은 장로교 개혁교회 신학전통에 서서 칼 바르트 계통의 신학을 한국교계에 계몽적으로 소개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저서 <바르트의 교의학 개요>와 <복음주의 신학총서>들도 번역 저술해 주셨습니다.

전 박사님의 신약성서 분야의 유명한 책 <신약성서신학서설>은 한국에서는 처음 신약성서 분야의 신학노작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정말 신약성서를 신학적으로 잘 정리해 한국교계에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 뒤로 계속해서 <로마서 연구>를 비롯해 <고린도서신의 신학논제>와 여러 주석서 등, 몰트만의<희망의 신학>도 번역해 나왔습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귀중한 저서들을 읽으며 배우게 되면서 한신대에 이렇게 훌륭한 신학자가 계신 것에 우리 후학들로서는 자랑스럽고 긍지를 갖게 하였습니다. 정말로 전 박사님은 다작의 저서들과 꼭 필요하고 중요한 분야의 글들로 당시 어려웠던 한국교계를 가르치고 계몽시킨 신약성서 분야에 크게 공헌을 하신 분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이상의 전 박사님에 대한 신학자로서의 면모에 대한 기술은, 부족한 나의 아는 바로는 부분적으로 밖에 소개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전 박사님은 신학 교수님으로, 목회자로서의 진면모를 우리 후학들에게 본보여 주셨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전 박사님은 몸소 '경서교회'와 '성북교회'를 개척하셨고, 친히 목회를 하시며 교회의 기반을 든든히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대청교회'(강남구)에 부지를 기증하셨고, 한신대 신대원에 장학금 1억 원을 기증하셨다(안내문 참조)고 합니다.

회고하면 분명히 한 신학자로써 전공분야 신학을 하는데도 힘들 것인데, 목회자로써도 신실한 역량을 발휘해 우리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셨습니다. 필자인 내가 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전 박사님은 '신학적 목회'를 하셨다고 감히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목회 스타일에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신학적 목회'를 하는 것이 우리 후학들의 바른 목회 원리와 방향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전 박사님은 전형적 신학적 목회의 목회자의 모습을 본보여 주셨다고 회상합니다.

셋째로, 전 박사님은 그의 삶을 통해 단순 소박하심과 청빈 절제의 미덕을 우리 후학들에게 본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그의 삶으로 인격적 신앙으로 목회자의 진면목을 보여 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한신대 교내에는 교수님들의 사택과 학생들의 기숙사가 각 동마다 10여명씩 함께 어울려 생활할 수 있어서, 마치 어떤 신앙공동체 생활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수님들의 사택과 학생 기숙사 각 동에서는 저녁 늦게까지 공부하는 방들도 있었는데, 전 박사님은 연구(공부)를 가장 늦은 시각까지 하는데, 전기요금은 가장 적게 나온다는 말이 학생들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전 박사님은 그만큼 절제의 미덕을 생활화하였습니다.

이러한 전 박사님의 삶, 가정생활의 이면에는 김봉화 사모님의 충실하고 빈틈없으신 내조의 힘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회상합니다. 아마도 모르긴 해도 <복음주의신학총서>는 거의 자비로 출판하셨을 것입니다. 생활 면에서는 김봉화 사모님의 내조의 공이 지대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분 내외분은 내면적으로는 매우 강직한 소신이 명확하셨지만, 밖으로는 언제나 겸허와 신실, 청빈의 삶의 자세, 때로는 수집은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목화자의 진면목을 생활화하신 존경스런 어른들이었습니다. 특히 아드님들도 목회의 길을 걷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넷째로, 남은 이야기를 좀더 회상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되어서인지 신학교 기숙사에서 몇 학생들과 함께 주일이면 가까운 교회를, 당시 걸어서 10-15분 정도 거리였는데, 성북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장공 선생님 국민주택 집에서 성북교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부지를 구하고, 교회건축을 하였습니다. 처음, 의자 좌석은 널판자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성북교회 개척은 시작할 때는 작은 것이었으나, 목회자로써 전 박사님 내외분의 헌신적 섬김과 장공 선생님 가족들, 박봉랑 박사님 내외분, 이우정 교수님, 양정신교수님 들을 비롯하여 주위에서 뜻있고 여러 좋은 교우님들이 점차로 모이면서 교회가 이룩되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때 우리 몇 학생들은 어린이부 주일학교에 참여해 봉사도 하였습니다.

전 박사님의 설교는 신학적인 메시지가 많이 포함된 중요한 신앙의 삶에 지침이 되는 설교를 되도록 쉬운 언어로 친절히 이해시켜 주시며 하셨던 것으로 회상 됩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 후학들은 신학적 목회의 길을 가는데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한신대 교수님들의 훌륭하고 당시 일급의 신학자들과의 인격적인 접촉, 깨달음, 만남의 영향을 감사하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당시 전 박사님은 신약성서 분야의 최고의 신학자이면서 교회를 둘씩이나 개척하시고 목회하시며, 아무나 감히 할 수 없는 확신과 목회의 뼈대랄 수 있는 신학의 스승이었습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부족했지만, 어떻게 한신대 3학년 때쯤 <로마서 연구>를 선물로 받고 기뻐한 적이 있고 열심히 읽으며 배웠습니다.

그런데 당시 '65년도 한.일 간에 국교정상화 문제로 시국이 어려웠을 때 전박사님은 한신대에서 교수직을 잃었고, 박봉랑 교수님은 건국대학교로 이미 가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 분의 강의를 들을 수 없었음을 아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때 마침 안병무 박사님이 한신대로 오셔서 신약성서신학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연세대 연신원에 진학하였고, 당시 연신원 원장이신 김정준 박사님에게서 구약성서신학을, 서남동 교수님으로부터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한국어 번역이 나오기 전에 영문으로 읽으며 강의를 받았습니다. 신약성서신학은 문상희 교수님으로부터 강의를 받았고<부활전승연구>라는 졸업논문을 썼습니다. 그 후로는 설 세배 때에는 몇 분 교수님 댁을 찾았으며, 가끔씩 전 박사님을 찾아뵙고 목회근황을 알려 드리며 새로 나온 저서들 특히 <복음주의신학총서>들과 신약성서분야의 책들을 계속 읽으며 공부했습니다.

필자는 그 후로 미국 뉴욕 주 중부지역에서 미국장로교(PCUSA) 소속 한인교회에서 다문화 가정 목회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전 박사님의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기장회보>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기라성 같은 훌륭했던 한신대 여러 교수님들의 이런 저런 모습과 생각들이 그리워지며 모두가 다 존경스럽고, 어떤 때는 위엄스러워 감히 접근이나 말도 잘 표현 못했을 때도 있었지만, 졸업을 앞두고 파티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교수님들께서 우리 졸업 예정자들에게 특별히 마음을 열고 평소 때보다 더 친절히 사제간의 정겹고 사랑스런 대화와 인격접촉을 하면서 장래진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던 추억들이 마치 어제 그제 일이었던 것 같이 스쳐 갑니다. 전경연 박사님의 10주기에 즈음하여 존경하며 특히 '신학적 목회'를 본보여 주신 어른으로 회상하며 추모합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 글ㅣ이기영 목사(기장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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