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대통령 한국의 이승만 그리고 그의 신앙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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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송병기 박사

1. 이승만의 신앙과 독립을 위한 기초작업

이승만이 사형수로 감옥 생활하던 중 1899년에 성령의체험을 하고 예수님을 만난 뒤, 감옥에서 전도와 성경읽기에 몰두했다. 또한 수감중 1902년 콜레라가 돌아 하루 17명이 죽은 날도 있었다. 4-5일 동안 60여명이 죽는다. 홀로 무사히 넘긴 것은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이라 믿고 이런 기회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이라 생각하며 콜레라로 죽어가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죽어가는 자들이 복음받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감격 속에 얼굴이 빛나는 모습을 보며 더욱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는 감옥에서 당한 고문으로 인하여 생겼던 후유증으로 53년동안 고통을 당하는 손을 호호 부는 습관과 얼굴이 실룩거리는 고문의 휴유증. 24세에 당한 고문의 고통이 일생계속된다.77세가 되어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이승만은 1899년 양반으로서 조선에서 개종한 첫 사람이다. 그는 오직 살길은 예수님 밖에 없다고 믿고 전도한다. 이승만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주요인물 중에 1907년 7월14일 고종이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 2차 만국 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한 이 준 (18591.21- 1907.7.15)열사가 있으며 그는 이승만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회의 참석이 거부되자 할복자살을 한다. 감옥에서 전도를 받은 43명 중 간수도, 죄수도 기독교로 개종 그리고 그 사람들중 많은이들이 3.1운동의 주역이 된다. 독립운동 선구자가 되어 개화에 앞장 선다. 그 중 간수였던 이중진이 미국갈 때 여비를, 뉴욕에서 하와이로 갈때는 박용만이 여비를 대준다. 나라를 지키려다 들어간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 월남 이상재, 이승훈, 신흥우, 이원근, 유성준(물산장려) 이준, 모두 한성감옥 동기다. 그중엔 월남 이상재(1850.10.26-1927.3.29) 선생이 있다. 이 선생님은 조선의 스승으로 존경받으시던 분이며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설립하셨고 1888년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에 파송한 두명의 외교관중에 한분이다. 철저한 유고 선비였던 그가 25세 어린 아들과 같은 이승만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다음 철저한 믿음 생활을 하며 조선 최초로 YMCA(황성 기독청년회)를 Homer Hulbert 선교사를 도와 설립한다.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의 배후조정 인물이며 일본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으며 누가 배후 인물인가 물을때에 간단명료하게 “하나님이다” 라고 대답한다. 양반인 이수정은 일본에서, 윤치호는 중국에서 개종한 사람들이다. 1904년 러일전쟁때에 고종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아관파천이라 한다)을 안 일본은 국모 민비를 시해를 한다.

1904년 11월 조미수호조약을 맺기 위해 민영환이 그의 가정 생활을 책임지겠다고 가라고 해서 갔지만 1905년 일본에게 조선의 이권을 인정해주고 미국이 필리핀으로 진출하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자는 것을 결정하게 된다.(가쯔라-태프트조약)

2. 이승만대통령의 탁월한 외교능력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과와 실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과가 20%라면 실이 80%가 되는 사람이다. 이 인물이 아니였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프린스톤 대학원 시절 그때는 흑인입학이 안되고 유색인종도 쉽지 않았든 시절. Woodrow Wilson은 그의 교수였고 후엔 총장 그후엔 미국의 28대 대통령이 된다. 그는 이승만 학생을 총애했다. 그 가정에 초대되어 막내 딸과 중신의 소식도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더글라스 맥아더의 장인이 찾아와 자신의 사위라고 소개했을 때부터 친 형제처럼 지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의 날 초대된 맥아더는 축사에서. 목회자 처럼 “새로 탄생하는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이 영원하기를 기원한다” 고 하며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에 공격을 받는다면 미국 본토가 공격을 받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지켜줄 것을 약속한다. 그것 때문에 맥아더는 미국의 언론들의 비방을 받기도 했다. 미국의 대통령들 중에도 인맥이 많았다.

미국에서 1905년부터 근 40년 살아가면서 독립을 위해 만난 대통령들은 가스라 태프트 조약을 한 27대 테프트 대통령(1909-1913)을 비롯해서 우드로 윌슨(1913-1921), 워랜 하딩(1921-1923),켈빈 쿨리지(1923-29), 허버트 후버(1929-33), 프랭클린 루즈벨트(1933-45), 해리 트루만(1945-53),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953-61)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대총령이 없었고 아이젠 하워 대통령 당시 죤 포스터 덜레스 국방장관 등 많은 대통령과 국방장관 죤 맥아더 사령관등 조선의 해방을 위함 뿐만 아니라 한국동란등 어려운 대한민국을 도와 주었던 것도 능란한 외교 덕분이었다. 1944년 루즈벨트 대통령 당시에 태극기를 넣은 우표를 만든 거사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이승만박사는 대단한 정치외교를 발휘한 천재였다.

그의 외교 시작은 고종 말기다. 1904년 8월9일에 석방되어 11월4일 민영환의 도움으로 미국의 대한제국 특사로 간다. 외교관으로 출발한 시작이다. 그를 보내준 민영환이 일본의 만행으로 을사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빼앗기게 되자 1905년 11월 분개해서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될때 3일간을 운다.

1905년 2월에 조지 워싱톤대학에 입학을 하여 2년만에 졸업하고 하바드대학에서 영문학석사, 프린스톤에서 2년만에 정치학박사학위를 받고 1910년 6월14일 졸업을 한다. 논문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 은 이승만이 18~19세기 100년에 걸친 미국의 자유통상 무역과정을 분석하여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파헤친 국제법 변천사의 연구서,

국제법 분야가 독립되지 않았던 당시 미국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2년후 프린스턴대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출판 되는데 프린스턴 대학은 최고의 논문이 아니면 발행하지 않는다. 프린스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 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이 논문을 근거로 제창된 것이다.

1910년 한일 합방으로 망국에 설음이 있는 그해 프린스톤에서 국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0월 YMCA를 돕던 월남 이상재 선생님의 초청으로 서재필 박사를 돕기 위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미당 서정주의 리승만 전기).

1912년 3월26일 37세로 일본이 조작한 기독교인들이 데라우찌 총독을 암살하려고 105인이 계획하였다고 체포령을 내려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며 타이타닉호의 침몰 소식을 듣는다. 1912년 다시 미국에 온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살며 부녀 학교를 만들어 여권신장에 큰 역활을 할뿐만 아니라 남녀공학으로 먼 장래를 바라보며 교육을 한다.

송병기 박사(전 뉴욕장로회신학대 학장)

*본 칼럼은 송병기 박사가 지난 8월 18일 열린 한국교회정론 제6차 포럼에서 '세기의 대통령 한국의 이승만 그리고 그의 신앙'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발제문입니다. 본지는 송 박사의 허락을 받고 해당 발제문을 여러 차례 칼럼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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